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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파치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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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파치의 모험

정홍택 (상대 61)

I

‘파치’라는 별명을 가진 아기 파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조그만 파리가 옆에 오기만 하면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모두 슬슬 피합니다. 골치가 아파진대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 이것 저것 눈에 띠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아무에게나 마구 물어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파리’의 첫자인 ‘파’자와 ‘골치’의 끝자 ‘치’를 합해서 ‘파치’라는 이름이 되었답니다.

파치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늙은 개 ‘워리’하고도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그 집 주인 아저씨는 워리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파리들은 아주 싫어했죠. 심심하면 파리채를 들고 두리번거립니다.엊저녁에 파치 엄마는 그 파리채에 맞아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파치는 아주 많이 많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천장 구석에 늘어붙어 밤새도록 울고만 있었어요. 아침 해가 뜨자 주인 아저씨 는 워리의 밥을 그릇을 채워 마루에 놓고 갔습니다. 워리는 여늬 때 처럼 파치를불렀죠.

“파치야, 내려와. 밥 먹자”

워리는 천장에 대고 컹컹 짖으며 파치를 불렀어요.

“나 안 먹을래요. 배 안고파요.”

저 위 천장에서 파치가 말했습니다.

“이 밥 내가 다 먹는다.”

“맘대로 하세요.”

파치는 막무가내입니다.

“안 먹음 이 담부터 너랑 얘기 안해. 우린 친구도 아냐.”

이 말에 파치는 찔끔했어요. 워리 아저씨마저 친구가 돼 주지 않는다면 파치는 정말 외톨박이가 되거던요. 모두 골치가 아 프다고 슬슬 피하지만 엄마하고 워리는 언제나 친절히 대해 주었답니다. 파치는 세상에 나온지 열흘밖에 안됐어요. 아직도 설흔 날을 더 살아야하는데 친구 하나 없이 어떻게 혼자 살아요.

“알았어요 아저씨. 지금 내려 갈께요.”

마지못해 파치는 천장에서 부-웅 날아 워리 밥통에 살짝 앉았습니다. 마주 앉아 파치와 워리는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파치는 먹는 방법이 워리와 아주 달라요. 파리는 원래 입이 없어요. 입이 있을 자리에 길다란 대롱이 나와있고 이 대롱으로 끈적끈적한 침을 밥에 토해 놓지요. 그 침에 음식이 삭아 물같이 되면 대롱으로 쪼옥 빨아서 먹죠. 파치는 배가 뚱뚱해지도록 먹었어요. 이제부턴 안 먹고도 세 밤은 넉넉히 견딜 수 있습니다. 먹고나니 파치는 또 궁금한 게 생겼어요.

“워리 아저씨.”

워리는 ‘이 애가 또 시작하는군.’ 생각하며 파치를 내려다 봅니다.

“왜 주인은 워리 아저씨에겐 밥을 주고 우리 파리들은 죽이나요?”

”어, 그건…..”

어려운 질문에 워리 아저씨는 잠시 대답을 생각했어요.

“그건 말이야. 난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주거던. 집도 지켜주고 위험할 땐 내가 죽더라도 주인을 구해내지. 내가 젊었을 때 말야…..”

워리가 신이 나서 자기 무용담을 시작하자 파치는 재빨리 그 말을 끊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백 번도 더 들었거든요.

“우리 파리는 좋은 일을 안하나요?”

“글쎄. 별로 생각이 나지를 않는구나.”

“우리도 좋은 일 하는 것 있을 꺼예요.”

“그게 뭘까? 생각나면 말해보렴.”

”아침이 되면 우리가 제일 먼저 일어나 사람들 얼굴에 날아가 키스해 주며 깨워주거던요.”

“사람들은 키스를 좋아하지만 너희들 키스는 싫어한단다 .”

“왜요?”

“너희들은 사람에게 병을 옮겨 주기 때문이지. 가령 콜레라 같은 병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거던.”

“그럼 안 옮겨 주면 될 것 아녜요?”

“그럴 수가 없지. 네 다리를 보렴.”

파치가 앞 다리를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다리의 빳빳한 털 사이에 아주 조그만 병균들이 우글우글 붙어 있쟎아요. 다리를 비벼도 보고 흔들어도 보았습니다. 균들은 더욱 단단히 꼭꼭 붙습니다.

“그 봐라. 안 떨어지지? 그게 문제야.”

워리 아저씨는 안됐다는 얼굴로 파치를 내려다 봅니다. 그러자 파치는 화가나서 소리쳤어요.

“그럼 저 꿀꿀이 돼지 아저씨는 무슨 일을 하나요? 먹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안하쟎아요?.”

이 물음에 워리 아저씨도 바로 대답을 못하고 꿍꿍대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답이 생각났습니다. 너무 좋아서 컹컹하고 짖으며 말했습니다.

“저 돼지는 말이다. 그래 그래. 이제 생각난다. 죽어서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죽으면 좋은 살코기를 사람에게 주거든.”

“그럼, 우리 파리는 아무 것도 좋은 일 하는 거 없어요? 죽어서두요?”

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파리가 좋은 일하는 게 생각나지를 않습니다. 워리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파치는 또 물었습니다.

“아무 것도 남에게 좋은 일 할 수 없음 이 세상에 살 필요가 있나요?”

이 물음에도 워리는 대답을 못하고 멀거니 파치만 바라봅니다. 마주보는 파치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파치는 정말 정말 슬펐어요.

“잉 잉. 난 세상에서 쓸데없는 못난이야. 나도 엄마 따라 가고싶어. 잉 잉.”

워리도 슬펐어요. 단지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쟎아요.

“우리 좀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널 지으셨을 땐 그래도 이유가 있을거야. 틀림없이”

“있긴 뭐가 있어. 내가 없어지면 다 좋아 할텐데.”

눈물이 파치의 두 뺨을 흘러내립니다. 파치는 무슨 결심을 한 듯 입을 꼭 다물고 공중으로 부웅 날아올랐습니다. 공중에서 잠깐 서 있다가 저기 문 있는데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두 눈을 꼭 감고 전속력으로 날아갑니다. ‘저 문에 온 몸으로 꽝 부딪히면 난 끝장이겠지. 그럼 엄마 있는데로 갈 수 있을거야. ‘

 “파치야. 파치야. 안돼! 그럼 안돼!”

워리는 밑에서 컹컹 짖으며 날아가는 파치를 급히 따라 갔어요. 그때였습니다. 주인이 무슨 볼일이 있었던지 급히 문을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눈을 꼭 감고 문을 향해 내닺던 파치는 주인이 문여는 바람에 부딪히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곧 바로 문이 닫혀서 워리는 나올 수가 없었답니다. 안에서 안타깝게 컹컹거리며 문만 긁어대고 있었어요.

“아야, 밝아. 너무 밝아. 눈이 빠지는 것 같아.”

밖으로 튀어나오자 밝은 햇빛 때문에 파치는 정신을 잃은채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II

얼마가 지났을까…… 파치는 정신이 들며 눈을 떳습니다.

“어 여기가 어디야”

그 곳은 조그만 연못가였어요. 한낮인가봐요. 사방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매미만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파치의 입과 목이 바짝 타 들어가고 있었습 니다. 물에 다가서서 물을 빨아 먹었습니다. 한참 먹다 보니 물속에서 누가 파치를 빤히 올려다 봅니다. 새까맣고 큰 눈을 가진 괴물이었습니다.

“엄마, 무서워”

겁이 나서 달아나려고 두 날개를 폇습니다. 그랫더니 물속의 그 놈도 겁에 질린 얼굴로 날개를 폅니다.

“아, 이게 바로 나였구나.”

파치는 물에 비친 자기를 자세히 뜯어 보았습니다. 시꺼먼 몸, 빳빳한 털이며 아무리 보아도 예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거얘요. 앞발을 물 속에 넣어 발에 붙은 작은 균들을 씻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그 작은 놈들은 더 찰삭 붙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너희들도 나와 똑같이 쓸데없는 놈들이로구나.”

파치의 얼굴에선 이제 눈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너희들도 나랑 같이 죽어버리자.”

하얀 구름 저 너머에는 엄마가 있겠지. 파치는 높이 높이 솟아 올랐습니다. 햇님 있는데까지 날아가면 우린 타 죽겠지. 그럼 난 엄마를 만날 수가 있을꺼야. 눈을 감고 날아 올랐습니다.

“아 얏!”

머리에 무엇이 꽝 부딪혔습니다. ‘하늘 끝 인가보다.’ 파치는 몸을 돌려 발 끈끈이로 그 하늘에 착 붙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았어요.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커다란 해바라기의 높이 달린 이파리였어요.

“잎이 높이도 달렸네.”

파치는 이파리 위편으로 기어 올라가 눈을 감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아무 것도 먹지않고 굶어죽자. 인제 난 잡아먹혀도 겁나지 않아.’

서쪽 하늘에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습니다. 바람이 싸늘해졌습니다. 풀벌레들이 하나 둘 나와서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합니다. 음들은 파치 귀를 스치며 하늘 멀리 사라져 갑니다. 이슬이 몸을 다 적 셔도 상관이 없었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먼동이 트고 햇님이 방긋 떠 올랐습니다. 해가 아침인사를 해도, 서산에 넘어가며 작별인사를 해도 모두 파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있기만 했어요.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오고 세번째 밤이 지나갑니다.

파치의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갔어요. 날개는 축 쳐졌고 다리는 더 이상 몸을 받쳐 주지 못합니다. 날개를 요 삼아 그 위에 누워서 엄마 얼굴을 떠 올립니다. 워리 아저씨의 걱정스런 얼굴도 보입니다. 김이 무럭무럭나는 밥통도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파치는 움직이지 않았어요. ‘죽어버 리자. 내가 없어지면 다 좋아 할꺼야. 좋은 일 할 수 없는 난 살 필요가 없어.’

드디어 파치는 그 높은 해바라기 이파리 위에서 밑으로 몸을 내 던졌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요. 쓰러져 있는 파치 옆으로 지렁이가 지나갑니다.

 “이거 맛있는 먹이 같은데… 아이구 따거워. 온통 몸에 까만 가시가 나있쟎아.”

지렁이는 고개를 흔들며 제 갈길로 갔습니 다. 조금 있다가 개미떼가 지나갑니다.

“얘들아 이 놈을 우리 굴로 가져갈까? 겨울 동안 잘 먹겠는데.”

일 개미 대장이 말했어요.

“안돼요. 대장님. 이놈을 가져가려면 우린 대문을 다시 크게 만들어 달아야 해요.”

개미들도 그냥 갔습니다.

III

“붕-붕” 꿀벌이 날아 갑니다. 지나다가 저 아래 파치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려가 보니 아주 못생긴 놈이긴 했지만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 보니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꿀벌은 파치의 길다란 입 대롱에 자기 입 대롱을 대고 꿀을 조금 밀어 넣어 주었어요. 달고 향기로운 꿀이 입 속에 들어갑니다. 조금 있으니 파치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눈을 반쯤 뜨고 보니 거기 꿀벌이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쟎아요. 파치가 아주 기운 없는 소리로 꿀벌에게 말했어요.

“당신은 천사인가요? 여긴 천국인가요?”

“천사? 내가 천사냐고? 하하하. 야, 이 놈 되게 웃기네. 살려줬더니...츳츳. 이거 미친 놈 아냐. 암튼 난 간다. 잘 있거라.”

부웅 날아가려는 꿀벌을 파치는 꼭 잡았습니다.

“아저씨, 그냥 가심 안돼요.“

"아저씨? 점점 이상한 소리만 하네. 아저씨라니. 내가? 생전 첨 들어보는 소리네. 넌 대체 몇 살이냐?”

“세상에 나온지 열흘하고 사흘 지났으니까 열세살요.”

“그럼 나랑 동갑이네. 우리 친구하자.“

이렇게 파치와 꿀벌은 친구가 되었어요. 파치는 또 물어보고 싶은 맘이 생깁니다.

“꿀벌아, 너는 좋은 일 하는 거 있니?”

“좋은 일? 나야 좋은 일 많이 하지. 꽃에서 꿀을 따다가 여왕님께 바치고 또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거던.”

“꿀은 꽃에서 훔쳐 오는거니?”

”아냐. 우린 꽃에게도 좋은 일을 한단다. 꽃은 우리에게 꿀을 주고 우린 꽃가루를 다리에 뭍혀서 이 꽃 저 꽃에 옮겨 주거던. 그래야 꽃은 씨를 맺을 수가 있단 말이야.”

파치는 또 슬퍼집니다. 꿀벌도 남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면서 살쟎아요.

“난 아무 것도 남에게 좋은 일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난 살고 싶지않아. 잉 잉.”

단 한 번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파치는 말했습니다. 사연을 다 듣고 난 꿀벌은 파치를 위로를 해 주고 싶은 맘이 들 었어요.

“그럴리가 없어. 우린 모두 다 서로 도와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어있거든. 우리 찾아보자.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도 꼭 있을거야. “

꿀벌은 하늘을 쳐다 봅니다. 한낮이 기울어져 갑니다.

“그나 저나 우선 먹어야지. 자! 나하고 같이 꽃밭에 가자. 꿀따는 법과 꽃가루 나르는 일을 가르쳐 줄께.”

꿀벌이 부웅 날아 올랐습니다. 파치가 따라 가려고 하니 날개가 마음대로 흔들어지지를 않아요. 사흘을 굶었거던요. 꿀벌 은 돌아와 파치를 등에 업었어요. 끙끙대며 꿀벌은 아주 어렵게 날아올라 꽃밭을 향해 갑니다.

그 때였습니다. 파치의 머리에 삐죽 나와 있는 두개의 안테나에 아주 급한 위험 신호가 전해옵니다. 저 위 어디선가 파리 채가 날아오는 것 같은 무서운 소리가 났어요. 처음에는 까만 점 같은 것이 내려 오는가 했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둘을 향해서 쏜살같이 내려오는 것이었어요. 새까만 몸에 햐얀 입부리를 쫘~악 벌리고. “아, 안돼!” 꽥 소리지르며 파치는 여섯 다리로 있는 힘을 다해 꿀벌을 차 버렸습니다. 꿀벌이 저만치 나가 떨어지는 순간, 까마귀는 ‘쉬 익’소리 찬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어요. 채 피하지 못한 파치는 그만 꼬리를 까마 귀의 입에 먹혔답니다. 까마귀는 다시 하늘로 치 솟았습니다.

“퉤. 퇘. 파리 똥이쟎아. 에이 더러워.”

까마귀는 공중에서 침을 탁탁 뱉으며 멀리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꿀벌을 잡아 먹으려다 파리의 똥을 먹었쟎아요 글쎄. 까마귀에게 밑을 떼어 먹힌 파치는 땅에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잘려나간 자리에서 하얀 피가 흘러 나옵니다. 꿀벌이 파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파치는 뒤집어져서 힘없이 다리만 허우적 거리고 있었어요. 꿀벌은 입에서 밀납을 내서 파치의 밑을 막아 지혈을 시켜주고 다시 꿀을 먹여 주었습니다. 얼마 후 파치는 정신이 드는 듯 했습니다.

“꿀벌아, 나 아직 살아있는거니?”

꿀벌은 파치 입에 계속 꿀을 넣어주며 대답해 주었어요.

“그럼. 네가 날 살리려다가 이렇게 다쳤단다.”

“내가 널 살려줬다고?”

“그럼, 그럼. 넌 날 구해주고 대신 네가 죽을 뻔 했어. 많이 아프지?”

“밑이 빠진 것같이 아프지만 괞챦아. 내가 좋은 일을 한 거 맞지?“

꿀벌은 파치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까마귀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무 고마워 파치의 손을 힘있게 쥐었어요. 그랫더니 파치는 잡힌 손을 빼고 움추립니다.

“안돼, 꿀벌아. 내게 손대지 마. 거기 균들이 우글거려. 네게 옮길라.”

“뭐가 있다고 그래. 아무 것도 없는데.”

꿀벌의 말을 듣고 파치는 앞발을 들어 자 세히 들여다 보았어요. 정말 아무 균도 없쟎아요. ‘분명히 다리에서 우글거렸는데…..’ 다시 또 봐도 온 몸이 깨끗하기만 합니다.

“균들이 많이 붙어있었는데.....”

"하하하."

꿀벌은 깔깔 웃으며 다가와 파치의 손을 잡고 이야기 합니다.

“난 알아! 그 균들이 왜 없어졌는지. 햇님 때문이야. 햇님은 모든 균을 죽여주지. 너도 햇님 아래서 밝게 살면 그까짓 균 걱정할 필요가 없어.”

파치는 너무 기뻤습니다. 햇님 있는 세상이 이렇게 좋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꿀벌은 다시 말했습니다.

“이젠 너도 꽃에 가서 그 대롱 입으로는 꿀을 빨아 먹고 다리로는 꽃가루를 뭍혀 이 꽃 저 꽃 옮겨주며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어. 이젠 깨끗하쟎아.”

꽃밭에 도착하자 꿀벌은 꽃들에게 파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꽃이 말합니다.

“안녕. 파치야. 내 꿀을 마음껒 먹으렴. 그리고 열심히 돌아다녀 줘.”

나비도 와서 인사를 합니다.

“안녕. 파치야. 우리 모두 같이 사이좋게 살자.”

그 날부터 파치는 꽃밭에 살며 꽃들과 꿀벌과 나비하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꿀도 먹고 서로 도와주며 아주 행복하게 살았 답니다.

IV

이것이 ‘집파리’ 파치가 ‘꽃파리(Flower Fly)’ 가 된 이야기랍니다. 여러분도 꽃밭에 가면 꽃파리를 만날 수 있어요. 꽃파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마 깜짝 놀랄꺼얘요. 아주 예뻐졌거던요. 어느새 몸에는 꿀벌처럼 노란 황금 줄이 생겨났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남을 도와 주려는 착한 생각만 하기 때문인가봐요. 꽃파리를 만나면 꼭 이렇게 물어보세 요.

“너 파치를 아니?”

그럼 꽃파리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럼요. 우리는 모두 파치 할아버지의 후손들이예요. 파치 할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게 산답니다.”

-끝-  <2018 문학미디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작>


윤상래 미주동창회장 남가주 지부동창회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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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후기: 윤상래>

남가주 동창회 신구회장 이취임식과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2박3일간 방문한 LA 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꼈다.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지 북동부의 위축해 보이는 거리와는 달리 거리에는 optimism 이 넘치고 있었다. 2 월 3일 남가주 동창회 제 43대 강신용 회장님이 취임하는 연례 총회를 앞 뒤로 여러 동문들, 특히 미주동창회 전임 회장님들, 남가주 지부의 전임회장, 현회장, 차기회장단들을 만났는데 이분들의 한결같은 관심사는 미주동창회의 장래였다.

축사에서 “매 2년마다 이사를 하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미주 동창회는 매달 회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재정적으로도 건재하고 있다”라고 보고를 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은 걱정되는 일들이 미주동창회에는 존재한다. 첫째는 매달 회보 발행으로 항상 재정 지원이 요구되는데, 동창회의 고령화 문제를 생각하면 동창회의 장래가 걱정이 아니될 수가 없다. 그점들을 축사에서 언급하고, 장차 재정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작년 평의원회의에서 기금 육성을 결의했고, 그것이 곧 “관악후원회 종신이사회비” (*주:) 를 토대로 한 백년 대계를 위한 “SNUAAUSA CENTURY FOUNDATION”이라고 설명했던 바 그자리에서 차종환(사대 54), 강신용(사대 74) 두분이 종신 이사회비 3,000불씩을 기증하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목표액인 3백만불에 언제 도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없이 10년, 20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동창회의 장래를 위해서 너무나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일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성주경 남가주 직전회장, 이병준 미주동창회 제3대 회장, MRS. 이병준, 백옥자 조직및 광고국장, MRS 윤, 윤상래 미주동창회장, 박선우(음대 13, 현 USC 대학원생)

윤상래 (수의 62) 미주동창회 회장과 제11대 미주동창임원: 왼쪽부터 (존칭생략)– 윤상래, 지인수(전 회보 주필), 방석훈, 성주경, 김재영, 김은종(제11대 미주동창회장), MRS 김은종. 오른쪽 앞: 김병연, 노명호, 강호석, 이경희

왼쪽부터 시계방향: 김건진(문리 62), MRS 윤, 윤상래 미주동창회장, 오홍조 제7대 미주동창회장, 김영 (수의 63), MRS 김영

 

둘째로 숙고할 과제는 우리의 영원한 숙소인 동창회관을 마련하는 일이다. 지역적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역시 재정이 빈약한 미주 동창회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남가주의 여러 동문들도 이 과제를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공통 의견은 건물을 마련한다는 것은 Investment and Return의 형식으로 되어야만 하며 구입한 건물에서 수입이 있어 경영비를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결국 이 말은 동문들이 투자를 하고 거기서 나오는 Rental Income으로 건물 운영을 하고, 남은 이익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서울 마포에 있는 ‘서울대 장학 회 관’도 이런 식으로 550억원을 모을 수가 있었다 한다.

동창회관은 동창회 운영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고 기록 보관, 관리가 더 편리할 수 있을 뿐더러, 동창회보까지 발행할 수가 있다면 회장단이 바뀔 때마다 갖게 되는 5, 6개월간의 Learning Curve를 피할 수 있어 금상 첨화다.

2월 1일 저녁 오랜만에 뵈온 오홍조 회장님 (미주 제7대 동창회장) 께서는 기금설립이나 동창회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A crazy Person’이 필요하다는 농담을 하시면서 격려를 해 주셨고 그 당시에 오회장님을 보좌한 임원들은 1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자주 만나고 있다고 하셨다. 마침 같은날 다른 장소에서는 미주동창회 제 11대 김은종 회 장님과 전 임원들이 정규 모임을 갖는 날이어서 좀 늦게라도 참석해 그동안 그리웠던 분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총회 전 날인 2월 2일은 남가주의 성주경 회장, 전회장 김병연, 차기회장 강신용, 차차기회장 한귀희, 신임 총무 최용준 동문등을 만났는데 한결 같이 따뜻한 형제 자매의 우의를 느끼게 해 주었다.

2월 4일에 뵈온 이병준 제 3대 미주동창회장님은 퇴역 공군답게 한국 공군의 군사력에 박식하셨다. 현재 한국공군 전투 비행기 조종사는 4,300명을 넘는데 그들이 초청해 방문했던 공군사관학교에서 본 사관생도의 국가관, 애국심은 지금의 어수선한 한국의 정국을 바로 잡는데 주력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함께 참석했던 성주경 남가주 전임 동창회장은 “미주 동창회를 활성화 하기 위해서는 각 지부와 긴밀한 접촉을 해야 하며, 원로 선배님을 공경하고 후배들을 포용하며 장기계획으로 운영하면 된다”고 조언을 하였다.

2박 3일 신세를 진 박종수 박사님 댁 앞에서.

*주: 관악후원회비 일시금 3,000 불을 내면 그 기록이 영원히 미주 동창회에 보존되고, 연례 평의원 회의시는 참석을 할 경우 자동적으로 평의원이 된다.

조지아 지부 2018 정기총회 및 신년하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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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지부(회장 주지영)는 지난 2018년 2월11일 저녁 둘루스 KTN Ballroom 에서 정기총회 및 신년하례식 행사를 개최했다. 동문과 동문 가족 등 모두 68명이 참석했다. 주지영 회장은 신년인사에 이어 2017년의 사업을 돌아보고 2018년의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2017년 조지아 지부동창회의 사업들-네 번의 정기모임(총회, 봄ㆍ가을 야유회, 송년회), 월 골프모임, 장학기금 모금, 주소록 책자 제작, 세미나 프로그램 등-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지아 지부 자체적으로 장학위원회를 결성해 골프대회를 통해 기금을 마련한 점이 가장 소중한 성과였다.

2018년에도 네 번의 정기모임, 월 골프모임, 2차 장학기금모금 골프대회, 세미나 프로그램들(주중광)이 계획되어 있고, 동문 전체 여행도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영진 재무의 2017년 결산 보고와 2018년 예산안 발표가 이루어진 후, 두 개의 안건- 동창회비 인상안, 이사회 구성안-을 두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투표를 통해 원래 100불이었던 동창회비를 150불로 인상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개인 후원금의 부담이 줄어들 고 동문회의 활동도 더 여유로워질 전망이다. 이사회 구성안은 부결되었다.

토론이 끝난 후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차림의 안토니 맥(Anthony Mack)이 스코틀랜드백파이프 연주를 선보였다. 백파이프의 역사와 연주법 등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곁들임으로써, 생생한 백파이프 소리를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현장에서 듣는 백파이프 소리는 녹음으로 듣던 것 보다 훨씬 강렬했고, 마치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에서 미지의 짐승이 신비롭고 웅혼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했다.

식사 후 장학금 수여식에서, 네 명의 동문 가족들에게 장학증서와 함께 각 1천불씩의 장학금이 전달되었다. 장한웅(Freed-Hardeman Univ.), 정재훈(UGA), 니콜 심(Barnard College), 이정민(UGA)이 장학금을 수상했고, 장학금 후원에는 제일은행, 강창석, 공영식, 임한응, 유상봉, 박민, 사성주, 심정필, 신한은행, 백낙영(메트로시티 뱅크), 이경훈 (서울국제여행사), 주중광, 김무영, 이종석, 임수암, 임종원, 이주경, 이윤영이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일보 정치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애틀랜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하는 김상진 동문(정치 49)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한국 전쟁 체험자로서, 잿더미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우리 민족의 저력을 목격한 그는, 한국이 현재 직면한 경제ㆍ안보 위기를 진단하고 이 문제를 타결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강연이 끝난 후 다양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면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다양한 연령층의 동창들은 교가를 함께 부르며 진지하면서도 화목했던 모임을 마무리했다. [기사제공: 최재경(국문 90)]

김수영(사대 57) 동문 ‘제14회 대한민국통일예술제 해외동포문학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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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사대 57) 동문이 ‘제14회 대한민국통일예술제 해외동포문학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 2월 15일, LA 엔젤스프라자에서 열린  ‘2018 한미장인예술제 및 한미문인시화전’에서 시상식이 있었다.

김수영 작가는 수필집 ‘늘 추억의 저편’과 시집 ‘바람아 구름아 달아’ 등을 펴내며 70 세인 노년에 등단해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문단 활동을 통해 문학애와 문학정신으로 모범적 삶을 살아온 작가로 작품집과 진실한 작가 생활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 온 그의 문학세계가 높이 평가돼 대상에 선정되었다. 이 행사는 (사)대한민국장인예술협회가 주최하고 (사)한국신춘문예협회, (사)한국다문 화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하며 대한민국 국회가 후원한다.

뉴욕동창회 골든클럽 신년교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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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골든클럽 신년교례회가 3월 17일 포트리 더블츄리에서 80 여명의 회원의 참석으로 4시부터 시작되었다.

손경택 (농대 57) 골든클럽회장의 개회식 인사와 이준행 (공대 48) 전임 회장의 신입회원의 환영사와 정인식 (상대 58) 전임회장의 축배사, 윤상래 미주동창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홍종만 (공대64) 사무총장의 2017 년 사업보고와 결산보고가 있었다.

특별히, 이번 교례회를 위해 이준희(음대 95) 동문이 준비한 작은 음악회는 테너 조현호( 음대 05), 소프라노 이희정( 음대 03), 피아니스트 장현주(음대02) 동문과 함께 우리 귀에 익숙한 산촌, 가고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 등의 수준 높은 연주로 참석 동문들로부터 뜨거운 박수와 앵콜 요청을 받았다.

2부 순서 진행은 김광수 (공대 72 ) 동문의 재치있는 퀴즈와 귀여운 율동으로 모든 참석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특별히, 차기 뉴욕지부 동창회장인 손대홍(미대77) 동문의 적극적인 발품으로 많은 유용한 경품과 참가상이 나누어졌다.

뉴욕 골든클럽은 동문들의 고령화 현상에 따라 꾸준히 새로운 회원이 늘고 있으며, 매달 골프대회와 산행, 바다낚시 등과, 매주 열리는 컴퓨터 교실 등으로 회원들의 친목과 학습에 도움을 주고 있다. 

기사: 허유선(가정대83)

브레인 네트웍 워크샵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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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회장 윤상래(수의대 62)가 주관하는 브레인 네트웍 워크샵이 지난 3월 31일 (토) 오후 3시부터 5시 30분까지 보스턴 매샤츄세츠공과대학 (MIT) 스테타 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새로운 기술의 도전'이란 주제로 열린 이날 브레인 네트웍 워크샵은 이제 원로가 된 반도체 분야 세계적 권위자였던 강기동(공대 53) 박사와 떠오르는 신기술인 블록체인 전문가 김진화 코빗 창업자를 연사로 초청해 과거의 신기술의 탄생 과정과 새로운 기술의 펼침을 한 자리에서 듣는 시간이었다. 

강기동 박사는 힘든 거동에도 불구하고 멀리 네바다 리노에서 보스턴까지 와 동창회의 브레인 네트웍 워크샵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김병국 동문 (매샤츄세츠 주립대학 교수, 공대 71)의 사회로 진행된 워크샵은 윤상래 미주동창회장의 인사, 김용현 보스턴 총영사의 축사, 그리고 강기동 박사와 김진화 연사의 발표로 진행되었다. 

주제 발표가 끝난후 참석자들과 발표자들은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특히 암호 화폐와 블록체인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러한 기술이 미래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공식 워크샵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회의장 밖에 마련된 한식 부페를 들며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화창한 봄 날씨에 모처럼 좋은 이야기를 듣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주최측에 감사를 표했다. 

이번 브레인 네크웍 워크샵은 이전까지 미주동창회 평의원회의에 맞춰 개최해 오던 것을 별도 세션으로 독립시켜 행사를 개최한 것이 특징이다. 

이번 워크샵에는 윤상래 회장이 6,000불 이상을 기부하였으며, 김은한, 정정욱, 고일석, 이재신, 주중관/허지영, 김문소/김계숙, 이병준, 지흥민, 박영철/정선주, 이만택, 김용헌, 박종수, 임종식, 노명호, 박희진, 이경림, 전상옥, 정동구, 이전구, 오인환, 손재옥, 신응남/이문희 동문 등 많은 동문들이 후원을 하였다. (후원자 명단: 팜프렛 책자에 있음)  기사: 정태영(문리대 71)

 

2018 평의원회의 일정 및 호텔예약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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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제27차 평의원 회의
일시: 2018년 6월 15일 (금) ~ 17일 (일)
장소: Crowne Plaza Boston-Natick
1360 Worcester St., Natick, MA 01760, USA
Tel: 1-508-653-8800

호텔 예약 안내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평의원 회의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2018년 5월 15일까지 예약을 하셔서 호텔에서 제공하는 특별 할인 가격을 적용 받으시기 바랍니다. (Room rate: King or Double Occupancy $135.00 plus tax/night) 더블 룸의 수량이 적기 때문에 더블룸을 원하시면 가급적 빨리 예약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약을 원하시는 분은 Reservations Department (800-265-0339)로 전화를 하시거나 아래 예약 사이트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서울대학교 예약사이트:
(https://www.crowneplaza.com/redirect?path=hd&brandCode=CP&localeCode=en&regionCode=1&hotelCode=BOSNK&_PMID=99801505&GPC=SNU&viewfullsite=true)


(날짜 입력 전 화면 캡쳐)

예약 사이트에서 평의원 회의를 위해 머무르실 날짜를 입력하시면 자동으로 group code: SNU로 입력된 예약사이트로 이동하며 나머지 게스트 정보 등을 입력하고 예약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날짜 입력 후 화면 캡쳐)

특별 할인 가격 ($135.00 plus tax/night)은 평의원 회의 기간 (6월 14일 – 18일) 동안 만 적용됩니다.

공항 교통편 안내:
Boston Logan Airport에 도착 후 공항 버스나 택시 또는 우버를 이용하여 호텔로 오실 수 있습니다.

 공항버스를 이용하실 경우 Framingham 방향으로 가는 Logan Express bus service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다섯 방향의 다른 운행루트가 있으니 반드시 Framingham으로 가는 버스를 타셔야 합니다. 버스는 주중에 매 30분마다 운행을 하고 있으며 운임은 성인 왕복 $22 (65세 이상 $20)입니다. Framingham bus terminal에서 호텔까지는 차량으로 5분 정도 거리이며 호텔에서 Shuttle을 운행합니다. 도착하셔서 Crowne Plaza Boston-Natick로 전화 (1-508-653-8800)를 하시기 바랍니다. Logan Express bus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 웹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캡처 이미지 참조)
(http://www.massport.com/logan-airport/to-from-logan/
transportation-options/logan-express/framingham/)

 택시나 우버를 이용하실 경우 아래의 주소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거리는 23 마일로 약 30분 가량 소요됩니다.
Crowne Plaza Boston-Natick
1360 Worcester St., Natick, MA 01760


(Logan Express bus 관련 화면 캡쳐)

기차 교통편 안내
Amtrack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Boston South Station에 도착 후 택시를 이용하여 호텔로 이동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택시를 이용하실 경우 기차역에서 호텔까지 거리는 20 마일로 약 30분 가량 소요됩니다. 호텔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Crowne Plaza Boston-Natick
1360 Worcester St., Natick, MA 01760
Time /Date 6월 15일 (금요일) 6월 16일 (토요일) 6월 17일 (일요일)

미주 동창회 제27차 전국 평의원 회의 일정
Crowne Plaza Boston-Natick, 1360 Worcester St., Natick, MA 01760, USA

평의원 회의 관련 문의는 다음의 임원진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윤상래 1-978-835-0100, 이상운 1-508-251-9691, 장수인 1-978-264-2988

B형 간염과 간암의 퇴치운동, 그 첫 50년 동안의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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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수웅 (의대 57) 동문

그동안 우리 지구촌에는 여러 질병이 기복하였지만 이 ‘B형간염’만큼 조직적으로 퇴치된 사례는 대단히 드물다. 우선 이 퇴치운동은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사회에서 처음 시작하였고 한인교포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퇴치운동이 시작하기 전 수십 세기동안 치료할 수 없었던 이 질환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만성 B형 간염과 그로인해 유발하는 간암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지난 50년은 우리 교포들에게 큰 성취의 반세기였다.

우리가 의과대학 졸업학년에 올라오자마자4.19학생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그 다음해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장면정권을 퇴진시켰다. 이런 격동기에도 서울 대학병원 소화기내과병동은 역시 간경변증 및 간암 환자가 수십명씩 입원실을 채우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병의 원인균을 알지 못하고 있어 그저 풍토병인 줄 알고 주로 대증요법만 하고있어 많은 환자들이 황달끼에 팔다리는 말라틀어지고 배만 복수로 터질 듯이 불러올라와 신음하고 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서언하다. 환자의 대부분이 50세 전후의 집안 어른들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어른을 집으로 모셔가던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못하고 안타깝기만 했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객사를 금기시하는 관습이 있었고, 병원에서 숨지는 것도 객사로 간주하고 있었다. 많은 의학도들이 이렇게 집안 어른들을 앗아가는 풍토병에 도전할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 이르러 여기 필라델피아 암연구소에서 연구하던 불럼버그 (Baruch Blumberg) 박사가 ‘B형 간염의 항원’을 발견함으로서 B형 간염 바이러스의 정체를 규명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우리는 1965년을 B형 간염과 간암 퇴치운동(Campaign)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곧 이어 우리 서울 의대 동문인 한혜원 교수가 불럼버그 박사와 1971년부터 17년동안 일하면서 서울대학병원의 김정용 박사와 제휴하여 B형 간염 바이러스(HBV)가 간암 및 간경변증의 원인균임을 규명하였다. 대단히 획기적인 업적이다. 그후 한 교수는 곧 ‘간질환예방센터’를 창설하여 B형 간염과 그로 인해 유발한 간암의 임상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필자자신이 ‘한미간협회’를 조직하여 이 퇴치운동에 처음부터 동참하였다.

 

예방접종 생성

 1980년 초반에 이 B형 간염을 예방하는 백신(예방접종)이 생성되어 B형 간염을 미연에 방지하여 간경변증 및 간암으로의 진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계로 세계보건국(WHO)에서 이 백신을 ‘인류역사상 최초의 암예방접종’(The First

Cancer Vaccine)으로 명명하였다. 이런 공로로 불럼버그 박사는 1976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그후 많은 의학도들의 노력으로 만성 B형 간염, 간경변증, 간암의 예방과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그 치료제가 발굴되기 시작하여 점차로 효력이 월등한 경구 치료제가 출현하여 만성B형 간염 및 간경변증의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간암의 발생율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주말마다 한인교회를 찾아서

 우리 팀은 1983년부터 ‘B형 간염 예방접종’을 시작하였다. 예방접종을 하기 위하여 우선 혈액검사를 하여 B형바이러스에 이미 노출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필라델피아를 기점으로 미국 동부에 있는 한인교회, 한인회 및 한인실업인 단체들을 찾아 다니며 강연회를 열고, B형 간염 검사를 시행하였다. 필라델피아의 근교의 교회를 찾을 때는 거의 매 일요일마다 다녔고, 멀리 있는 교회에는 매격주 간격으로 찾아다녔다. 예배가 끝난 후 한혜원 교수가 잠간 강의를 하고나서 어떤 교회는 200 여명, 어떤 곳에서는 300여 명의 채혈을 하고 ‘간질환 예방센터’에서 검사하여 그 결과를 각 피검자에게 통보하여 B형바이러스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사람에 한해서 예방접종을 받도록 권장하였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코네티컽에서 남쪽으로 플로리다에 이르는 10 여개 주에 사는 교포들을 찾아다녔다. 곧 소문이 나서 중국인 및 베트남인 교회까지 다녀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총체적으로 약 3만여명의 피검자에서 약 5,000명의 보균자를 색출하고 그들을 따로 여기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토마스 제퍼슨 대학병원에서 계속 진료했는데 그 동안 중요한 치료법들이 개발되었다.

 

만성B 형간염의 세계적 분포

 만성B형간염의 분포를 보면, 지구촌의 3억 5천만의 ‘만성B형 간염’ 환자중 그 대부분(75%)이 아세아에 살고 있다. 중국에 1억 2천만, 인도에 4천만, 인도네시아에 천 3백만, 필립핀에 8백만, 일본에 3백 7십만, 남한에 2백 8십만의 보균자가 살고 있다. 그래서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오자, 한혜원 교수가 아세아 및 중미의 10개국에 가서 강의하고 다녔고, 또 미국내에서도 LA, 쉬카고, 달라스, 보스턴, 아틀란타 등지에 가서 계몽강연을 시행하였다.우리가 사는 미국에는 보균자 수가 2백만을 상회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75%)이 아세아에서 온 이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아세아 이민들은 모두 B형 간염 검사를 받는 것이 바람직 하다. B형 간염은 감염되고 나서 오래동안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예를 들면 주먹만한 간암을 갖고서도 전혀 증상 없이 매일 골프를 즐기며 살다가 간암이 터져서 복강에 쏟아진 후에야 병원을 찾는 교포들이 한 두사람이 아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다. 이 간암을 초기에 발견하였더라면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염경로

B형간염은 혈액이나 체액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간염 환자의 혈액이나 체액에 접촉된 사람은 모두 검사받아야 하겠다. 즉 오염된 주사기, 치솔, 문신기구, 면도칼에 의해 전염된다. 그러므로 한국 이발소에서 면도받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며 또한 보균자와의 성교로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B형 간염 바이러스는 대부분의 경우 보균한 산모로부터 신생아로 전염되기 때문에 산모들은 반드시 B형 간염 검사를 받아야 하며 임신하고 있는 동안 늘 의사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신생아는 전문의 지시대로 치료받어야 한다. 특히 해외에서 사업을 하거나 선교하는 동문들은 만성B형 간염의 세계적 분포사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세아 대륙 이외에도 아프리카, 남미 (페루, 부라질), 동유럽, 그린랜드, 알라스카 등이 만성B형 간염이 만연한 지역들이다. 이런 지역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반드시 B형 간염 검사를 받아야 하며 보균하지도 않고 면역도 없으면 반드시 예방접종을 받아야겠다. 예방접종은 6개월 내에 3번 받아야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A형과 B형을 합친 예방주사 (Twinrix)를 맞아도 무방하다.

 

조기진단과 조기치료가 가장 중요

 지난 20여년 동안 의약 연구진의 간단없는 노력으로 만성 B형 간염, 간경변 및 간암의 치료에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즉 하루에 한알씩 복용하는 효력있는 약제들이 나와서 만성 B형 간염 및 간경변증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간암의 유발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발암을 지연시킬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혹시 간암이 이미 발생하였더라도 초기에 발견하고 간암의 크기가 작으면 치료의 성공율이 대단히 높다.

한국에서는 흔히 간암은 치료할 수 없다고들 손사례치는데 이는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저지하는 항바이러스제재의 출현으로 환자체내의 B형 간염 바이러스의 수치를 줄임으로 해서 간암 치료를 국소치료로 마무리 지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간 이식같은 거창한 수술을 거치지 않고 간암의 국소치료와 항 바이러스제의 장기 복용으로 자기의 간을 계속 살려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초음파나 자기공명영상술에 의한 간암의 조기진단이 관건이다.

 

인체내에서 간의 역할

간의 기능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보면, 간은 인체의 신진대사의 중심이며 따라서 몸에서 생기는 노폐물을 걸러내며 인체에 들어오는 독해물을 처리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하므로해서 독성물질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한방약제나 여러가지 성분을 모르는 영양 보조제를 섭취하였을 때 제일 먼저 손상을 입는 기관이 간이다. 그러므로 연방약제관리국의 검증없이 시판되는 약물들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자연산이라해서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니다.

또한 간은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생화학공장으로 당, 지방 및 단백질을 분해, 결합, 재생성하고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간조직이 많이 손상되면 간 부전으로 생명을 연명할 수 없게 된다.그리고 간 조직속에 신경이 없는 관계로 간 속에서 암이 크게 자라고 있어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또한 간은 재생능력이 커서 어느정도 손상을 보아도 증상이 거의 없는 관계로 보통 환자들은 간 질환의 말기에 이르러 병원을 찾게 된다. 이미 간을 회생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이다.

 

간암발생기전에 관한 연구

B형간염바이러스(HBV)와 간암발생의 역학적 연구조사는 대만에서 많이 시행되었다.1981년 비즐리(Palmer Beasley, M. D.)가 2만 2천명의 대만사람들의 혈청을 정기적으로 장기간 검사한 결과 보균자에서 비보균자에 비해 63배나 높은 간암발생율을 보았고, 그 후 2006년 대만에서 나온 또 다른 보고를 보면 간암발생율이 HBV의 혈액수치가 높을수로 상승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두 보고가 상기한 한혜원 교수팀이 1982년에 발표한 역학현상 즉 ‘HBV가 간암의 원인균’ 이라는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HBV로 인해 간암이 발생하는 기전은 여러가지로 고려되고 있다. 즉 바이러스자체, 바이러스로 인한 간세포의 염증, 간조직의 염증,괴사, 재생, 섬유조직화, 바이러스의 핵산과 간세포핵의 병합, HBV의 X항원의 발암작용 등 여러가지 설들이 나오고 있다.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출현

치료제는 1992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주사약 인터페론(Interferon)이 나왔다. 상당한 흥분과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동양이나 한국에서 많이 보는 출생시부터 감염된 환자에서는 별로 효과가 시원치 않았다. 또 부작용이 심해서 환자들의 고생이 보통 아니었다. 1998년 비로서 B형간염의 첫번 경구용 약제로 라미뷰딘 (Lamivudine)이 나왔다. 기가 막힌 사실은 1983년 미국에서 많은 젊은 남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던 에이즈(AIDS)가 만연하고 있을 당시 에이즈약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에이즈 환자들 중에 HBV에 동시 감염 되어있는 환자들이 있었다. 이 환자들에게 라미뷰딘을 투여하던 중 에이즈 바이러스만 아니라 HBV까지 감소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HBV만 가지고 있는 환자들에게 라미뷰딘을 투여하였더니 HBV의 증식이 줄면서 간염이 나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 연구에 우리 교포들이 많이 참가하여 크게 혜택받았다.

 

이렇게 되어서1998년 마침내 라미뷰딘이 HBV 의 첫번 항바이러스제로 승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약으로 인하여 참으로 많은 만성 B형간염 환자들이 효과를 보았다. 라미뷰딘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라미뷰딘치료를 받지 않은 환자들에 비해 HBV로 인한 간암의 발생률이 많이 감소된다는 연구발표는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실 세계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암의 65-80%가 HBV로 인한 것이 그 당시의 사정이 었다. 후에 나온 항바이러스제들도 같은 결과를 낸다는 발표가 최근에 나오고 있다.

1998년의 라미뷰딘 출현이후로 더 많은 항바이러스제가 나왔다. 2002년에는 아데포뷔어(Adefovir, 약품명 헵세라), 2005년에는 엔테카뷔어(Entecavir, 약품명 베라클루드), 2006년에 텔비뷰딘(Telbivudine,약품명 타이지카), 2008년에는 노포뷔어(Tenofovir, 약품명 비뷔리아드)가 나와 전부 5가지의 항바이러스제가 현재 나와 있다. 한국에는 또 하나의 항바이러스제 클레뷰딘(Clevudine)도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트노포뷔어 알레페나마이드(Tenofovir Alafenamide)가 나왔다.

지난 15년간의 이들 약제의 치료로 현재는 제대로 진단받고 치료하면 간염을 치유하고, 간경변으로의 진전을 막고 간암으로의 발전을 차단하든지 지연시킬 수 있다. 더욱 기쁜 소식은 이미 간암으로 진전된 상태로 병원에 온 환자라도 작은 암이면 이미 생긴 간암은 국소적으로 제거함과 동시에 항바이러스제를 투약하여 암의 재발이라든가 새로 생기는 간암을 어느 정도 저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통계가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 나오고 미국에서는 우리 제퍼슨팀의 발표가 처음이었다.

 

항바이러스제재와 간암 치료

한혜원 교수의 경험을 들기로 한다. 벌서 옛날이 된1980년대 B형간염을 앓고 있던 환자가 이미 4cm의 간암까지 발전된 상태로 내원하였다. 곧 국소 치료 (고주파가열치료)로 이미 생긴 간암은 완전히 처리하였다. 그러나 B형간염을 앓고 있던 이 환자의 간조직 속에는 HBV가 계속 증식하며 간암을 진행시키고 있고 그 당시에는 HBV를 차단할 방법이 없었다. 간암치료 후 3개월쯤 지나면 남은 간에 간암이 또 생기곤 했다. 그래서 1988-1999년사이에 내원했던 간암환자들은 여러번의 간암 제거수술은 받고도 계속 새로 생기는 간암, 그리고 전이된 간암으로 대개가 1년 6개월 안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항바이러스제가 생기고 난 후에 같은 상태의 간암을 가지고 온 환자들은 내원하자 즉시로 항바이러스제를 투약하고 이미 생긴 간암은 국소치료, 혈관색전술(Trans-arterial Chemoembolization), 고주파가열치료(Radiofrequency Ablation), 마이크로웨이브 치료(Microwave ablation), 외과적출(Resection) 등으로 치료하고 남은 간의 HBV의 증식을 계속 억제하고 감소시키는 관계로 나머지 간에서 새로 간암이 발생한다든지, 또 이미 치료한 자리에서 간암이 재발하는 경우가 훨씬 적어졌다.

최근 제퍼슨대학병원에서 간암치료을 국소치료한 후 항바이러스치료로 15년간 생존한 환자를 비롯하여 여러간암환자들의 장기 생존률을 미국에서는 처음 나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일본, 중국, 대만에서도 비슷하나 훨씬 짧은 기간의 관찰을 발표하였다.

15년이상의 생존률은 한혜원 교수가 발표한 것이 세계적인 기록이다. 지금 그 환자들은 계속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므로 정상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전같으면 간장이식을 받아야 할환자들이었다. 이런 결과로 HBV로 인한 환자들 (심한 간경화, 간암)의 간장이식이 많이 감소하고 있다.

간암의 원천적 예방은 B형간염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B형간염에 걸린 사람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고, 이미 간경변까지 된 환자는 항바이러스치료의 장기치료를 받아야 한다. 간암환자에 대해서는 위에 이미 설명하였다.

 

HBV 치료의 전망

그런데 현재 쓰고 있는 HBV에 대한 항바이러스제들은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는 크지만 근치는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원조(cccDNA, covalently closed circular DNA)는 환자의 간세포의 핵속에 있고 무증식상태이기 때문에 항바이스제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이런 안타까운 문제는 이때까지 치료가 힘들어서 고생하던 C형간염을 근치할 수 있게 된 최근의 성공과 대조가 되고 있다. 이 기회에 용기를 얻은 제약회사들과 많은 학자들이 앞으로 B형간염도 근치할 수 있는 방도에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어서 HBV의 근치의 날이 제법 크게 전망된다.

(사진: 한혜원 교수는 간질환 전문의로서 현재 토마스 제퍼슨 의과대학 내과교수로 근무하며, 동대학병원의 ‘간질환예방센터’의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꺼지지 않는 ‘버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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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진화 코빗 창업자, 블록체인 전문가 

역사적으로 있었던 버블 몇 건을 살펴보자. 수천 년간 사용되던 원자재 금이 금융상품으로 거래된 건 4,50년 전부터다. 금의 10년간 가격변동 추이는 비트코인의 7년간 그려 온 그래프와 별반 다르지 않다. 2천년대 초엔 닷컴버블이 있었다. 절정기엔 나스닥 시가총액이 6.8조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명목 GDP가 10.5조달러였으니, 65.5%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 버블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과 아마존을 만들었다. 북미 지역뿐 아니라 중국도 가세하며 현재는 그때보다 더 큰 버블을 형성하고 있다.

사실 버블은 쉽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모든 기술혁명은 도입과 적용을 지나 전환점이 요구된다. 이때 정말 혁신인지 구분하며 상용화 가능한 혁명의 버블이 만들어진다. 국내엔 2천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 망이 보급되며 팬티엄 PC가 불티나게 팔렸다. 심지어 우체국에서도 판매할 정도였다. 당시 집집마다 최신형 PC가 왜 필요하냐는 비판도 많았지만,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드는 요인이 됐다. 위 사례는 인프라를 보급하기 위해선 과잉투자와 기술이 수반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블록체인의 역사

2008년은 금융위기가 발발하던 시기였다.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퇴출되며 금융위기가 본격화됐다. 그러던 중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인물이 9장짜리 논문을 선보인다. 거기엔 중앙 집중화된 네트워크 없이도 장부가 10분에 한번씩 동기화되며 위.변조 위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탈중앙화 네트워크 방식이 적혀있었다. 그게 비트코인이었다. 이후 10년 넘도록 비트코인은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 정보가 집중돼있는 환경에서 중앙관리자 없이도 존속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글 애드센스와 이베이 등 플랫폼은 신뢰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금융과 같다. 금융 거래를 위해 증권과 은행사가 필요하듯, 신뢰 제공자를 매개해서만 연결된다. 블록체인은 이 개념을 개인과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왔다. 2018년 현재 암호화폐 분산장부는 10분, 혹은 17초에 한번씩 동기화되고 있으며 오픈소스이기에 다양한 체인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암호화폐 없는 블록체인, 부동산, 콘텐츠 영역에서 실험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돈을 있도록 하는 이유

웹 이코노미에선 응용 서비스 외 프로토콜이 필요한 게 많다. 이메일을 쓰려고 해도 프로토콜이 필요하듯, 대부분 프로토콜 위에 본질인 앱을 만든다. 기존 주식시장의 자본시스템에선 그렇게 만들어진 수 많은 가치가 앱 기업이 발행한 주식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업은 앱을 만들어 비용을 만든다. 흥미롭게도 블록체인에선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같은 프로토콜이 발행한 토큰으로 돈이 모이고 있는 거다. 왜냐면 이를 발행한 곳이 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앱보단 프로토콜의 비중이 큰 게 블록체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웹 이코노미를 전복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토큰의 가치는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팀 버너슬리는 대표적 프로토콜인 ‘www’를 발명했지만, 부여된 가치에 비해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이를 활용해 큰 돈을 번 건 다른 이였다. 그 중 마크 저커버그는 프로토콜 위에 페이스북이라는 앱을 만들어 세계적인 부호가 됐다.

이처럼 웹 이코노미 아래서 프로토콜은 많은 돈을 벌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대부분 군사적 용도 등 특수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블록체인에선 이 한계점을 보완해준다. 기술 자체에 자본이 모이는 것이다. 이에 많은 이들이 다양한 프로토콜을 만들기 위해 ICO를 진행하는 거다.

 

ICO, 자본시장 미래에 영향을 미칠

동시에 ICO는 자본시장의 민주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 경영가의 도움이나 VC의 투자 없이도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 유치를 스스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4조원 가량의 ICO가 성사됐다. 근래 텔레그램이 2조원을 모았고, 네이버와 카카오 등 내로라하는 기업도 앞다퉈 열을 올리고 있다. 기업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VC 투자사도 참여하는 양상을 띠며 토큰과 투자 영역이 융합되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기존의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것, 즉 ‘돈이 안돼서’ 개발되지 못했던 사례나 기존 주식시장에 의존했던 한계를 토큰화로 해결해보는 시도가 여러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따른 빈부격차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단순 시세차익을 노리고 해외에서 코인을 사와서 되팔거나, 기술이 아닌 투기의 영역으로 비춰지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사실 기술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근저엔 ‘토큰화’라는 트렌드가 작금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 위해 발전 중이다.

 

암호화폐의 미래

근래 비트코인의 가격이 하락하며 잠잠하던 시절 금액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과거에는 비트코인 하나만 있었지만 지금 생태계는 풍성하다. ICO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일본에서도 암호화폐의 금융권 연대가 이뤄지는 추세다. 관련 분야와의 접점 구축이 중요해지고 있는 셈이다.

앞으론 각 국가간 토큰 경쟁보단 스마트계약 (블록체인을 통해 일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거래가 자동으로 실행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하나의 테마로 자리잡을 거다. 암호화폐, 나아가 블록체인 기술이 가진 잠재력과 인터넷이 결합되어 혁신을 이루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거다.

 

블록체인 기술의 실생활 사례는 무엇이 있나.

프라이빗토큰은 개념 증명 작업이 한창이다. 뉴욕의 부동산자금조달 회사인 R3 Funding, 나스닥의 링크 프로젝트, 삼성SDS 등 몇몇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실험 중이다. 아쉽게도 아직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이더리움과 스팀 등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각종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향후 등장할 프로젝트의 자본 시장이 조성되는 중이다. 하지만 프라이빗토큰은 게임 체인저 역할은 못 할 거라 본다. 기존 것을 효율화하고 개선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역할은 퍼블릭 블록체인이 할 것이라 예상한다.

 

블록체인은 새로운 보안기술인가.

관점의 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 생각에 반대한다. 그 의미에 갇혀 게임 체인저 역할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보안기술 보다는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접근으로 봐야 성장 가능성이 높아진다.

 

블록체인 관련 사업 가장 고려해야 점은.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을 많이 갖는 게 중요하다. 수익모델을 생각하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사회에서 수익모델은 다양화될 수 있다. 블록체인 관련 컨설팅 조직이 늘어날 수도 있다. 당장의 설계보다 업계 지식을 쌓아둬야 운영에 유리할 거라 본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부분 탈중앙화 정도에 그쳐있다. 데이터 수집 주체처리부터 의문이다. 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P2P 음악파일 공유 플랫폼의 역사를 보자. 처음 출시됐을 당시의 넵스터는 100% P2P가 아니었다. 국내의 소리바다도 마찬가지였다. ‘비트토렌트’가 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얻은 시사점이 있다. 현재 나오고 있는 것들도 한계를 극복해 진정한 탈중앙화를 향해 갈 거라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오픈소스다. 암호화폐는 이 자체를 위한 자본을 보유하는 프로토콜이기에 이를 활용한 혁신적인 실험과 이론이 다양하게 나올 거라 예상된다. 100% 탈중앙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 될 것이다.

한국 사람의 얼 _ 최용완 (공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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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은 어떻게 가난한 나라에서 빠르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왜 북한은 이제 막 미국과 핵무기 담판을 하게 되었는가?
  2. 일본은 어떻게 진주만을 공격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는가?
  3. 몽골의 칭기즈칸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하여 중세 유럽을 깨워 인류의 현대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는가?
  4. 만주 훈족은 어떻게 비단길을 열어 지중해를 찾아가서 로마를 허물고 다시 세울 수 있었는가?
  5. 한국 사람의 음양오행 도교는 불교로, 기독교로, 회교도로 이어져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천주교, 개신교의 모습으로 다시 한국에 찾아오게 되었는가?

 

인류문화와 문명이 한반도에서 농사짓기 시작하고 고인돌 신전을 짓기 시작하며 자라난 한국 사람의 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한반도에 이르렀을 때 동아세아 지형에 엄마의 젓꼭지를 물고 자라났다.

 

한반도의 3만 여개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건축물이다. 유전학 학자들을 12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가 한반도에 5만년 전에 이르렀다고 1980년에 보고하였다. 처음으로 겨울철을 맞아 추위동안 살아남기 위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듯하다. 농사지어서 식구가 늘어나며 숯불에 질그릇을 만들고 조상의 무덤위에 고인돌을 짓기 시작하였다. 고인돌 마을은 한반도 복방의 석탄불에서 쇠붙이를 녹여내어 금속도구와 금속무기를 만들어 인류문화와 문명이 한반도에서 시작한 듯하다.

한반도의 고인돌문화는 지난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반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고인돌 유적의 중심지역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형식의 다양성으로 보아 고인돌의 발생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주위에는 약 4만 여개의 고인돌이 모여 있고 온 세상에 8만 여 곳의 고인돌 유적 이 분포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아프리카로 연결하는 이미 열린 해안선 길 따라 분포되었다. 유럽이 빙하기에서 풀려나는 2만 년 전 이전부터 농사짓는 고인돌 마을은 스페인과 프랑스 해변에 이주해 들어가 동굴생활하며 소와 말의 그림을 남겨 놓았다. 소는 농사짓는 한반도의 마을에서, 말은 만주 지역 유목 마을에서 길렀다. 4만 여 고인돌 유적이 한반도에서 유럽까지 해안선 따라 분포 되었으며 가장 최근의 고인돌 유적은 영국 런던 외곽에 1만년 전경에 세워진 스톤헨지이다. 한반도 문화에서 원형 평면은 신의영역이며 사람의 영역은 사방형으로 짓는 풍습이 있었다. 고인돌 마을이 이주해 들어가며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

고인돌 마을에서 겨울 동안 살아남기 위해 농사짓는 습관은 어려운 화경을 극복하여 정착할 수 있는 능력이었기에 한반도에서 온 세상으로 이주해나간 인류성장의 발자국을 보여준다. 농업의 발달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이었다. 숯불에서 질그릇을 만들고 소, 닭, 돼지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만주지역으로 이주해 들어가며 유목생활하기 시작하여 개, 말, 양을 기르기 시작하여 농업과 목축업 함께 발달하며 식구가 늘어났다. 농사짓는 마을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낸 짚으로 초가집을 짓고 짚으로 물위에 짚배를 만들어 여행하였다. 집배는 지금도 제주도 박물관을 비롯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인구 증가는 만주, 몽골, 티베트, 내륙으로 이주해 들어가고 바닷길 따라남과 북 대륙으로 이주해갔다. 바다 건너 일본에 건너가고 남쪽으로는 월남, 동인도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북쪽 시베리아와 북미의 여름철 바닷길을 지나 북미 대륙, 중미와 남미의 페루지역으로 이주해 들어갔다. 아직 빙하기에 얼음이 녹지 않은 여러 대륙의 바닷가에 스며들며 한반도에 한국 사람의 얼은 새로운 길을 열고 새 땅을 개척하여 한반도의 문화와 문명을 온 세상에 전해갔다. 한국 사람의 언어와 풍습이 같은 서남아세아의 사마리안(Sumer)은 토기문화와 함께 서남아세아에 전해지고 5천 년 전에 우르(Ur)문화를 시작하였다.

농사짓는 마을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못을 판 흙을 모아 재단을 짓고 하늘에 풍년을 기원했다. 세월이 지나며 흙무덤은 돌무덤이 되고 흙산을 짓는 풍습은 돌산(natural stone pyramid)을 짓는 풍습으로 변하였다. 한반도 북방과 만주 지역에 풍부한 석탄불에서 금속 도구를 만들고 금속연장이 발달하면서 옥돌을 다듬고 석굴을 파기 시작하였다. 나무 쟁기는 쇠 쟁기 되어 농업이 더욱 발달하고 초가집은 개와 집이 되고 짚배는 나무배가 되었다. 인류문명에 혁신적인 금속시대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시작했다.

금속 연장으로 다듬은 바위를 쌓아올려 층단식 적석총(pyramid)을 짓기 시작하였다. 흙산이 바위산 되고 바위산이 층단식 적석총(pyramid)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만주 지린성 주위와 서안시 외곽에 수 천 개의 적석총(pyramid) 유적에서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멀리서 바위를 끌어와 고인돌을 짓다가 다듬은 바위로 피라미드를 짓는 한국 사람의 얼은 선사시대의 사회구조, 정치체계, 종교형식 등의 인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상고사 유적들을 각 대륙에서 볼수 있다. 이미 열린 바닷길 따라 나일강에 이르러 아프리카 노동력을 만나 적석총(pyramid)을 세우며 이집트 문화를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 농사짓는 외바퀴 나무수레는 쌍바퀴 수레가 되고 사람, 소, 말이 끄는 운송수단으로 발전하였다. 나무바퀴는 쇠바퀴로 바뀌었다. 인력거가 사람을 나르고 소가 끄는 달구지는 유목마을에 말이 끄는 거마(車馬 chariot)로 발달하였다. 금속 연장은 금속 무기가 되고 거마는 전차가 되며 막강한 제국의 성장이 만주지역에서 나타났다. 이집트에 전해진 전차는 투탄카먼의 무덤 속에 벽화에서 흑인과 아랍인을 정복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8천 년 전 요하 문명에서 홍산 문화가 나타나고 만주지역에 고조선(동이 훈족)제국은 중원의 하나라와 상나라로 이어졌다. 동이족 진시황제 병마용갱은 세계의 첫 제국의 국력을 보여준다. 1만 년 전에 동아세아로 이주해온 중화민족은 양자강과 황하 지역에 정착하며 한국 사람과 융합하면서 정치적 대립이 시작하였다. 중원을 차지하는 거마 전쟁이 시작하고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중화민족의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복하였을 때 한국 민족의 대이동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금속 문화와 피라미드 문화는 세계 각 대륙으로 분포되었다. 한국 사람의 얼을 가진 동이 훈족은 비단길을 열어 유럽에 들어가 로마를 허물고 다시 세웠다. 한국 사람의 그림은 상형문자, 갑골문자, 한글로 이어저서 목판 인쇄와 금속문자가 한국 조선시대에 이뤄졌다.

인류 문명과 문화는 처음부터 한반도에 한국 사람의 얼로 시작하여 세계의 문화와 문명을 이끌어 왔다. 우리의 핏줄 몽골제국이 유럽을 깨운 후부터 현대 인류의 나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인류의 다음 세대인 미래 인류도 앞으로 동아세아의 한국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1) _ 온기철 (의대 65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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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1편)

(2018년 서울의대 미주 동창회 하계 콘벤숀 강의 초록)

 

이 세사람은 19 세기 중반에서 19세기 말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민비가 어떻게 시해를 당하게 되는가에 맞추겠습니다. 민비는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대원군과 개화당을 정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일본과 결탁하여 민비를 제거하게됩니다. 서재필은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써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고 미국시민이 되어 생애를 마치신 분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어느때보다 어려운 그 시기에 어떻게 인생을 꾸려갔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 세기 중엽은 어떤 세상이었던가?

1840-1860 년 사이에 벌어진 1,2 차 아편전쟁은 세계의 질서가 중화 – 오랑캐 구도에서 문명-야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교를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이룩한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의 최강국이었고 세상의 중심은 중국(중화)이고 다른 나라는 모조리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구조의 하나로 종주국-종속국 관계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유롭과 미국은 계몽사상과 산업혁명를 거처서 근대국가로 변신 합니다. 중국의 낡은 제도는 부패해 갔고 산업화된 신흥구미국가들은 문명국-야만국 구도를 앞세워 침략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문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습니다. 쓸어저가는 공룡 중국은 구미 국가의 이권 찬탈로 외환을 앓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안으로는 수많은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난리가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홍수환은 자신이 하느님의 둘 째 아들임을 자칭하고 예수교의 평등교리를 앞세워 남녀평등, 토지균등 분배등을 주장하고 약 14년 동안 중국의 거의 반을 지배했던 사건입니다.

이 난을 제압한 인물이 이홍장입니다. 이 공으로 이홍장은 청나라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력 자가 됩니다. 그리고 망해가는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를 양무운동이라고 합니다.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민비-온건 개화파가 이 양무운동을 답습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합니다.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정권은 천황을 정권의 전면에 내세워  입헌군주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서양과 똑 같은 나라를 만드는 개혁을 했습니다. 양무운동이 절름발이 개혁이었다면 명치유신은 완전무결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주도한 사람 중에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는 명치유신같은 개혁을조선에서도 이룩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국의 이홍장,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등장할 무렵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합니다.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망국으로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실학을 바탕으로한 개혁이 정조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여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씨 왕조라기 보다는 김씨 왕조였습니다. 대원군은 이 씨왕권을 되찾으려는 기회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다가 철종이 죽을 무렵 안동 김씨와 대립관계에 있던 조대비(선정 왕후)와

접촉하여 12 살 난 자기 둘 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에 나섭니다. 1864년1월이었습니다.

 

정권을 거머쥔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당한 세금제도를 바로잡고 매관매직을 금지했으며, 붕당의 진원지이고 백성을 괴롭혔던 서원을 철폐하여 백성들의 삶이 많이 증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단순히 영,정조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대가 요구 하는 개혁은 옛것을 복구하는 수구보수적인 것이 아니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산업 사회를 만드는 좀 더 진취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이웃 나라인 일본의 명치유신은 물론 대국 청나라의 양무운동 보다도 훨씬 미흡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쇄국 정책,  제너럴 샤만호 사건과  박규수

청나라, 조선, 일본은 모두 오랜 동안 쇄국이 기본 외교정책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서양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무너져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천주교를 받아 드리면 신분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수구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우선 내치를 안정 시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한 다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하며 서양국가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66년 8월, 대동강 물은 장마로 크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미국 상선 General Scherman 호는 그 물을 타고 평양성 깊숙히 들어 왔습니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으로 무장을하고 있어서 해적선으로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선원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는 등 폭력을 가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강물이 줄어 들어 배가 움직을 수 없게 되자 평안 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배를 공격하여 배에 불이 붙자 선원 전원이 물에  뛰어 들어 사망했고 박규수는 배의 엔진를 노휙했습니다. 박규수는 이조 침판을 지내는 등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인물 이었습니다. 당시에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려면 지방 근무로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여 지방 수령직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침 중요한 사건이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큰 인물이 평양 감사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의 손자였습니다. 박규수 또한 베이징을 여러 차례 다녀 오면서 아편전쟁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조선도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개화파

육성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이 개화파는 민비의 강력한 정적이 됩니다.

민비의 등장과 고종 친정 시작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지 2년 만에 민자영은 고종의 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왔습니다. 장희빈의 음모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숙종비 인현 왕후 집안인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이었습니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방지하기 위해서 형제 자매, 부모등 친척이 없는 것을 장점으로 여기고 대원군의 부인과 같은 집안인 여흥 민씨를 택한 것입니다. 당시 고종은15세, 민비은 16세 였으나, 민비의 권력욕과 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머리 굴리기는 대원군 못지 않았습니다. 

1866년 민자영이 왕비가 되던 해는 대원군이 무려 8000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 9명을 죽이는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이로 인한 병인양요, 제너랄 셔만호사건 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흥 민씨인 대원군의 부인에게는 민승호라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민비는 민승호를 자기 아버지 민치록의 아들로입적 시키고 자신의 오라비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권력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반 대원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조 대비와 연대하여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은 풍양 조씨에게 충분한 대접을 해주지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성하를 포섭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형 흥인군 이최응도 민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이 개혁을 위해서 남인과 북인을 선호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노론 계인 안동 김씨 김병기를 포섭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반 대원군 세력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붕당의 아지트였고 백성을 착취하는 전위부대였던 서원을 철폐한 대원군은 유학자들의 원수였습니다.

대원군 섭정 10년, 고종의 나이 22세가 되자, 그중 지도자 격인 최익현을 포섭 하여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상소는 반 대원군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을 근거로1873년,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민비가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영흥민씨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반격

민비의 처가 여흥 민씨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보다 더 심한 매관 매직, 뇌물 수수 등 온갓 비리로 권력 유지와 축재를 했습니다.이로 인한 민생고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합니다. 민비와 고종 사이에서 난 왕자와 공주들은 낳자마자 죽거나 병약했습니다. 민비는 이를 해결해 보고자 무당을 불러서 궁중에서 굿을 하거나, 전국 유명한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습니다.민비는 무당과 사찰에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민비는 극과 풍악을 좋아하여 거의 저녁마다 잔치를 벌렸다고합니다. 밤잠을 설친 고종은 낮에 정사를 보면서 꾸벅 꾸벅 졸 았

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국고를 썼습니다. 대원군이 궁중 재정을 흑자로 돌려 놓은 것을 고종과 민비는 적자로 만들었고 이를 매꾸고자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민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고 대원군의 인기는

상승했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끈질기게 민비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시도합니다. 민비숙소에서 폭탄이 폭팔했지만 민비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선물 보따리에 폭탄을 넣어 민승호의 집에도 보내어서 이것이 폭팔하여 민승호를비롯한 일가가 사망했습니다. 대원군의 형 흥인군 집에 불이 나는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에 대원군 집에 머물렀던 식객이

주도 한 것으로 후에 밝혀졌습니다.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통상 조약인 병자 수호 조약을 1876년에 일본과 체결했습니다. 이는 지독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권리만 명시하고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는 전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민비의 또 하나의 정적 개화당의 탄생

제너럴 샤만호 사건 때 평양 감사로써 대포와 총으로 무장 한 미국 상선을 제압했던 박규수는 개화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의 생각은 이홍장의 양무운동과 같이 전통적인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반 세도가들의 자식들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하여 북경에서가지고 온 새로운 서양 문물과 책를 소개하는 등 서양 지식을 그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김옥균, 유길준, 박용효, 박영교, 홍영식, 김윤식, 서광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고 그중 김옥균이 이들의 보스였습니다. 그는 노론계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 였습니다. 시문, 글씨, 그림에 뛰어나고, 매우 사교적이어서 위로는 정승 판서와 친했고 아래로는 시장 잡배와 어울렸다고 합니다. 가무, 음주, 주색 잡기, 바둑, 투전, 골패에도 탁월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박규수는 그에게 중화 사상이 허구 임을 가르쳤고, 개화파들이 청과의 관계 단절을 외치고 다니게되는 믿 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다. 박규수는 고종에게 박영효를 부마로 삼을 것을 추천 했습니다.  서광범은 이조 참판 서상익의 아들이었습니다.

서재필; 개화파의 일원이 되다.

1864년 1월7일에 서재필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고  보성은 그의 외가였습니다.  서재필 부모는 곧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사 하여 7살이  되던 해에 한양에 있는 6촌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한양에서 살게 되었는데,  서광하의 부인은 안동 김씨 김온순의 딸이며 구한말 대신 김성근의 누나였습니다. 서재필이 낳던 해와 달은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 한 해와 달과 우연히 일치합니다.

유년기의 서재필은 동료들 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싸움을 잘 했으며 명석했고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했는데,  김옥균, 서광범등이 이 집에 드나들었고 서재필은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옥균은 서재필을 총애했습니다.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재필은 곧 이들과 함께 박규수의 집에 드나 들면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서재필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옥균이 개화당의 모체인 충의계를 만들자 서재필도 이에 합류했습니다.

개화파와 붕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

박규수 외에 개화파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봉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입니다. 그는 일찍이 일본 사찰에 묶으면서 게이오 의숙에서 개화 사상을 배웠고 유기치와 개화파인사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활을 했습니다.

이동익은 부산 출신이어서 그 곳 왜관에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인과 접촉하여 새로운 문물과 서적들을 봉원사로 가져왔습니다.김옥균등 개화파 인사들은 봉원사에 드나들면서 이동익이 가져온 것들을 교재로 공부했고  12살 위인 김옥균은 서재필을 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했습니다.

개화파의 승계; 오경석-유흥기(대치)

1877년에 박규수가 죽자, 역관 중인 출신 오경석이 개화파를 승계했습니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이었습니다. 그는 박제가의 실학을 발전, 확대 시켰습니다. 개화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중인 출신인 그는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오경석은 한의사였던 대치 유흥기와 같이 활동했는데, 1879년에 오경석이 사망하자 유흥기가 승계하여 개화파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백의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졌었고 교육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 위정 척사파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갈라집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김성근 등 으로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시도하고 있는 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친청세력이었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두 다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일본이 앞서 시행했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조선의 뒷 처진 현실을 중국에 예속된 조선의 관계에 그원인이 있다고 보고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친일 세력이었습니다.

위정척사파 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유교는 옳은 것이고 천주교등 외래 사상은 틀리 다는 주장입니다.  서양문물은 물욕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순수한 인륜문명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으며,  과학보다 도가 더 중요하며 무보다 문이 중요하다고 고집했습니다. 최익현등이 주도했던 이들을 다수의 국민이 지지했습니다. 외세를 배제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조선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패망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고종; 청나라에 영선사 파견, 개화파; 후꾸자와 유키치와 접촉

1880년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던 중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황준헌을 만났습니다. 그는 김홍집에게 조선 책략 이라는 책을 줍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이 외세로 부터 살아 남을 려면 어떻게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가를 충고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청의 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 습니다.  친중, 결일, 연미가 정책의 골자였습니다. 김홍집은 이 책을 고종에게 가져다 주었고 고종은 이 세 나라와 잘 해 볼려고 노력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책이 전국으로 퍼지자위정척사파는 극열하게 반대 했고 백성들 또한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습니다. 1881년, 고종은 지금의 외무부와 비슷한 통리기무 아문을 설치 하고 청에 영선사, 일본에 신사 유람단을 파견합니다. 김윤집, 어윤중은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는데 임오군란 때 민비를 멸망 일보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구하는 데 큰 역활을 하게 됩니다. 고종은 극 비리에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위정 척사파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일본과 거래 하는 것을 반대 했기 때문입니다. 이동익이 주선했고 이동익도 수행하려고 했으나, 그는 떠나기 전에 행방 불명이 되고 그 이후로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 습니다. 이 때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됩니다. 그는 원래 계획 대로 일본에 남아서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웠습니다. 급진 개화파와 후꾸자와 유기치 와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꾸자와는 일본 제일의 현자이고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있는 인물입니다. 일본돈 만원권에 프린트된 그의 초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이오 의숙을 창설 하여 일본 근대화에 이바지한 많은 인재를 만들어냈습니다. 시사신보를 만들어 계몽활동을 했습니다.“탈 아시아”라는 기치를 앞세워 일본의 유롭화를 외쳤습니다. 김옥균은 1883년에 60명을 게이오 의숙에 유학하게 했습니다. 후꾸자와 유기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 이었습니다.

대원군의 반격; 이재선 반역 사건

 

조선책략을 읽어본 유생들은 이를 극열하게 반대했습니다. 여론 또한 위정척사파들의 편이었습니다. 인기가 좋았던 대원군은 첩의 아들인

이재선을 앞에 세워, 경기도 지방에 과거시험을 치려고 올라온 유생들을 이용 하여 대신들과 민씨일족을 제거하려는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임오군란 일 년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테타

권불 10년이라고했던가? 대원군의 섭정이 10년 째 되던 1873년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 된지 9년이 지난 1882년, 임오 군란이 일어 납니다. 이 사건은 구식군대의 “군란”이라기보다는 대원군이 민비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쿠테타였습니다.  구식 군대가 시작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합세했고 이 폭도들을 이끈 인물은 대원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목적인 정권을 일시 적이나마 장악 하게됩니다. 당시에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원성은극에 달했습니다. 1882년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일본과 통상을 연 후 부터 쌀이 일본으로 많이 송출되어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쌀값이 폭등했습니다.

민씨 외척들의 매관매직과 돈들여 벼슬자리 얻으면 본전에 이익까

챙기려고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고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갔습니다. 민비의 잦은 무당굿과 밤이 늦게 벌리는 잔치는 궁중의 예산을 탕진했으니 무슨 돈으로 백성을 돌보았겠습니까? 대원군은 섭정 때 구식군대를 잘 정비했고 그들은 병인양요, 신미 양요등 그런대로 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구식군대  5군영을 2군영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일본의 힘을 빌려서 창설했습니다. 말을 하자면 전자는 대원군의 군대고 후자는 민비의 군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세청장 쯤 돼 보이는 민겸호는 구식군대에 지급 될 쌀을 몽땅 착복해 버립니다. 무례 1년 동안 구식 군대는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13개월 만에 쌀로 월급이 지급되었습니다. 무게를 늘일 려고 물과 모래를 부어서 쌀이 썩어있었습니다. 화가 난 군인들은 폭도로 변하여 민겸호 집에 방화하고 무위영대장 이겸호 집을 습격하는 등 우왕 좌왕 하다가 대원군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 그들을 이용한 쿠테타를 주도하게 됩니다. 일반 백성 까지 합류하여 대원군은 막강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대원군 형 이최응을 살해하면서

창덕궁을 함락시킵니다. 궁궐로 피신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은 민비를 살해하려려고 혈안이 되어 찾았으나 민비는 무사히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구식군대 병졸들은 대원군 집권을 요구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 들여 전권이 다시 대원군에게 넘어갑니다. 궁을 빠져 나간 민비는

충주 장호원 목사 민응식 집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민비를 놓친 대원군은 행방불명으로 간주하고 시체가 없는 민비장레식을 치루었습니다. 백성들은 대원군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물가고 해결을 위해서 시전 상인 1000명을 처형 했습니다. 1866년 천주교 신도 8000 처형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냉혈한

대원군의 무자비한 행위였습니다.

; 반란군 진압-대원군 납치, 민비 복권

충주에 숨어 있던 민비는 친척을 통해서 청에 영선사로 가 있는 김윤식, 어윤중과 접촉하여 청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과 접촉 할 수 있었고, 청과 김윤식은 대원군을 납치 하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이홍장은 많은 영토와 자기들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이 서양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을 확실하게 자기들 영향권에 넣으려고 조선에 회군대장 오장경이 지휘하는 3000명의 병력을 한양에 보냈습니다. 이 때 김윤식도 같이 귀국했습니다. 오장경은 고종을 예방한 후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방문하면서

대원군을 자기 막사로 초대합니다.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군 막사로 대원군이 들어 서자 마자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텐진으로 유폐되어 4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3일 동안의 권력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이제는 절름 발이 정권이

되었습니다. 청나라 장수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는 권력이었습니다. 조청상민수륙장정 이라는 일종의 행정 명령을 내려 청나라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조선에서 상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상인들에 대한 피해와 청군의 보호를 받은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행패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서재필의 정계 진출과 개화파와 후꾸자와의 밀착

1883년5월, 서재필은 14명의 유학생 대표로 일본에 가서 6개월 간 게이오 의숙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언어 습득력이 남달리 뛰어 난 서재필은 불과 6 개월 만에 통역 없이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1884년 1월에 그는 일본군 하사관 학교에서 6개월 간 군사 교육을 받고 귀국 하여 사관 학교 교장 격인 장교 양성 학교 사관장으로 봉직했습니다. 1882년8월에 급진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뒷 처리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 등은 후꾸자와 유기치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키치에게 감화되어 우리도 일본같이 개혁을 해야 된다고 굳게 믿게 됩니다.

갑신정변; 청과 일본의 대결-청의 승리

임오군란 후 청군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 내고 복권하게 된 고종과 민비는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에 크게 의존 하게되었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청군이 조선에 주둔 함으로써 많이 약화되는 수 밖에 없었고 친일 세력인 개화파는 점점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횡포는 중국의 영향이 조선의 쇠약한 국력의 원인 이라고 생각 하는 개화파 인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민영익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한 사이였고 급진 개화파와 같이 일했으나, 미국, 구라파를 돌아본 후에 친민비 집권 당인 친청 온건 개화파 쪽으로 이탈했습니다. 한편 박영효는 한성 판윤에서 광주 유수로 급기야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크게 그 세력이 위축된 개화파는 일본공사와 접촉하여 쿠테타 계획을 세우고 그 시기를 염탐하던 중,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을 놓고 전쟁을 하기 시작하자, 조선 주둔 군의 반인 1500

명을 본국으로 소환했습니다. 1884년12월4일 우정국 낙성식 때 주요 인사가 한 자리 모인 현장에서 주위에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운 후 이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감금 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 요강을 발표했습니다.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려고 찿아온 대신11명을 고종 앞에서 살해했습니다. 다음 날 고종의 요구를 거절 하지 못하고 고종이 환궁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경우궁은 협소 해서 방어 하기가 용이한 편이었으나

넓은 창덕궁은 진압군을 방어하기 힘들어서 환궁 허용은 큰 실수 였다고 합니다.

청군 대장 원 세개는 고종과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쿠테타 세력을 진압할 것을 통고했습니다. 일본정부는 다케조에에게 청군과 충돌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다케조에는 개화파들과의 약속과는 달리 전혀 싸우지 않고 슬그머니 후퇴해 버립니다. 12월6일 3일만에 쿠테타 세력은 원세계에 의해서 완전히 제압되고

개화파는 반역죄를 지은 역적이 되었습니다. 황영식과 박영교는 청군한테  참살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은삼족이 멸는 함을 당하는 참혹 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다음에 계속>

 

서재필 미국 망명,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서재필 미국 이민 성공 이야기, 서재필의 귀국, 아관파천, 대한제국 선포,대원군의 사망, 서재필 미국으로 추방(?), 해방 후 서재필 귀국이 남아있습니다.

 

서재필 미국 망명,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서재필 미국 이민과 그 성공 이야기, 서재필 귀국, 아관 파천, 대한제국 선포, 대원군의 사망, 서재필 미국으로 추방(?), 해방 ``                                                                                                                                                                                                                                                                                                                                                                    11111111111111후 서재필 귀국이 남아있습니다.

 

서재필의 역활과 가족들의 피해

서재필은 사관생도와 쿠테타 병력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과 협조하여 요인 살해에 직접 참여 했습니다. 쿠테타 진압군으로 부터 궁을 수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삼족이 다 죽거나 중형을 면치 못하는 대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친 아버지 서광효는 투옥된 후 자결 하였고 어머니와3 형제는 사약을 받거나 살해 당했습니다. 부인은 친정을 찿아 갔으나 아버지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의 아내라고 집 밖에서 극약을 주어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 가는 길에 기생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으 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2 살 난 아들은 굶어죽었습니다. 딸은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으나 행방이 묘현합니다. 보성의 친 외가는 몰락했지만 생명은 부지했습니다.

갑신정변의 배후; 후꾸자와 유키치

사실상 후꾸자와 유기치가 이끄는 일본 진보파가 김옥균을 앞세워 일으킨 쿠테타였습니다. 후쿠자와는 3년 동안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 기획, 지휘 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일본 진보파 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개화파를 연결고리로 삼아 조선을 근대화 시켜 일본이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구도에서 구미국가의 제국주의식 식민지화 정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망명 한 달 동안은 일본측이 잘 보호해주고 친절 했으나, 쓸모 없는신세가 된 조선의 망명객들은 헌 신짝처럼 버려집니다.

서재필의 후회와 좌절, 일본의 천대, 조선의 자객; 미국 망명

이제 갓 20 살이 된 서재필은 압뒤를 가리지않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같은 자신의 경솔 한 행위를 깊이 후회 했습니다. 국민들은 아직도 위정 척사파들의 외세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일본을 끌어드려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구테타 계획 자체가 허술했음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불장난 같은 행위로 인한 가족, 친지들의 참혹한 불행은 서재필의 가슴을 메게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 죄가 없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중죄를 가한 조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기 시작

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푸대접 했고, 더구나 안전을 보장 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끝임 없이 일본정부에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고,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쎈프란 시코로

이렇게 일본이 위험해지자 이들은 미국 쎈프란 시스코로 피신 했습니다. 1884년12월13일에 인천을 떠난지 약6개월이 된 1885년5월26일 요꼬하마를 출발 하여 쎈프란시스코에 6월말에 도착했습니다. 공주의 남편 박영효는 미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돌아 오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소갯장을 들고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이제 혼자 남아서 이민생활을 개척해 나갑니다.

서재필의 쎈프란시코 생활과 윤치호의 도움

한국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종차별 또한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영어를 못했던 서재필이 직장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얻은 일은 광고전을 붙이기였습니다. 평균 5 마일 정도 커버 했는데, 서재필은 10 마일에 걸처서 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잡일을 하던 중 윤치호와 연락이되어 그는 서재필에게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온건 개화파의 득세와 텐진조약

갑신정변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청과 일본이 싸워서 청이 승리한 셈입니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을 밀어 낸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는 더욱 그 세력를 굳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테타군 진압 과정에서 공사관이 소실되었고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손해 배상 요구, 사과, 공사관 부지 제공 등을 약속 받은 한성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 진보파가 조선의 개화파를 앞세워 일으킨 정변을 청의 젊은 장군 원세개가 진압한 후 이홍장은 자기 영토인 텐진에 이토 히로 부미를 불러 텐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의 골자는 양국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앞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에게 통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85년4월이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대원군은 같은 도시 텐진에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동양 삼국의 거물이 한 도시에 있었으나 국력은 그들의 입지를 반영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청일 전쟁의 빌미로 이용 하게됩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1884년9월20일, Horrace Newton Allen 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던 날 우정국 낙성식 때 크게 부산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왕과 왕비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광혜원과 제중원을 창설하는 등 처음 5년간은 의료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 7년간 공사관 서기 그리고 8년 간 공사로 봉직 했고 동시에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미국에 이로운 조선의 사업과 자신의 치부를 위한 사업에 많이 관여했 습니다. 자연히 조선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서재필은 이것을 비난 했고 그 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Horrace Undrwood, Henry Appenzeller, W.B. Scranton, Mary

Scranton 등이 1885년에 입국 합니다.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중제에 나서서 북경조약을 체결 하게 한 댓가로 브라디 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를 청나라로 부터 넘겨 받았습니다.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년 이후로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접경 하게 됩니다.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는 이제 조선을 넘겨다보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러시아와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더욱이나 갑신정변 이후에는 조선은 청나라에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슬그 머니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나라를 견제해 볼려고 했습니다. 이 낌세를 알아 차린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 하고 청나라에게 알립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청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청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렸습니다. 물론 조선 조정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 했다는 사실을 한 달 동안이나 모르고 있다가

청이 알려 주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위안스카이; 조선최고의 권력자, 대원군의 귀국

 

1885년10월5일, 갑신정변을 제압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돌아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텐진에 구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대동했습니다.  청이 대원군을 구금에서 풀어주어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민비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청은 민비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자, 민비는 친 대원군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한달 사이에 무려 30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감국이 됩니다. 조선의 왕을 감독한다는 뜻입니다. 고종은 완전한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궁녀를 대려다 농락했고 고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에 신해혁명으로 선출된 대통령 손문으로 부터 대통령직을 양보 받아 망국 청 나라를 접수 한 인물이 바로 조선 감국 위안스카이입니다. 향후 1894년 청일 전쟁때 까지 청나라의 조선 통치는 약 10년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영국군 거문도 철수, 베베르 공사 와 손탁 입국

1887년2월27일 약 2년 동안 조선의 거문도에 머물었던 영국군은

러시아가 청국에게 조선을 점령할 계획이 없음을 선언 하자, 철수 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고 청은 조선의 장악력에 관계된 러시아의 방해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베베르 공사가 부임하면서 사교계의 여왕 손탁(Antoinette Sontag)이 들어와 손탁호텔을 운영하는 등 외교관,

정치인들과 사귀어 소위 친러파라는 소위 정동파를 만듭니다.

19세기 중, 후반의 한반도 정세와 사회

우편제도, 신문, 전신 제도, 전기 등 근대 국가의 문명의 이기가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제 학당,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표면적인 발전은 전혀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일을 해야했으나 국방을 하기에 앞서 외세에게 나라의 이권을 내주어서 자기 정권 유지하려했고, 국민을 착취하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양반관료들은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았고 돈을 써서  한 자리 얻은 관리들은 부당한 세금을 걷어 본전과 이익을 챙겼습니다.

고종과 민비의 궁중 예산 낭비로 인한 적자를 매꾸기 위해서 고종 자신도 관직을 팔았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여러나라와의 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서

외국으로 부터 싸고 좋은 물건들이 범람하여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진

물건들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조선 지배는 청나라에게 엄천 난 특권을 주는 경제 정책을 강요 받았고 조선 상인 보다 청나라 상인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인천의 차이나 타운과 짜장면 집, 호떡 집 등은 원세계와 같이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없게된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도적 떼에 가담하여 전국에 도둑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식량이 없어서 나무 껍질을 먹은 사람들이 대변을 누다가 항문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를 보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 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1894년 조선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을 청이 물리 치고 조선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 하게 한 사건 들이었습니다.  또다시 권불 10년의 그 10년 쯤 되던 해가 1894년 입니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해입니다.

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 _ 온기철 (의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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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편)

 

동학 농민 혁명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는 반상제도는 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백성 (상민)들을 착취하는데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인내천을 교시로 하는 동학사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었고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백성들 간에 빠른 속도로 퍼저 나갔습니다. 1890년 대에도 천주교는 국가에서 인정을 해주었으나 동학교는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반상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인정해주면 양반들이 자기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892, 1893년에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주고 동학교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가 삼례를 기점으로 하여 충청도 보은에서는 2만내지 8만명이 운집하는 대규모의 집회가 여러 날 계속되었고  금구와 밀양에서도 작은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봉준, 조병갑에게 반기를 들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중앙 관료 들이 알아 주는 백성 수탈의 명수였습니다. 백성들로 부터 걷어들인 세금과 뇌물을 중앙 관료들에게 잘 바쳐서 노른 자위 지방 관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부는 비옥 한 농토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포탈할 산물이 풍부 했습니다. 1894년2월26일 전봉준은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반기를 들고 그 동안의 평화적인 시위를 한단계 뛰어 넘는 농민들로 구성된 반군을 지휘하여 각 고을을 공격,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사발통문으로 방을 부처서 반군을 모집했습니다.그들은 전주성을 점령 하고 서울로 진격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정부군과 싸웠습니다. 

하필이면 왜 호남에서?

조선 전국의 논 30.8%가 호남에 있었고 쌀의 42.3% 가 호남에서 생산 됬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수탈 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할 정도로 관리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전라도 관리의 대부분이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전주성 점령과 청에 원군 요청

1894년5월10일, 그러니까 난이 발발 한지 3개월 만에 홍계훈이 정부군 800 명을 청나라 군함에 싣고 군산에 들어옵니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상궁으로 변장 한 민비를 등에 없고 궁을 빠져 나가 민비가 반군의 칼날을 피하게한 장본인이 홍계훈입니다. 조선은 아직도 원세계가 지배하는 청나라 세상임을 상기하면 조선군이 청나라 군함을 이용함은 당연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임진 왜란 때나 마찬 가지로 조선의 군인 들은 농민인지 군인인지 모르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요지음 세상으로 치면 예비군이 정규적인 훈련도 하지 않고있다가 전쟁이 나면 차출되어 적과 싸우게 되는 꼴 입니다. 800명은 막상 동학군과 싸울 때는 겨우470명 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악에 밪친 동학군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당도했을 때는 관료와 관군은 전부 도망가고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전주성이 동학군에게 점령당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청합니다.  이 때가 6월1일, 그 다음날 일본은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닷새 후인 6월6일 청군 1500 명이 아산으로 출발하고 다음 날에 텐진 조약에 약속 된 대로 일본에게 통고를 했습니다.

전주 화약과 동학군 자치 정부, 집강소 설치

홍계훈은 정부군을 재정비하여 동학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는동학군이 패배 했습니다. 성 안의 식량은 고갈 되어갔습니다. 때는 모내기 할 농번기 였습니다.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6월11일 그들은 새로 부임한 전주 감사 김학진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내 줍니다. 전주성을 나온 동학군은 모심으러 집에 돌아 가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 하여 각 고을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혁명군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는 호남 일원 행정 관청 안에 설치 되었고 고을의 수령은 자연이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세기 전 프랑스 혁명을 방불케 하듯 12개의 행정 요강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했습니다. 탐관오리의 죄를 조사하여 처벌함,  노비문서 소각, 천인 대우 개선, 청춘과부 재가 허용. 토지 균등 분배 등을 골자로 했습니다. 아이러니칼 한 것은 비슷한 개혁이  한달 여후 중앙 정부에서 개화파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청군이 조선에 파병 되자 일본 또한 군대를 보냈습니다. 뜻 밖에 반군이 전주에서 철수하자, 조선정부는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미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고 이 계획을 하나 하나 진행 해 나갔습니다. 7월23일, 한양에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경복궁을 점령 했습니다.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 고종과 민비 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얼굴마담으로 하여 친일 개화파를 집권 시킵니다(경복궁 쿠테타). 이제 조선 정계의 세력 구도는 민비-친청 온건 개화파 에서 대원군-친일 개화파로 바뀐 꼴이 되었습니다. 민비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개화파와 대원군의 결탁이 눈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12년전 임오군란 때 청과 민비의 연합으로 권좌에서 물러 났던 대원군은 다시 절름 발이지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7월27일에 군국 기무처가 설치되고 소위 갑오 개혁이 시작 되었습니다. 한양에서는 군국기무처가 갑오 개혁, 호남에서는 집강소에서 동학혁명이 진행 되고 있었습니다. 1894년7월25일, 일본 군함은 이홍장이 심혈을 기우려서 만든 북양함대를 충청도 아산 앞바다에서 대파했습니다. 역사가 들은 이를 풍도 해전이라고 하고 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로 시작 된 이홍장의 양무개혁과 일본의 명치 유신이 조선땅 에서 그 결과를 증명하는 일전을 벌린 대리전쟁이 청일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반도와 같은 지정 학적 위치에서 취약하기 그지 없는 국력은 주위 강한 나라에게 전쟁터를 제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일 전쟁 외에도 임진 왜란, 러일 전쟁 그리고 한국 전쟁도 일종의 대리 전쟁 이었습니다. 7월28일 에는 성환에서 일본 육군은 청군을 섬멸 했고 청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여 전병력을 집중시키고 일전을 기다렸습니다. 8월26일, 경복궁을 접령하고 고종을 제압 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청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선이 제공 할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가난 한나라에서 무려 20만 대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했습니다. 일본은 평양 전투에 필요한 토지, 건물, 전신을 징발했습니다. 그리고 동학란을 조일합동으로 제압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9월15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조선 안에 있었 청군 병력과 본국에서 들어온 병력이 총 집결해 있는 청군을 대파 했 습니다.  한편 절름발이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원래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완전한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민비를 폐비 시키기 위한 공작을 했고, 손자 이준용이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 하게 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집권 한지 한 달 후에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수에게 친일 개화파를 제거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평양 전투 중에 이 서한이 일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믿을 수 없는 대원군을 퇴진 시켰습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기로우, 개화파 귀국 허용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청을 제압하자, 민비-친청-온건 개화파가 무너지고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 해 있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1894년 8월, 10년만에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 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에 임명 되었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이 군국 기무처 결정 사항을 잘 이행 하지 않는등 일본과 개화파를 좋아 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박영효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 했 습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을 지어 주고 대저택을 하사 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효를 다리로 일본 측과 친해져서 대원군을 밀어 내고 자기가 실권을 잡으려고 했던것입니다. 곧 원수 지간이 될 이들은 당분간 밀월관계를 유지합니다.

전봉준 체포

1894년 12월, 7 일간 계속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동학군은 섬멸 되고 전봉준은 체포되었습니다. 동학혁명은무려 20 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었습니다.

시모노 세키조약과 삼국 간섭

1895년4월17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토 히로 부미는 이홍장을 자기의 영토 인 시모노세키로 불러서 시모노 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첫번 째 조항은 “조선은 완전 무결한 독립국임을  선언 한다.” 였습니다. 적어도 조선 500 년 동안 계속 되던 중국의 종주국 노릇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하든 청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뜻이었 습니다. 그리고 청은 요동 반도, 타이완, 펑우 열도를 일본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6일 후 만주 진출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꼬두겨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 할 것을 요구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 할 만 한 해군력이 부족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 주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나라 전체가 “와신상담”이라는 말로 위로하며 억울함을 달럤습니다. 그리고 훗 날 러시아를 제압 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삼국 간섭 이라고 합니다.

민비의 친러 정책과 정동 파의 집권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것을 본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를 밀어 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동 구락부 라는 모임 소속 친러, 친미 정객들을 대거 입각 시켜서 친일 개화파를 밀어냈습니다.

이 정객 들을 정동파라고 했는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같이 조선에 온 손탁이라는 여인이 만든 사교 단체 정동 구락부 인사들입니다. 정동은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 손탁은 정동에 호텔을 운영하며 외교관들과 조선 정객이 어울 릴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친 구미, 반일, 친 민비 성향의 인사들이었습니다.

박영효 민비 시해 음모 실패와 일본 재 망명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들이 장악 하고 있는 군국 기무처의 힘에 밀려 나 자기 권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1894년 여름 부터 급진 개화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비는 러시아 공관과 접촉하여 개화파 말살 계획을 도와 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 이 계획이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접촉하여 민비살해계획을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씨모노 세끼 조약 후 삼국 간섭으로 대세가 일본에서 러시아 쪽으로 넘어 가자 민비는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 당을 쓸어버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박영효 귀에 들어 갔고, 1895년 7월,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 습니다.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을 찿아가 병력을 요구한 다음 유 길준에게 자기 계획을 알렸습니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믿었습니다. 왜냐면 유길준도 대원군과 같이 일본측과 접촉 하여 민비 제거를 계획 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유길준이 자기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은 고종에게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밀고 했 습니다.  7월6일 고종은 즉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박영효 체포령을 내렸 습니다. 이윤용은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고, 그는 즉시 담장 넘어로 체포령을 알린 다음 움직였습니다. 7월7일 포졸이 박영효 집에 도달했을 때는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작은 증기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공덕리 대원군 별장 아소당에 가택연금 돼 있었고 일본 공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비 시해 계획을 논의 했던 것으로 추측 됩니다.

유길준 대원군 파에게 포섭되다.

유길준은 일찌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등과 같이 수학 했던 개화파 중에 한 사람이었고,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근대 문명을 이해 할 수 있는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안은 유길준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합니다.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통해서 유길준을 포섭했습니다.  결국 유길준은 대원군, 이준용이 주도하는 민비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나 명성황후 암살 전후 까지 개화파 인사들은 그와 대원군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박영효의 민비 암살 계획 폭로 후 민비와 고종의 개화파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민비 시해 사건(을미 사변)

1894년 10월4일, 유길준이 의주 관찰사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의 지방관직 발령으로 이제 개화파는 전부 내각에서 축출 된 셈이었 습니다. 바로 그날 일본측은 대원군과 접촉 하여 10월8일 새벽에 거사할 것에  합의했습니다. 죽기 전 날 밤에 민비는 척족 민영준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 된 것을 축하 하는 연회를 베풀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민비를 살해한 장본인인 일본 낭인들은 진고개 파성관에서 한성신보기자 들과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낭인들은 일본의 열혈 애국 청년 들이었습니다. 인류 대학 출신들로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조폭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5년10월8일 새벽 5;30에  일본 낭인과 조선 훈련대 병력은 경복궁으로 침입 하여 침전인 옥호루에 있는 민비를 시해했습니다.민비를 칼로 벤 장본인은 물론 일본 낭인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일본 병력을 지휘한 인물은 일본 공사 고로였고 조선 병력을 지휘 한 장 본인은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 이었습니다. 우범선은 임오군란 직전에 신식군대 별기군 교관 이었는데, 그는 중인 출신이었고 생도들은 양반 집 자제들이었습니다. 생도들은 교관에게 반발을 했고 교관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생도들을 모아 놓고 장황한 연설을 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친일 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훈련대 대대장을 맏게 되었으나, 고종과 민비는 훈련대를 해체하려고 했습니다. 불만에 찬 우범선을 고로가 포섭한 것입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 해 있던 우법선은 자객 고영근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는 우범선의 아들 입니다.

거사날 새벽 3시, 공덕리 별장을 습격한 일본낭인들은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옷으로 변장한 후, 반 강제로 대원군을 대리고, 훈련대 병사 들과 같이 경복궁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민비 시해 직후, 친일 내각 재 집권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힘입어 친러 정책으로 정권을 잡았 던 친러파는 민비가 대원군-개화파-일본에 의해서 제거 되자, 일본은 일단 대원군을 떠 받들고 개화당 인사 들을 대거 재 집권 시켰습니다.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이 물러 나고 만년 재상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박영효, 서광범등이 다시 내각에 들어 오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 됬습니다.

고종 공포에 떨다.

민비가 정적인 대원군과 개화당 그리고 일본 세력에 의해서 사살되자 고종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자기 주위에는 자신이 물리 치려고 했던 세력이 에워 싸고 있었습니다. 일본 공사는 고종을 위협 했고, 대원군이  자기를 죽이고 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언도우드 부인이 직접 가지고 온 음식만 먹었습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식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서 재필귀국

민비가 시해된지 두 달 여 만인 1895년12월25일 미국으로 망명 했던 서재필이 귀국했습니다. 갑신 정변이 실패 한지 무려 11년 이 지난 후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백인아내와 결혼한 미국시민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미국시민이었고 미국의사였다.

1895년,  쌘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는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했으며 주말에는 교회에 나갔 습니다. 교회 신자의 소개로 탄광업으로 돈을 번 독지가인 John Hellenbeck을 알게 되었습니다.  1886년9월에 헬렌벡은 서재필을 펜실바니아 주 윌키스 바레에 있는Harry Hillman Academy 고등 하교에 입학 시켜주었습니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도 헬렌벡이 지어주었습니다.  22살은 동료들 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언어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 학교를 졸업하여, 학생 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준비 과정인 콜롬비안 대학 예과 코크리안 스크울 야간 부에 입학했습니다. 예과를 마치자, 헬렌벡은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 선교 활동을 할 것을 권유 했습니다. 이것을 서면으로 약속 하면 학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부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대역죄를 지은 망명객이어서 돌아 가면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을 것이고, 7년 후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그는 법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미 입학 허가가 나온 라파얕 대학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여 학비를 조달 할려고 했으나, 학 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운 좋은 서재필

워싱톤에 있는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 일본과 중국에서 수집한 의학 서적 5000여권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있었는데, 적임자는 일본어,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 해야했습니다. 모교인 힐맨 아카데 교장 댁을 방문하고 있던 모 교수가 서재필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는 도서관장 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이 소개장을 들고 도서관을 찿아 가자, 성경 구절을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문과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  했고  이미 크리스찬인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무려 월급 120불이라는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것에 만족 하지 않고 콜롬비안 대학 의학부 야간반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의 조지 워싱톤 대학 전신으로 워싱톤 D.C. 에 있었 습니다. 1892년 3월, 조선인 최초로 미국의사가 되었 으니, 나이 28 세였습니다.

Muriel Marry Amstrong 과 결혼

그는 1890년6월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1894년 개업 의사로 일하던 때에 뮤리엘과 결혼했습니다. 미국 15대 대통령 뷰캐넌의 누이의 딸 이었습니다. 누이의 남편은 조지 암스트롱이었고 그는 미국 철도 우편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천만리 타국에 온 서재필은 이제 미국 시민, 의사 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결혼 식에는 미국에서 이렇다 할 저명 인사 200 여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가 15세 때 조선에서 맞이 한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 씨를 생각 했을까? 젊은 혈기에 저지른 역적 행위로 그 부인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2살 난 아들이 굶어 죽었음을 상기 했을까? 여러 분들의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의 복권과 귀국 과정

법무대신 서광범은 서재필을 복권시키고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1895년 가을에 워싱톤을 방문한 박영효를 만 나고 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1895년11월10일,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하와이, 일본을 경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 정부에서 주는 모든 관직을 거절 하고 충추원 고문직을 수락했습니다. 당시 조선 공사이면서 충추원 고문인 미국 인 알랜과 똑 같은 자격으로 고종을 보좌 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귀국한 서재필의 태도

조국은 그를 버렸습니다. 본인이 반역 죄인이라하여 아무 죄없는 가족과 친지를 죽이거나, 투옥 시켰습니다. 재산을 몰수당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망명한 그를 죽이려고 고종은 끈질기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딱지는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이 절실 한 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갑신정변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나 조선 사림들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연설은 반드시 영어로 했습니다. 물론 통역을 항상 대동했습니다.

전처와 생모의 산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서 평민이 되어 버린 양 아버지가 찾아 왔으나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거지가 된 장인이 찾아 왔으나 모른척 했습니다.

고종을 만나러 갈 때 양복을 입고 읍소 하지 않고 악수로 인사 했습니다. 왕을 알현 할 때는 안경을 착용 할 수 없는 데도 안경을 벗지 않고 고종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을 사용 하지 않고 필립 제이슨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습니다. 서재필이 쌘프란시코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돈을 보내 주었 던 윤치호는 일기를 매일 썼습니다. 1898년1월15일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는 서재필이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윤치호가 왜 영어만 쓰냐고 물으니 한국말을 다 잊었다고 대답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서재필의 태도는 동료 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정부 관료로 있는 윤치호와 유길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순 한글 신문인 독립 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서 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 한 원인을 민중이 우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민계몽에 총력을 기울렸습니다.

1896년4월7일, 순 한글과 영어로 된 독립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한글 띄어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글 3면, 영어 1면 이었습니다. 교육 확대, 산업 발전 강조, 의무교육, 과학 기술 도입, 식 생활과 위생 개선등을 주장했습니다. 중립외교를 주창했습니다. 유길준의 의견이 반영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 내외의 사정,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을 보도했으며, 뇌물 수수, 관리들의 부정을 비판했습니다.

신문이 순 한글로 발간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고 생각 합니다. 서재필이 얼마나 조선의 근본적인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황금 빛의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만들었다고 하는 한글은 자타가 공인 하는 세계에서 제일 과학 적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이 한글이 무려 500년 가까이 일반 백성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 교과서, 정부, 심지어 한글 박물관에서도  지적 해 주지 않고 “위대한 글자”라는 것 만 강조 합니다.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된 것은 대한제국 선포 된 후였습니다. 그 전에는 모든 문서, 책등은 거의 전부가 한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양반 집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자연히 백성들이 우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한 장 사서 서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아니 글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인 1945년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 인구의 겨우 27% 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오죽 했겠습니까?

독립문 건립

지금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 근처에 영은문이 있었고 이문을 통과 하면 모화관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영은문을 통과하면 모화관에서 조선 대신들이 그들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청이 조선 보다 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시설이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이 일본이나 서양 제국에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오랫동안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 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빨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 해야 나라가 발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 영은문 대신 독립문 설립을 추친했습니다.

독립협회 결성

독립문 건립을 추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1896년7월2일에 이완용,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등과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결성했습니다.  1897년11월20일, 개선문 축소판인 독립문이 영은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1200년 동안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 한다.”라고.

서재필이 주도 했던 독립신문, 독립문, 독립협회의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 인식 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재필의 청년 계몽

서재필은 매주 배재 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인권개념, 사회계약론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등이 서재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협성회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토론대회를 여는 등 청년들에게 토론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만민 공동회

독립문 건립을 의해서 관료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 협회를 시민 단체로 전환 하고 대중 토론회를 주관 했는데 이를 만민 공동회라고 했습니다. 토론회는 전국을 순환 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897년11월1일에 열렸던 제8회 만민 공동회는 노비 해방운동이 주제였습니다. 많은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 중에 대표가 찬,반 성토를 한 후 윤치호가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성토 하고, 서재필이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참상을 설명 한 후에 투표에 붙여서 다수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주장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입헌군주제를 주장 했습니다. 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하여 그 권한을 내각이 갖게하고 충추원을 의회로 바꾸자고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일본과 보수 세력 그리고 고종이 반대 하여 실현 되지 못했습니다.

아관 파천; 친러파의 쿠테타

권력은 친일파 개화당에게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화당, 대원군과 내통하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후에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씨워서 나쁜 국제 여론과 조선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들의 증언으로 여론은 일본측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러는 중에 대원군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음은 개화당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화당이 추진한 단발령은 친일 개화당에게는 치명 타였습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친러, 친미 정동 파들은 이러한 반일, 반 개화의 국민 감정과  고종의 공포에 떠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종을 외국 공관에 모시고 자기들의 정권 탈환을 계획 했습니다. 미국 공관으로 고종을 모시려고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춘생문 사건). 이범진과 심상훈은 러시아 공관과 긴밀하게 연락 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 모시는 데 성공했습니다. 1896년2월11일에 일어난 사건이고 아관 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을미사적 전원을 살해 할 것을 명령 합니다. 을미사적이라 함은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 된 대신들을 지칭 하는 것이었고 친러 파의 정적 개화파들이었습니다.

총리 대신 김홍집, 탁지부 대신 어윤중, 통상부 대신 정병하는 피살 되고 내무대신 유길준, 법무 대신 장박, 군부 대신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어려운 때마다 정파에 크게 관계 없이 내각 수반을 맏았던 김홍집은 길 거리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은 후,  군중이 그의 시체를 한 동안 끌고 다니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1890년대 중반의 조선 사회상

매관 매직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할 정도로 성했습니다. 갑오 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심해졌 습니다. 궁핍한 왕실예산을 충당 하기 위해서 왕도 벼슬을 팔아 먹었습니다.돈을 들여 관직을 받으면 부임 지 백성들을 착취하여 축재를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 놓은 소위 반상 제도는 조선 건국 이래 국가 구조의 근간 이었습니다. 1890년 대에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얼마 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양반 인구는 약 2%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 됩니다. 아무튼 소수였던 것은 분명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양반들이 소유 하고 있던 노비 인구가 30-40% 였다는 것입니다. 노비 제도는 19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이완되어 그 수가 19세기 말에는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재산 목록 이었고 사고 팔기도 했습니다. 나머지가 보통 사람 즉 상인 이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은 극 소수 양반의 착취 대상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1882년에 연해주 한인 인구가 만여명이었는데 러시아 사람은 겨우 8385명이었다고 합니다. 1897년에는 15년 전의 두 배가 넘는 2만 5천명이 되었습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연해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 하면서 조선인들의 생활 상을 관찰 했습니다. 그의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특권계급의 착취, 가혹 한 세금, 정의 부재, 쇠약해진 군주, 미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운 나라”라고 서술했습니다. 발전 할 수 없는 형편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 하여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뀝니다. “조선 사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이익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제도와 과도 한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지도자가 다스린다면 언젠가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했습니다.

고종의 경운궁 환궁 (1897년3월4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든 정사를 그와 상의 해서 결정했습니다. 웨베르는 많은 이권을 따 내는 대신 고종에게 친절 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100일,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시덥지 않게 변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서로 나누어 먹으려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선에서 분활 하여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가 관장할 것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습니다. 운명의 38선 아디어는 일본이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요구, 러시아의 푸대접, 왕 호위병 훈련완료 등 여건이 마련 되자, 고종은 외국 공관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탄생

1897년10월12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등극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 했습니다. 대한이란 말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22일에 민비 시해 2년2개월 만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요지음 돈으로 무려 110억이 소비됬다고 합니다.

대원군 사망

1898년2월22일, 주상이 보고 싶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대원군이 사망 했습니다. 며느리 장례식이 치루어 진지 일년여 만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원군의 약력은 조선의 운명사이다. 조선은 완전한 유교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오랜 역사의 반복과 다름 없다. 지금의 세계대세로 보면 조선은 유교국의 최저를 유지 하는 데도 모자란다. 대원군은 이러한 유교국가의 명군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 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처다보았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아들을 철저히 이용했고 아들의 아내까지 죽인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재필 다시 미국으로

1898년5월, 서재필은 귀국한지 2년 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국수주의적인 생각과 왕의 권력을 제한 하려는 입헌 군주제 주장은 러시아는 물론 모든 외국 세력들과 고종에게 도전하는 것들이었 습니다. 특히 미국 공사 알랜과도 서재필은 사이가 좋지 않 았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외국 공사들의 부당 한 조선이권 취득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이들이 좋아할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종 앞에서의 예의 없는 행위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행동등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양반 고위 관리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 하는 독립신문의 논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미국공사 알랜은 공사이면서 고종의 고문 이었습니다. 그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이권에 개입했던 사업이 많았습니다. 서재필은 알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재필에게 귀국 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미국에 있는 서재필의 장모에게 자신이 위독 하다는 전보를 서재필 부인 뮤리엘에게 보낼 것을 요청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보를 받은 뮤리엘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조선을 떠났습니다.

미국 귀환 후 서재필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원선 군의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의대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일을 그만 두고 문방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3월1일, 조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일을 모르던 조선 사랍들이 이제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금을 써서 1924년에 파산 선고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연 했는데, 마침 유한주식회사를 만든 유일한 씨가 1925년에 서재필에게 사징직을 맡겼습니다. 유한양행의 유명 한 버드나무 로고는 서재필의 딸 뮤리엘이 도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 병리학 전문의

1926년, 62세의 고령으로 펜실바니아 의대에 입학 하여 병리학을 더 전공 했습니다. 1929년에 조선인 서재필은 최초로 병리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 약 4년 동안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 하여 미의회로 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쿠테타 군을 지휘하여 고종에 반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 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해방과 죽음

1945년, 해방후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 할 만한 인물을 물색 하던 중 김규식의 추천으로 서재필을 초청했습니다. 1947년에,  서재필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정치 참여를 종용 했으나 모두 거절 하고 미국인 자격으로 미군정 고문관으로 일하다가 1948년9월에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조국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 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풍운아 서재필은 후두암과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투병 하다가 1951년1월5일 향년 88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유골은 화장 되어 필라델피아 안장되어 있다가 감신정변때 노비의 등에 업혀서 살아남았던 조카의 아들인 전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서희원 교수와 종친회에 의하여 1994년 국립묘지에 묘셔졌습니다.

 

결론

우리가 이제 까지 알고 있는 역사는 지나치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악으로 강조 하고,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취약한 국력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추어서 자존심을 살리기에 치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결코 명성황후 오페라나 연속극에 나오는 지혜로운 국모가 아니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라 살림 보다는 부정 축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동 시대의 옆 나라 서 태후에 버금가는 나쁜 왕비였습니다. 전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고 후자는 작은 청 나라인 조선을 일본에게 먹히게 한 많은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은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거의 죽을 때까지 유지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 이었습니다. 그의 끈 질긴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민비 시해에 깊숙히 관련하게 했습니다. 철 없는 젊은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철저히 이용 당했습니다. 그들은 청이 조선 망국의 원인 이라고 굳게 믿었고 일본 세력을 빌려서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게 했으나,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데는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일본, 개화파, 대원군은 모두 민비가 걸림돌이었습니다. 뇌화 부동 할 소지가 농후했습니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은 권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주어진 인생을 한 순간도 낭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생각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능한 고종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애증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좀 더 계몽된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조선이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부를 때 마다 돌아와서 성의 껏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만한 인생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직시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풀린 자존심은 현 세대를 교만하고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

민주주의 발전에 “언론 자유”는 절대 필수 조건 _ 이항렬 (법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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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미국의 주요 TV보도로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이나 선거유세 때마다 “미국 TV, 언론들의 뉴스는 허위 뉴스(Fake News)라고 경고하였으며, “미국 시민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믿으면 안 되고 트럼프 본인의 말 만을 믿으라고” 목청을 높였다고 한다. 그보다 더한 권고는 미국의 TV 방송이나 언론들은 미국 시민의 적(Enermy of People)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현재 민주주의 국가 중 대표 격인 미국에서 대통령이 이런 황당한 말을 연설에서 하니 미국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미국 시민들이 미국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NY Times, Washington Post, NBC, ABC, CNN 등 많은 신문과 방송들은 국민의 적이고 가짜 뉴스(Fake News)를 조장하므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대략 국민의 40%를 차지하는 트럼프 추종자들은 점점 더 과격하게 나가 8월부터 [Q(Qanon) 17]이라는 Placard를 들고 트럼프와 러시아 공모를 조사하는 Muller의 17명 조사단을 민주당원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그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직에서 쫓아내고 미국을 망하게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Muller를 위시하여 조사팀에는 5명의 공화당원이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모설(Conspiracy)을 트럼프는 부인은커녕 오히려 장려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의 변호사인 Guilliani가 주장하는 것처럼 러시아와의 공모, 결탁(Collusion)도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8월 1일에는 법무부장관 Jeff Sessions가 Muller 조사를 중지하여야 한다고 트윗(Tweet)을 보내 미국 사회를 불안하고 분열된 판국으로 몰고 있다.

현재 미국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을 전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민주당 때문에 아무 일도 성취하지 못한다니 러시아의 푸틴과 같이 평생 대통령으로 정당도 공산당 이외에는 인정 안 하는 사회를 그는 동경하고 있는지 의아하다.

이런 불안한 정치 판도에 있어서 언론조차 사실을 보도 못 한다면 결국 미국 민주주의가 몰락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헌법의 제헌자들은 헌법 수정안 제1조에 제일 기본적인 자유를 민주사회 존속을 위하여 강조하였다. 즉 Freedom of Religion, Freedom of Speech, of the Press, Assembly and Association.

위에 열거한 자유들은 민주 법치국가의 심장이며 이런 자유들을 보장 못 하면 독재국가로 퇴보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도 자유스럽고 공정한 선거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안되며 국민들은 그들의 대표를 뽑기 위하여 공정하고 거짓이 없는 정보를 얻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가 없이 공정한 선거는 불가능하며 독재국가에서 모든 신문, 언론, TV 매체들을 국가에서 관할하여 선거를 하면 북한의 김씨 일가들처럼 99%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러시아의 푸틴도 80%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러시아 민주주의 국가의 현실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미국 언론계의 거장이었던 정치평론가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언론은 민주주의의 횃불이라고 하였으며 미국의 언론들은 그 중요성 때문에 입법, 사법, 행정부 이외에 언론은 정부의 제4부로 불린다. 즉 미국은 3권 분립이 아니라 4권 분립이 되어 있어서 민주주의가 균형 있게 발전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아버지 격인 존 로크(John Locke)가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삼권분립이 제대로 안 된 현 미국 정치제도(행정, 입법, 사법, 대법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하에서 정부의 감시 역할은 언론이 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언론의 권력도 견제되어야 하고 개혁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을 정부가 통제하려고 한다면 결국 독재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언론 개혁과정에서 공화당이 과거에 항상 지지했던 자유시장 경제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며, 정부는 언론사들이 자유 개혁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장려해 주어야 한다.

미국에서도 많은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가 언론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특히 보수적인 공화당 지도자들은 트럼프 이전에도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진보적 신문에 비판적일 때가 많았다. 어제 8월 2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대신 National Security Agency의 Dan Coats, FBI Director Gray, Homeland Security Secretary 등이 사실대로 러시아가 이번 2018년 국회의원 선거에도 많은 조작과 정보를 Hacking 한다고 인정하는 모습이 그래도 좀 믿음직스럽다. 트럼프 대통령도 사실대로 러시아의 미국선거 간섭을 비난하고, 방지책을 발표하면 얼마나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가끔 트럼프 대통령은 제3대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도 언론을 비난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제퍼슨 대통령은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 두 사회 중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하면, 그는 서슴없이 ‘정부 없는 언론’ 정치체제를 선택하겠다고 해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훌륭한 이지적, 이성적 대통령이 되었으며 지금도 국민의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지도자로 추대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미국에서도 언론이 공정하고 진실성을 중히 여겨야 하지만 대통령이 자기 정책을 비난한다고 모든 언론을 싸잡아 거짓말만 전달하는 매체로 전락시킨다면 히틀러와 그의 선전상 괴벨(Goebel)이 저지른 똑같은 과오를 다시 범하게 될 것이다. 모든 독재자의 공통점은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고 자기가 선택한 기관지만 인정한다는 것이다. 현재 푸틴, 시진핑, 두테르테, 과거의 스탈린, 페론, 히틀러, 네로 황제 등의 정권들이 어떻게 붕괴하였으며 어떻게 끝나는가를 역사는 자명하게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함성에 의존되어야 하며 국민들이 정부 정책을 신중하게 지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주관하지 않은 공정한 언론 보도를 통하여 국민들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헌법이나 모든 자유 민주주의 헌법이 다 자유를 강조하고 있으며 공정한 언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절대 필수조건이다.

전 쉐퍼드 대학 국제정치학 석좌교수,
전 재미 한국정치학회 회장

조지아 지부 2018 정기총회 및 신년하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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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지부(회장 주지영)는 지난 2018년 2월11일 저녁 둘루스 KTN Ballroom 에서 정기총회 및 신년하례식 행사를 개최했다. 동문과 동문 가족 등 모두 68명이 참석했다. 주지영 회장은 신년인사에 이어 2017년의 사업을 돌아보고 2018년의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2017년 조지아 지부동창회의 사업들-네 번의 정기모임(총회, 봄ㆍ가을 야유회, 송년회), 월 골프모임, 장학기금 모금, 주소록 책자 제작, 세미나 프로그램 등-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지아 지부 자체적으로 장학위원회를 결성해 골프대회를 통해 기금을 마련한 점이 가장 소중한 성과였다.

2018년에도 네 번의 정기모임, 월 골프모임, 2차 장학기금모금 골프대회, 세미나 프로그램들(주중광)이 계획되어 있고, 동문 전체 여행도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영진 재무의 2017년 결산 보고와 2018년 예산안 발표가 이루어진 후, 두 개의 안건- 동창회비 인상안, 이사회 구성안-을 두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투표를 통해 원래 100불이었던 동창회비를 150불로 인상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개인 후원금의 부담이 줄어들 고 동문회의 활동도 더 여유로워질 전망이다. 이사회 구성안은 부결되었다.

토론이 끝난 후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차림의 안토니 맥(Anthony Mack)이 스코틀랜드백파이프 연주를 선보였다. 백파이프의 역사와 연주법 등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곁들임으로써, 생생한 백파이프 소리를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현장에서 듣는 백파이프 소리는 녹음으로 듣던 것 보다 훨씬 강렬했고, 마치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에서 미지의 짐승이 신비롭고 웅혼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했다.

식사 후 장학금 수여식에서, 네 명의 동문 가족들에게 장학증서와 함께 각 1천불씩의 장학금이 전달되었다. 장한웅(Freed-Hardeman Univ.), 정재훈(UGA), 니콜 심(Barnard College), 이정민(UGA)이 장학금을 수상했고, 장학금 후원에는 제일은행, 강창석, 공영식, 임한응, 유상봉, 박민, 사성주, 심정필, 신한은행, 백낙영(메트로시티 뱅크), 이경훈 (서울국제여행사), 주중광, 김무영, 이종석, 임수암, 임종원, 이주경, 이윤영이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일보 정치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애틀랜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하는 김상진 동문(정치 49)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한국 전쟁 체험자로서, 잿더미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우리 민족의 저력을 목격한 그는, 한국이 현재 직면한 경제ㆍ안보 위기를 진단하고 이 문제를 타결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강연이 끝난 후 다양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면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다양한 연령층의 동창들은 교가를 함께 부르며 진지하면서도 화목했던 모임을 마무리했다. [기사제공: 최재경(국문 90)]

미국의 힘과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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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럼프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은 미국은 쇠퇴의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수적인 정책을 써서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몰락설의 가정 아래 트럼프는 반이민 정책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한 예로 최근에 캐나다에서 열렸던 G7 회담에서도 그는 동맹국들에 관세를 통보하고 고립된 존재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재 트럼프는 70년간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 캐나다, 독일의 지도자들을 냉대하고 오히려 러시아, 북한, 중국 독재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많은 진보적인 미국 학자들은 이런 이율배반적인 트럼프의 정책이 미국의 힘과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토의는 벌써 베트남 전쟁 후, 60년대부터 토의되고 있었으며 보수파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같은 학자는 미국 몰락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미국은 다시 재기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아직도 전 세계 경제 생산력의 20%를 생산하고 있으며 제일 으뜸가는 경제로 국가생산(GDP)이 $19 trillion 이며 중국은 $16 trillion 이나 개인소득(per Capita)으로 보면 미국이 $54,800이며 경제규모는 크나 중국은 개인소득이 $12,900 정도이다. 그다음으로 인도는 $9 trillion, 일본 $5 trillion, 독일이 $4 trillion이라는 참고자료를 제시하였다. 특히 군사력에 있어서 미국이 월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 년 국방예산을 보면 미국 $610 Billion, 중국 $228 Billion, 러시아 $66 Billion, 일본 $47 Billion, 한국 $35 Billion 이라고 비교 통계를 볼 수 있다. 무기 보유 데이터에서도 미국이 해군과 공군에서 월등하여 항공모함은 미국 10척, 중국 1척, 러시아 2척, 인도 2척으로 통계가 나왔다. 러시아는 경제면에서 총생산력이 캘리포니아주의 반 정도 이나 핵폭탄을 8,500기 정도 보유하고 있어서 세계 두 번째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당장 미 해군이 10여 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300여 척의 미 함정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정찰하고 있다.

이런 월등한 “미국의 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의 학자로서는 전 Yale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Paul Kennedy 교수도 그의 베스트셀러 “미국의 흥망성쇠”에서 미국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지적한 대로 미국의 도덕성 하락, 막대한 부채, 범죄율 증가, 약물 남용, 무역 적자 등을 제시하고 있다.

두사람의 상반되는 설이 모두 어떤 면에서는 옳은 점이 있으나 냉정하게 관찰할 때, 미국의 영향력이 60년대초부터 점차 줄어든 것은 기정사실이다. 2차대전 직후, 미국의 경제 생산력은 전세계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하였으나 지금은 20% 정도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많은 미국인은 미국의 장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특히 2016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정치를 음모설로 해석하여 경제와 더불어 퇴폐적으로 되었다고 계속 주장하며 ‘공포 우려설(fear mongering)’ 전략으로 미국 사회를 불안과 분리로 만들어 가고 많은 국민들이 미국 사회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곧 멸망한다고 볼 수는 없다. 점차 쇠퇴한다고 하나 세계 역사상 거대한 제국 Pax Romani, Pax Britannica가 보여주었듯이 멸망이 갑자기 오지 않는다. 핵전쟁과 화학 전쟁만 없으면 21세기 후반까지는 미국의 영향력이 세계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대영제국을 능가하는 Pax Americana는 막강한 군사, 경제력 이외에 특히 2차대전 때에 월등한 외교정책으로 많은 동맹국을 집결하여 국수주의적인 인종 우월주의자 히틀러의 세계 집권을 좌절시켰다. 특히 미국의 이상(Ideal)과 원칙(Principle)이 전 세계 국가 다수의 호응을 자아냈으며 미국의 자유, 인권 강조는 연합국의 사기를 북돋웠던 것이다. 객관적인 국가의 힘은 국민(Population)의 자질, 국가의 자원과 자원효용, 농업효용, 군사력 등으로 결정되나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지(Will)와 지도자의 능력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미국 역사상 4선에 당선되었던 Franklyn Roosevelt는 훌륭한 외교와 정치 능력으로 2차대전을 치렀으며, 그를 계승한 Truman 대통령, Eisenhower 대통령 등은 패배한 나라 독일과 일본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경제적 부흥을 일으켜 전쟁 후, 미국에 도전하는 소련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 NATO, SEATO, ANZUS 등으로 오히려 포위하여(Containment Policy) 공산주의 팽창을 성공적으로 좌절시켰다.

역사에서 보여주었듯이 독재 정부에 비하여 국민들이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부는 전쟁위기에 단결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인종 우월성을 강조하며 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히틀러의 독일은 외교적으로 강한 동맹국을 Recruit 못하였으며 소련도 마찬가지로 냉전 시대에 불량국가로 고립되었다. 이런 역사적 고찰을 볼 때, 현재 NATO와 한국, 일본 동맹국들을 경제적 부담으로 비난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세계평화와 질서를 위해서는 돈과 무기보다 더 중요한 이상(Ideal)과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차대전 때 관대한 명성(Reputation)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미국을 신뢰하게 된 것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물론, 미국도 인종차별, 빈부격차, 사회폭력 등으로 이상적인 평화스러운 원칙을 따르는 사회를 완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소련, 중국 이외 많은 독재국가에 비하면 월등히 났다.

6월 중순에 New York에 회의 참석차 십여 년 만에 4번째로 Ellis Island와 Statute of Liberty를 방문하였다. 아직도 반이민주의가 판치고 트럼프 대통령은 Zero Tolerance 이민정책으로 모든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고, 생명의 안전과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소위 Ssylum Seeker들을 체포하여 그 아이들을 뿔뿔이 따로 격리 수용시키는 마당에 뉴욕 항구 앞바다에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정말로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였다. 특히 배고프고 불쌍한 이민자가 자유를 그리워하고 자식들을 위한 좋은 미래의 인생을 찾아오는 이 불쌍한 인간들을 환한 횃불을 들고 맞아주는 자유의 여신상, 57년 전 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뉴욕으로 유학왔던 생각이 나 눈물이 글썽거려진다. 이것이 미국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박해를 받아 미국으로 왔으며 고생도 많이 하고 이 나라 발전에 동참하였다.

미국의 상징은 Empire State Building, Hollywood, Disney Land, World Trade Center가 아니라 자유의 여신상이다. 여신상 이외에 미국을 상징하는 감명 깊은 동상이 있는데, 그것은 Washington D.C.에 있는 Lincoln 대통령의 동상이다. 그 인자하며 겸허한 모습, Lincoln Memorial 벽에는 남북전쟁 때의 그 유명한 연설문 한 구절이 새겨있다. “정부는 국민이 만들었으며, 국민의 것이고, 국민을 위하여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Government by the People, Government of the People & Government for the People”

링컨 대통령 말씀대로 미국 정부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정부도 아니며 특히 삼권분립의 미국에서 정부는 대통령의 것도 아니고 대통령 권한이나 부 축적의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의 종이며 좋은 심부름꾼의 역할을 할 때, 훌륭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동안은 기회가 있으면 많은 독자도 자유의 여신상, Lincoln Memorial, Jefferson Memorial, Mount Rushmore 등을 방문하시고 감명받기 바라며, Washington D.C.에 가실 기회가 있으면 Arlington Korean War Memorial 묘지를 방문하여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국가에 몸을 바쳤던 장병 묘지를 방문하면 귀중한 시간이 될 것 같다.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기념비 근처에 한 문장이 벽에 새겨졌는데, “Freedom is not Free”라고 우리의 눈길을 끈다. 순국한 장병들이 없었으면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_ 온기철 (의대 65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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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018년 서울의대 미주 동창회 하계 컨벤션 강의 초록)

이 세사람은 19 세기 중반에서 19세기 말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민비가 어떻게 시해를 당하게 되는가에 맞추겠습니다. 민비는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대원군과 개화당을 정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일본과 결탁하여 민비를 제거하게됩니다. 서재필은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써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고 미국시민이 되어 생애를 마치신 분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어느때보다 어려운 그 시기에 어떻게 인생을 꾸려갔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 세기 중엽은 어떤 세상이었던가?

1840-1860 년 사이에 벌어진 1,2 차 아편전쟁은 세계의 질서가 중화 – 오랑캐 구도에서 문명-야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교를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이룩한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의 최강국이었고 세상의 중심은 중국(중화)이고 다른 나라는 모조리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구조의 하나로 종주국-종속국 관계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유롭과 미국은 계몽사상과 산업혁명를 거처서 근대국가로 변신 합니다. 중국의 낡은 제도는 부패해 갔고 산업화된 신흥구미국가들은 문명국-야만국 구도를 앞세워 침략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문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습니다. 쓸어저가는 공룡 중국은 구미 국가의 이권 찬탈로 외환을 앓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안으로는 수많은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난리가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홍수환은 자신이 하느님의 둘 째 아들임을 자칭하고 예수교의 평등교리를 앞세워 남녀평등, 토지균등 분배등을 주장하고 약 14년 동안 중국의 거의 반을 지배했던 사건입니다.

이 난을 제압한 인물이 이홍장입니다. 이 공으로 이홍장은 청나라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력 자가 됩니다. 그리고 망해가는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를 양무운동이라고 합니다.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민비-온건 개화파가 이 양무운동을 답습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합니다.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정권은 천황을 정권의 전면에 내세워 입헌군주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서양과 똑 같은 나라를 만드는 개혁을 했습니다. 양무운동이 절름발이 개혁이었다면 명치유신은 완전무결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주도한 사람 중에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는 명치유신같은 개혁을조선에서도 이룩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국의 이홍장,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등장할 무렵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합니다.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망국으로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실학을 바탕으로한 개혁이 정조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여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씨 왕조라기 보다는 김씨 왕조였습니다. 대원군은 이 씨왕권을 되찾으려는 기회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다가 철종이 죽을 무렵 안동 김씨와 대립관계에 있던 조대비(선정 왕후)와 접촉하여 12 살 난 자기 둘 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에 나섭니다. 1864년1월이었습니다.

정권을 거머쥔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당한 세금제도를 바로잡고 매관매직을 금지했으며, 붕당의 진원지이고 백성을 괴롭혔던 서원을 철폐하여 백성들의 삶이 많이 증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단순히 영,정조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대가 요구 하는 개혁은 옛것을 복구하는 수구보수적인 것이 아니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산업 사회를 만드는 좀 더 진취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이웃 나라인 일본의 명치유신은 물론 대국 청나라의 양무운동 보다도 훨씬 미흡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쇄국 정책, 제너럴 샤만호 사건과 박규수

청나라, 조선, 일본은 모두 오랜 동안 쇄국이 기본 외교정책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서양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무너져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천주교를 받아 드리면 신분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수구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우선 내치를 안정 시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한 다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하며 서양국가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66년 8월, 대동강 물은 장마로 크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미국 상선 General Scherman 호는 그 물을 타고 평양성 깊숙히 들어 왔습니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으로 무장을하고 있어서 해적선으로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선원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는 등 폭력을 가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강물이 줄어 들어 배가 움직을 수 없게 되자 평안 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배를 공격하여 배에 불이 붙자 선원 전원이 물에 뛰어 들어 사망했고 박규수는 배의 엔진를 노휙했습니다. 박규수는 이조 침판을 지내는 등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인물 이었습니다. 당시에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려면 지방 근무로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여 지방 수령직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침 중요한 사건이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큰 인물이 평양 감사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의 손자였습니다. 박규수 또한 베이징을 여러 차례 다녀 오면서 아편전쟁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조선도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개화파 육성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이 개화파는 민비의 강력한 정적이 됩니다.

민비의 등장과 고종 친정 시작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지 2년 만에 민자영은 고종의 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왔습니다. 장희빈의 음모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숙종비 인현 왕후 집안인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이었습니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방지하기 위해서 형제 자매, 부모등 친척이 없는 것을 장점으로 여기고 대원군의 부인과 같은 집안인 여흥 민씨를 택한 것입니다. 당시 고종은15세, 민비은 16세 였으나, 민비의 권력욕과 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머리 굴리기는 대원군 못지 않았습니다.

1866년 민자영이 왕비가 되던 해는 대원군이 무려 8000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 9명을 죽이는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이로 인한 병인양요, 제너랄 셔만호사건 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흥 민씨인 대원군의 부인에게는 민승호라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민비는 민승호를 자기 아버지 민치록의 아들로입적 시키고 자신의 오라비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권력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반 대원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조 대비와 연대하여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은 풍양 조씨에게 충분한 대접을 해주지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성하를 포섭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형 흥인군 이최응도 민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이 개혁을 위해서 남인과 북인을 선호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노론 계인 안동 김씨 김병기를 포섭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반 대원군 세력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붕당의 아지트였고 백성을 착취하는 전위부대였던 서원을 철폐한 대원군은 유학자들의 원수였습니다.

대원군 섭정 10년, 고종의 나이 22세가 되자, 그중 지도자 격인 최익현을 포섭 하여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상소는 반 대원군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을 근거로1873년,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민비가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영흥민씨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반격

민비의 처가 여흥 민씨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보다 더 심한 매관 매직, 뇌물 수수 등 온갓 비리로 권력 유지와 축재를 했습니다.이로 인한 민생고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합니다. 민비와 고종 사이에서 난 왕자와 공주들은 낳자마자 죽거나 병약했습니다. 민비는 이를 해결해 보고자 무당을 불러서 궁중에서 굿을 하거나, 전국 유명한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습니다.민비는 무당과 사찰에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민비는 극과 풍악을 좋아하여 거의 저녁마다 잔치를 벌렸다고합니다. 밤잠을 설친 고종은 낮에 정사를 보면서 꾸벅 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국고를 썼습니다. 대원군이 궁중 재정을 흑자로 돌려 놓은 것을 고종과 민비는 적자로 만들었고 이를 매꾸고자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민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고 대원군의 인기는 상승했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끈질기게 민비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시도합니다. 민비숙소에서 폭탄이 폭팔했지만 민비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선물 보따리에 폭탄을 넣어 민승호의 집에도 보내어서 이것이 폭팔하여 민승호를비롯한 일가가 사망했습니다. 대원군의 형 흥인군 집에 불이 나는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에 대원군 집에 머물렀던 식객이 주도 한 것으로 후에 밝혀졌습니다.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통상 조약인 병자 수호 조약을 1876년에 일본과 체결했습니다. 이는 지독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권리만 명시하고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는 전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민비의 또 하나의 정적 개화당의 탄생

제너럴 샤만호 사건 때 평양 감사로써 대포와 총으로 무장 한 미국 상선을 제압했던 박규수는 개화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의 생각은 이홍장의 양무운동과 같이 전통적인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반 세도가들의 자식들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하여 북경에서가지고 온 새로운 서양 문물과 책를 소개하는 등 서양 지식을 그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김옥균, 유길준, 박용효, 박영교, 홍영식, 김윤식, 서광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고 그중 김옥균이 이들의 보스였습니다. 그는 노론계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 였습니다. 시문, 글씨, 그림에 뛰어나고, 매우 사교적이어서 위로는 정승 판서와 친했고 아래로는 시장 잡배와 어울렸다고 합니다. 가무, 음주, 주색 잡기, 바둑, 투전, 골패에도 탁월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박규수는 그에게 중화 사상이 허구 임을 가르쳤고, 개화파들이 청과의 관계 단절을 외치고 다니게되는 믿 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다. 박규수는 고종에게 박영효를 부마로 삼을 것을 추천 했습니다. 서광범은 이조 참판 서상익의 아들이었습니다.

서재필; 개화파의 일원이 되다.

1864년 1월7일에 서재필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고 보성은 그의 외가였습니다. 서재필 부모는 곧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사 하여 7살이 되던 해에 한양에 있는 6촌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한양에서 살게 되었는데, 서광하의 부인은 안동 김씨 김온순의 딸이며 구한말 대신 김성근의 누나였습니다. 서재필이 낳던 해와 달은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 한 해와 달과 우연히 일치합니다.

유년기의 서재필은 동료들 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싸움을 잘 했으며 명석했고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했는데, 김옥균, 서광범등이 이 집에 드나들었고 서재필은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옥균은 서재필을 총애했습니다.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재필은 곧 이들과 함께 박규수의 집에 드나 들면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서재필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옥균이 개화당의 모체인 충의계를 만들자 서재필도 이에 합류했습니다.

개화파와 붕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

박규수 외에 개화파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봉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입니다. 그는 일찍이 일본 사찰에 묶으면서 게이오 의숙에서 개화 사상을 배웠고 유기치와 개화파인사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활을 했습니다.

이동익은 부산 출신이어서 그 곳 왜관에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인과 접촉하여 새로운 문물과 서적들을 봉원사로 가져왔습니다.김옥균등 개화파 인사들은 봉원사에 드나들면서 이동익이 가져온 것들을 교재로 공부했고 12살 위인 김옥균은 서재필을 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했습니다.

개화파의 승계; 오경석-유흥기(대치)

1877년에 박규수가 죽자, 역관 중인 출신 오경석이 개화파를 승계했습니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이었습니다. 그는 박제가의 실학을 발전, 확대 시켰습니다. 개화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중인 출신인 그는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오경석은 한의사였던 대치 유흥기와 같이 활동했는데, 1879년에 오경석이 사망하자 유흥기가 승계하여 개화파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백의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졌었고 교육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 위정 척사파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갈라집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김성근 등 으로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시도하고 있는 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친청세력이었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두 다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일본이 앞서 시행했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조선의 뒷 처진 현실을 중국에 예속된 조선의 관계에 그원인이 있다고 보고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친일 세력이었습니다.

위정척사파 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유교는 옳은 것이고 천주교등 외래 사상은 틀리 다는 주장입니다. 서양문물은 물욕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순수한 인륜문명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으며, 과학보다 도가 더 중요하며 무보다 문이 중요하다고 고집했습니다. 최익현등이 주도했던 이들을 다수의 국민이 지지했습니다. 외세를 배제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조선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패망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고종; 청나라에 영선사 파견, 개화파; 후꾸자와 유키치와 접촉

1880년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던 중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황준헌을 만났습니다. 그는 김홍집에게 조선 책략 이라는 책을 줍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이 외세로 부터 살아 남을 려면 어떻게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가를 충고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청의 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 습니다. 친중, 결일, 연미가 정책의 골자였습니다. 김홍집은 이 책을 고종에게 가져다 주었고 고종은 이 세 나라와 잘 해 볼려고 노력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책이 전국으로 퍼지자위정척사파는 극열하게 반대 했고 백성들 또한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습니다. 1881년, 고종은 지금의 외무부와 비슷한 통리기무 아문을 설치 하고 청에 영선사, 일본에 신사 유람단을 파견합니다. 김윤집, 어윤중은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는데 임오군란 때 민비를 멸망 일보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구하는 데 큰 역활을 하게 됩니다. 고종은 극 비리에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위정 척사파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일본과 거래 하는 것을 반대 했기 때문입니다. 이동익이 주선했고 이동익도 수행하려고 했으나, 그는 떠나기 전에 행방 불명이 되고 그 이후로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 습니다. 이 때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됩니다. 그는 원래 계획 대로 일본에 남아서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웠습니다. 급진 개화파와 후꾸자와 유기치 와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꾸자와는 일본 제일의 현자이고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있는 인물입니다. 일본돈 만원권에 프린트된 그의 초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이오 의숙을 창설 하여 일본 근대화에 이바지한 많은 인재를 만들어냈습니다. 시사신보를 만들어 계몽활동을 했습니다.“탈 아시아”라는 기치를 앞세워 일본의 유롭화를 외쳤습니다. 김옥균은 1883년에 60명을 게이오 의숙에 유학하게 했습니다. 후꾸자와 유기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 이었습니다.

대원군의 반격; 이재선 반역 사건

조선책략을 읽어본 유생들은 이를 극열하게 반대했습니다. 여론 또한 위정척사파들의 편이었습니다. 인기가 좋았던 대원군은 첩의 아들인 이재선을 앞에 세워, 경기도 지방에 과거시험을 치려고 올라온 유생들을 이용 하여 대신들과 민씨일족을 제거하려는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임오군란 일 년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테타

권불 10년이라고했던가? 대원군의 섭정이 10년 째 되던 1873년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 된지 9년이 지난 1882년, 임오 군란이 일어 납니다. 이 사건은 구식군대의 “군란”이라기보다는 대원군이 민비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쿠테타였습니다. 구식 군대가 시작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합세했고 이 폭도들을 이끈 인물은 대원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목적인 정권을 일시 적이나마 장악 하게됩니다. 당시에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원성은극에 달했습니다. 1882년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일본과 통상을 연 후 부터 쌀이 일본으로 많이 송출되어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쌀값이 폭등했습니다.

민씨 외척들의 매관매직과 돈들여 벼슬자리 얻으면 본전에 이익까지 챙기려고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고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갔습니다. 민비의 잦은 무당굿과 밤이 늦게 벌리는 잔치는 궁중의 예산을 탕진했으니 무슨 돈으로 백성을 돌보았겠습니까? 대원군은 섭정 때 구식군대를 잘 정비했고 그들은 병인양요, 신미 양요등 그런대로 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구식군대 5군영을 2군영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일본의 힘을 빌려서 창설했습니다. 말을 하자면 전자는 대원군의 군대고 후자는 민비의 군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세청장 쯤 돼 보이는 민겸호는 구식군대에 지급 될 쌀을 몽땅 착복해 버립니다. 무례 1년 동안 구식 군대는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13개월 만에 쌀로 월급이 지급되었습니다. 무게를 늘일 려고 물과 모래를 부어서 쌀이 썩어있었습니다. 화가 난 군인들은 폭도로 변하여 민겸호 집에 방화하고 무위영대장 이겸호 집을 습격하는 등 우왕 좌왕 하다가 대원군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 그들을 이용한 쿠테타를 주도하게 됩니다. 일반 백성 까지 합류하여 대원군은 막강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대원군 형 이최응을 살해하면서 창덕궁을 함락시킵니다. 궁궐로 피신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은 민비를 살해하려려고 혈안이 되어 찾았으나 민비는 무사히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구식군대 병졸들은 대원군 집권을 요구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 들여 전권이 다시 대원군에게 넘어갑니다. 궁을 빠져 나간 민비는 충주 장호원 목사 민응식 집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민비를 놓친 대원군은 행방불명으로 간주하고 시체가 없는 민비장레식을 치루었습니다. 백성들은 대원군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물가고 해결을 위해서 시전 상인 1000명을 처형 했습니다. 1866년 천주교 신도 8000 처형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냉혈한 대원군의 무자비한 행위였습니다.

청; 반란군 진압-대원군 납치, 민비 복권

충주에 숨어 있던 민비는 친척을 통해서 청에 영선사로 가 있는 김윤식, 어윤중과 접촉하여 청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과 접촉 할 수 있었고, 청과 김윤식은 대원군을 납치 하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이홍장은 많은 영토와 자기들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이 서양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을 확실하게 자기들 영향권에 넣으려고 조선에 회군대장 오장경이 지휘하는 3000명의 병력을 한양에 보냈습니다. 이 때 김윤식도 같이 귀국했습니다. 오장경은 고종을 예방한 후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방문하면서 대원군을 자기 막사로 초대합니다.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군 막사로 대원군이 들어 서자 마자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텐진으로 유폐되어 4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3일 동안의 권력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이제는 절름 발이 정권이 되었습니다. 청나라 장수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는 권력이었습니다. 조청상민수륙장정 이라는 일종의 행정 명령을 내려 청나라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조선에서 상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상인들에 대한 피해와 청군의 보호를 받은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행패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서재필의 정계 진출과 개화파와 후꾸자와의 밀착

1883년5월, 서재필은 14명의 유학생 대표로 일본에 가서 6개월 간 게이오 의숙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언어 습득력이 남달리 뛰어 난 서재필은 불과 6 개월 만에 통역 없이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1884년 1월에 그는 일본군 하사관 학교에서 6개월 간 군사 교육을 받고 귀국 하여 사관 학교 교장 격인 장교 양성 학교 사관장으로 봉직했습니다. 1882년8월에 급진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뒷 처리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 등은 후꾸자와 유기치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키치에게 감화되어 우리도 일본같이 개혁을 해야 된다고 굳게 믿게 됩니다.

갑신정변; 청과 일본의 대결-청의 승리

임오군란 후 청군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 내고 복권하게 된 고종과 민비는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에 크게 의존 하게되었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청군이 조선에 주둔 함으로써 많이 약화되는 수 밖에 없었고 친일 세력인 개화파는 점점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횡포는 중국의 영향이 조선의 쇠약한 국력의 원인 이라고 생각 하는 개화파 인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민영익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한 사이였고 급진 개화파와 같이 일했으나, 미국, 구라파를 돌아본 후에 친민비 집권 당인 친청 온건 개화파 쪽으로 이탈했습니다. 한편 박영효는 한성 판윤에서 광주 유수로 급기야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크게 그 세력이 위축된 개화파는 일본공사와 접촉하여 쿠테타 계획을 세우고 그 시기를 염탐하던 중,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을 놓고 전쟁을 하기 시작하자, 조선 주둔 군의 반인 1500명을 본국으로 소환했습니다. 1884년12월4일 우정국 낙성식 때 주요 인사가 한 자리 모인 현장에서 주위에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운 후 이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감금 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 요강을 발표했습니다.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려고 찿아온 대신11명을 고종 앞에서 살해했습니다. 다음 날 고종의 요구를 거절 하지 못하고 고종이 환궁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경우궁은 협소 해서 방어 하기가 용이한 편이었으나 넓은 창덕궁은 진압군을 방어하기 힘들어서 환궁 허용은 큰 실수 였다고 합니다.

청군 대장 원 세개는 고종과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쿠테타 세력을 진압할 것을 통고했습니다. 일본정부는 다케조에에게 청군과 충돌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다케조에는 개화파들과의 약속과는 달리 전혀 싸우지 않고 슬그머니 후퇴해 버립니다. 12월6일 3일만에 쿠테타 세력은 원세계에 의해서 완전히 제압되고 개화파는 반역죄를 지은 역적이 되었습니다. 황영식과 박영교는 청군한테 참살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은삼족이 멸는 함을 당하는 참혹 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서재필의 역활과 가족들의 피해

서재필은 사관생도와 쿠테타 병력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과 협조하여 요인 살해에 직접 참여 했습니다. 쿠테타 진압군으로 부터 궁을 수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삼족이 다 죽거나 중형을 면치 못하는 대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친 아버지 서광효는 투옥된 후 자결 하였고 어머니와3 형제는 사약을 받거나 살해 당했습니다. 부인은 친정을 찿아 갔으나 아버지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의 아내라고 집 밖에서 극약을 주어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 가는 길에 기생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으 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2 살 난 아들은 굶어죽었습니다. 딸은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으나 행방이 묘현합니다. 보성의 친 외가는 몰락했지만 생명은 부지했습니다.

갑신정변의 배후; 후꾸자와 유키치

사실상 후꾸자와 유기치가 이끄는 일본 진보파가 김옥균을 앞세워 일으킨 쿠테타였습니다. 후쿠자와는 3년 동안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 기획, 지휘 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일본 진보파 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개화파를 연결고리로 삼아 조선을 근대화 시켜 일본이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구도에서 구미국가의 제국주의식 식민지화 정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망명 한 달 동안은 일본측이 잘 보호해주고 친절 했으나, 쓸모 없는신세가 된 조선의 망명객들은 헌 신짝처럼 버려집니다.

서재필의 후회와 좌절, 일본의 천대, 조선의 자객; 미국 망명

이제 갓 20 살이 된 서재필은 압뒤를 가리지않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같은 자신의 경솔 한 행위를 깊이 후회 했습니다. 국민들은 아직도 위정 척사파들의 외세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일본을 끌어드려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구테타 계획 자체가 허술했음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불장난 같은 행위로 인한 가족, 친지들의 참혹한 불행은 서재필의 가슴을 메게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 죄가 없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중죄를 가한 조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푸대접 했고, 더구나 안전을 보장 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끝임 없이 일본정부에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고,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쎈프란 시코로

이렇게 일본이 위험해지자 이들은 미국 쎈프란 시스코로 피신 했습니다. 1884년12월13일에 인천을 떠난지 약6개월이 된 1885년5월26일 요꼬하마를 출발 하여 쎈프란시스코에 6월말에 도착했습니다. 공주의 남편 박영효는 미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돌아 오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소갯장을 들고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이제 혼자 남아서 이민생활을 개척해 나갑니다.

서재필의 쎈프란시코 생활과 윤치호의 도움

한국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종차별 또한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영어를 못했던 서재필이 직장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얻은 일은 광고전을 붙이기였습니다. 평균 5 마일 정도 커버 했는데, 서재필은 10 마일에 걸처서 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잡일을 하던 중 윤치호와 연락이되어 그는 서재필에게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온건 개화파의 득세와 텐진조약

갑신정변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청과 일본이 싸워서 청이 승리한 셈입니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을 밀어 낸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는 더욱 그 세력를 굳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테타군 진압 과정에서 공사관이 소실되었고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손해 배상 요구, 사과, 공사관 부지 제공 등을 약속 받은 한성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 진보파가 조선의 개화파를 앞세워 일으킨 정변을 청의 젊은 장군 원세개가 진압한 후 이홍장은 자기 영토인 텐진에 이토 히로 부미를 불러 텐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의 골자는 양국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앞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에게 통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85년4월이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대원군은 같은 도시 텐진에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동양 삼국의 거물이 한 도시에 있었으나 국력은 그들의 입지를 반영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청일 전쟁의 빌미로 이용 하게됩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1884년9월20일, Horrace Newton Allen 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던 날 우정국 낙성식 때 크게 부산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왕과 왕비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광혜원과 제중원을 창설하는 등 처음 5년간은 의료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 7년간 공사관 서기 그리고 8년 간 공사로 봉직 했고 동시에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미국에 이로운 조선의 사업과 자신의 치부를 위한 사업에 많이 관여했 습니다. 자연히 조선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서재필은 이것을 비난 했고 그 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Horrace Undrwood, Henry Appenzeller, W.B. Scranton, Mary Scranton 등이 1885년에 입국 합니다.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중제에 나서서 북경조약을 체결 하게 한 댓가로 브라디 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를 청나라로 부터 넘겨 받았습니다.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년 이후로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접경 하게 됩니다.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는 이제 조선을 넘겨다보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러시아와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더욱이나 갑신정변 이후에는 조선은 청나라에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슬그 머니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나라를 견제해 볼려고 했습니다. 이 낌세를 알아 차린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 하고 청나라에게 알립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청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청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렸습니다. 물론 조선 조정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 했다는 사실을 한 달 동안이나 모르고 있다가 청이 알려 주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위안스카이; 조선최고의 권력자, 대원군의 귀국

1885년10월5일, 갑신정변을 제압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돌아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텐진에 구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대동했습니다. 청이 대원군을 구금에서 풀어주어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민비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청은 민비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자, 민비는 친 대원군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한달 사이에 무려 30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감국이 됩니다. 조선의 왕을 감독한다는 뜻입니다. 고종은 완전한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궁녀를 대려다 농락했고 고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에 신해혁명으로 선출된 대통령 손문으로 부터 대통령직을 양보 받아 망국 청 나라를 접수 한 인물이 바로 조선 감국 위안스카이입니다. 향후 1894년 청일 전쟁때 까지 청나라의 조선 통치는 약 10년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영국군 거문도 철수, 베베르 공사 와 손탁 입국

1887년2월27일 약 2년 동안 조선의 거문도에 머물었던 영국군은 러시아가 청국에게 조선을 점령할 계획이 없음을 선언 하자, 철수 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고 청은 조선의 장악력에 관계된 러시아의 방해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베베르 공사가 부임하면서 사교계의 여왕 손탁(Antoinette Sontag)이 들어와 손탁호텔을 운영하는 등 외교관, 정치인들과 사귀어 소위 친러파라는 소위 정동파를 만듭니다.

19세기 중, 후반의 한반도 정세와 사회

우편제도, 신문, 전신 제도, 전기 등 근대 국가의 문명의 이기가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제 학당,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표면적인 발전은 전혀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일을 해야했으나 국방을 하기에 앞서 외세에게 나라의 이권을 내주어서 자기 정권 유지하려했고, 국민을 착취하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양반관료들은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았고 돈을 써서 한 자리 얻은 관리들은 부당한 세금을 걷어 본전과 이익을 챙겼습니다.

고종과 민비의 궁중 예산 낭비로 인한 적자를 매꾸기 위해서 고종 자신도 관직을 팔았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여러나라와의 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서 외국으로 부터 싸고 좋은 물건들이 범람하여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진 물건들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조선 지배는 청나라에게 엄천 난 특권을 주는 경제 정책을 강요 받았고 조선 상인 보다 청나라 상인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인천의 차이나 타운과 짜장면 집, 호떡 집 등은 원세계와 같이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없게된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도적 떼에 가담하여 전국에 도둑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식량이 없어서 나무 껍질을 먹은 사람들이 대변을 누다가 항문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를 보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 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1894년 조선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을 청이 물리 치고 조선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 하게 한 사건 들이었습니다. 또다시 권불 10년의 그 10년 쯤 되던 해가 1894년 입니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해입니다.

동학 농민 혁명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는 반상제도는 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백성 (상민)들을 착취하는데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인내천을 교시로 하는 동학사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었고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백성들 간에 빠른 속도로 퍼저 나갔습니다. 1890년 대에도 천주교는 국가에서 인정을 해주었으나 동학교는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반상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인정해주면 양반들이 자기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892, 1893년에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주고 동학교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가 삼례를 기점으로 하여 충청도 보은에서는 2만내지 8만명이 운집하는 대규모의 집회가 여러 날 계속되었고 금구와 밀양에서도 작은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봉준, 조병갑에게 반기를 들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중앙 관료 들이 알아 주는 백성 수탈의 명수였습니다. 백성들로 부터 걷어들인 세금과 뇌물을 중앙 관료들에게 잘 바쳐서 노른 자위 지방 관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부는 비옥 한 농토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포탈할 산물이 풍부 했습니다. 1894년2월26일 전봉준은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반기를 들고 그 동안의 평화적인 시위를 한단계 뛰어 넘는 농민들로 구성된 반군을 지휘하여 각 고을을 공격,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사발통문으로 방을 부처서 반군을 모집했습니다.그들은 전주성을 점령 하고 서울로 진격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정부군과 싸웠습니다.

하필이면 왜 호남에서?

조선 전국의 논 30.8%가 호남에 있었고 쌀의 42.3% 가 호남에서 생산 됬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수탈 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할 정도로 관리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전라도 관리의 대부분이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전주성 점령과 청에 원군 요청

1894년5월10일, 그러니까 난이 발발 한지 3개월 만에 홍계훈이 정부군 800 명을 청나라 군함에 싣고 군산에 들어옵니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상궁으로 변장 한 민비를 등에 없고 궁을 빠져 나가 민비가 반군의 칼날을 피하게한 장본인이 홍계훈입니다. 조선은 아직도 원세계가 지배하는 청나라 세상임을 상기하면 조선군이 청나라 군함을 이용함은 당연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임진 왜란 때나 마찬 가지로 조선의 군인 들은 농민인지 군인인지 모르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요지음 세상으로 치면 예비군이 정규적인 훈련도 하지 않고있다가 전쟁이 나면 차출되어 적과 싸우게 되는 꼴 입니다. 800명은 막상 동학군과 싸울 때는 겨우470명 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악에 밪친 동학군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당도했을 때는 관료와 관군은 전부 도망가고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전주성이 동학군에게 점령당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청합니다. 이 때가 6월1일, 그 다음날 일본은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닷새 후인 6월6일 청군 1500 명이 아산으로 출발하고 다음 날에 텐진 조약에 약속 된 대로 일본에게 통고를 했습니다.

전주 화약과 동학군 자치 정부, 집강소 설치

홍계훈은 정부군을 재정비하여 동학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는동학군이 패배 했습니다. 성 안의 식량은 고갈 되어갔습니다. 때는 모내기 할 농번기 였습니다.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6월11일 그들은 새로 부임한 전주 감사 김학진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내 줍니다. 전주성을 나온 동학군은 모심으러 집에 돌아 가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 하여 각 고을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혁명군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는 호남 일원 행정 관청 안에 설치 되었고 고을의 수령은 자연이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세기 전 프랑스 혁명을 방불케 하듯 12개의 행정 요강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했습니다. 탐관오리의 죄를 조사하여 처벌함, 노비문서 소각, 천인 대우 개선, 청춘과부 재가 허용. 토지 균등 분배 등을 골자로 했습니다. 아이러니칼 한 것은 비슷한 개혁이 한달 여후 중앙 정부에서 개화파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청군이 조선에 파병 되자 일본 또한 군대를 보냈습니다. 뜻 밖에 반군이 전주에서 철수하자, 조선정부는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미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고 이 계획을 하나 하나 진행 해 나갔습니다. 7월23일, 한양에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경복궁을 점령 했습니다.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 고종과 민비 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얼굴마담으로 하여 친일 개화파를 집권 시킵니다(경복궁 쿠테타). 이제 조선 정계의 세력 구도는 민비-친청 온건 개화파 에서 대원군-친일 개화파로 바뀐 꼴이 되었습니다. 민비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개화파와 대원군의 결탁이 눈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12년전 임오군란 때 청과 민비의 연합으로 권좌에서 물러 났던 대원군은 다시 절름 발이지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7월27일에 군국 기무처가 설치되고 소위 갑오 개혁이 시작 되었습니다. 한양에서는 군국기무처가 갑오 개혁, 호남에서는 집강소에서 동학혁명이 진행 되고 있었습니다. 1894년7월25일, 일본 군함은 이홍장이 심혈을 기우려서 만든 북양함대를 충청도 아산 앞바다에서 대파했습니다. 역사가 들은 이를 풍도 해전이라고 하고 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로 시작 된 이홍장의 양무개혁과 일본의 명치 유신이 조선땅 에서 그 결과를 증명하는 일전을 벌린 대리전쟁이 청일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반도와 같은 지정 학적 위치에서 취약하기 그지 없는 국력은 주위 강한 나라에게 전쟁터를 제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일 전쟁 외에도 임진 왜란, 러일 전쟁 그리고 한국 전쟁도 일종의 대리 전쟁 이었습니다. 7월28일 에는 성환에서 일본 육군은 청군을 섬멸 했고 청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여 전병력을 집중시키고 일전을 기다렸습니다. 8월26일, 경복궁을 접령하고 고종을 제압 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청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선이 제공 할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가난 한나라에서 무려 20만 대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했습니다. 일본은 평양 전투에 필요한 토지, 건물, 전신을 징발했습니다. 그리고 동학란을 조일합동으로 제압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9월15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조선 안에 있었 청군 병력과 본국에서 들어온 병력이 총 집결해 있는 청군을 대파 했 습니다. 한편 절름발이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원래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완전한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민비를 폐비 시키기 위한 공작을 했고, 손자 이준용이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 하게 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집권 한지 한 달 후에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수에게 친일 개화파를 제거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평양 전투 중에 이 서한이 일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믿을 수 없는 대원군을 퇴진 시켰습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기로우, 개화파 귀국 허용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청을 제압하자, 민비-친청-온건 개화파가 무너지고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 해 있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1894년 8월, 10년만에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 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에 임명 되었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이 군국 기무처 결정 사항을 잘 이행 하지 않는등 일본과 개화파를 좋아 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박영효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 했 습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을 지어 주고 대저택을 하사 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효를 다리로 일본 측과 친해져서 대원군을 밀어 내고 자기가 실권을 잡으려고 했던것입니다. 곧 원수 지간이 될 이들은 당분간 밀월관계를 유지합니다.

전봉준 체포

1894년 12월, 7 일간 계속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동학군은 섬멸 되고 전봉준은 체포되었습니다. 동학혁명은무려 20 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었습니다.

시모노 세키조약과 삼국 간섭

1895년4월17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토 히로 부미는 이홍장을 자기의 영토 인 시모노세키로 불러서 시모노 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첫번 째 조항은 “조선은 완전 무결한 독립국임을 선언 한다.” 였습니다. 적어도 조선 500 년 동안 계속 되던 중국의 종주국 노릇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하든 청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뜻이었 습니다. 그리고 청은 요동 반도, 타이완, 펑우 열도를 일본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6일 후 만주 진출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꼬두겨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 할 것을 요구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 할 만 한 해군력이 부족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 주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나라 전체가 “와신상담”이라는 말로 위로하며 억울함을 달럤습니다. 그리고 훗 날 러시아를 제압 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삼국 간섭 이라고 합니다.

민비의 친러 정책과 정동 파의 집권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것을 본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를 밀어 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동 구락부 라는 모임 소속 친러, 친미 정객들을 대거 입각 시켜서 친일 개화파를 밀어냈습니다.

이 정객 들을 정동파라고 했는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같이 조선에 온 손탁이라는 여인이 만든 사교 단체 정동 구락부 인사들입니다. 정동은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 손탁은 정동에 호텔을 운영하며 외교관들과 조선 정객이 어울 릴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친 구미, 반일, 친 민비 성향의 인사들이었습니다.

박영효 민비 시해 음모 실패와 일본 재 망명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들이 장악 하고 있는 군국 기무처의 힘에 밀려 나 자기 권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1894년 여름 부터 급진 개화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비는 러시아 공관과 접촉하여 개화파 말살 계획을 도와 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 이 계획이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접촉하여 민비살해계획을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씨모노 세끼 조약 후 삼국 간섭으로 대세가 일본에서 러시아 쪽으로 넘어 가자 민비는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 당을 쓸어버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박영효 귀에 들어 갔고, 1895년 7월,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 습니다.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을 찿아가 병력을 요구한 다음 유 길준에게 자기 계획을 알렸습니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믿었습니다. 왜냐면 유길준도 대원군과 같이 일본측과 접촉 하여 민비 제거를 계획 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유길준이 자기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은 고종에게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밀고 했 습니다. 7월6일 고종은 즉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박영효 체포령을 내렸 습니다. 이윤용은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고, 그는 즉시 담장 넘어로 체포령을 알린 다음 움직였습니다. 7월7일 포졸이 박영효 집에 도달했을 때는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작은 증기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공덕리 대원군 별장 아소당에 가택연금 돼 있었고 일본 공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비 시해 계획을 논의 했던 것으로 추측 됩니다.

유길준 대원군 파에게 포섭되다.

유길준은 일찌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등과 같이 수학 했던 개화파 중에 한 사람이었고,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근대 문명을 이해 할 수 있는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안은 유길준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합니다.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통해서 유길준을 포섭했습니다. 결국 유길준은 대원군, 이준용이 주도하는 민비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나 명성황후 암살 전후 까지 개화파 인사들은 그와 대원군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박영효의 민비 암살 계획 폭로 후 민비와 고종의 개화파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민비 시해 사건(을미 사변)

1894년 10월4일, 유길준이 의주 관찰사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의 지방관직 발령으로 이제 개화파는 전부 내각에서 축출 된 셈이었 습니다. 바로 그날 일본측은 대원군과 접촉 하여 10월8일 새벽에 거사할 것에 합의했습니다. 죽기 전 날 밤에 민비는 척족 민영준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 된 것을 축하 하는 연회를 베풀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민비를 살해한 장본인인 일본 낭인들은 진고개 파성관에서 한성신보기자 들과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낭인들은 일본의 열혈 애국 청년 들이었습니다. 인류 대학 출신들로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조폭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5년10월8일 새벽 5;30에 일본 낭인과 조선 훈련대 병력은 경복궁으로 침입 하여 침전인 옥호루에 있는 민비를 시해했습니다.민비를 칼로 벤 장본인은 물론 일본 낭인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일본 병력을 지휘한 인물은 일본 공사 고로였고 조선 병력을 지휘 한 장 본인은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 이었습니다. 우범선은 임오군란 직전에 신식군대 별기군 교관 이었는데, 그는 중인 출신이었고 생도들은 양반 집 자제들이었습니다. 생도들은 교관에게 반발을 했고 교관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생도들을 모아 놓고 장황한 연설을 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친일 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훈련대 대대장을 맏게 되었으나, 고종과 민비는 훈련대를 해체하려고 했습니다. 불만에 찬 우범선을 고로가 포섭한 것입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 해 있던 우법선은 자객 고영근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는 우범선의 아들 입니다.

거사날 새벽 3시, 공덕리 별장을 습격한 일본낭인들은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옷으로 변장한 후, 반 강제로 대원군을 대리고, 훈련대 병사 들과 같이 경복궁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민비 시해 직후, 친일 내각 재 집권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힘입어 친러 정책으로 정권을 잡았 던 친러파는 민비가 대원군-개화파-일본에 의해서 제거 되자, 일본은 일단 대원군을 떠 받들고 개화당 인사 들을 대거 재 집권 시켰습니다.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이 물러 나고 만년 재상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박영효, 서광범등이 다시 내각에 들어 오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 됬습니다.

고종 공포에 떨다.

민비가 정적인 대원군과 개화당 그리고 일본 세력에 의해서 사살되자 고종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자기 주위에는 자신이 물리 치려고 했던 세력이 에워 싸고 있었습니다. 일본 공사는 고종을 위협 했고, 대원군이 자기를 죽이고 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언도우드 부인이 직접 가지고 온 음식만 먹었습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식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서재필 귀국

민비가 시해된지 두 달 여 만인 1895년12월25일 미국으로 망명 했던 서재필이 귀국했습니다. 갑신 정변이 실패 한지 무려 11년 이 지난 후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백인아내와 결혼한 미국시민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미국시민이었고 미국의사였다.

1895년, 쌘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는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했으며 주말에는 교회에 나갔 습니다. 교회 신자의 소개로 탄광업으로 돈을 번 독지가인 John Hellenbeck을 알게 되었습니다. 1886년9월에 헬렌벡은 서재필을 펜실바니아 주 윌키스 바레에 있는Harry Hillman Academy 고등 하교에 입학 시켜주었습니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도 헬렌벡이 지어주었습니다. 22살은 동료들 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언어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 학교를 졸업하여, 학생 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준비 과정인 콜롬비안 대학 예과 코크리안 스크울 야간 부에 입학했습니다. 예과를 마치자, 헬렌벡은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 선교 활동을 할 것을 권유 했습니다. 이것을 서면으로 약속 하면 학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부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대역죄를 지은 망명객이어서 돌아 가면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을 것이고, 7년 후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그는 법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미 입학 허가가 나온 라파얕 대학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여 학비를 조달 할려고 했으나, 학 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운 좋은 서재필

워싱톤에 있는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 일본과 중국에서 수집한 의학 서적 5000여권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있었는데, 적임자는 일본어,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 해야했습니다. 모교인 힐맨 아카데 교장 댁을 방문하고 있던 모 교수가 서재필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는 도서관장 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이 소개장을 들고 도서관을 찿아 가자, 성경 구절을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문과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 했고 이미 크리스찬인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무려 월급 120불이라는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것에 만족 하지 않고 콜롬비안 대학 의학부 야간반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의 조지 워싱톤 대학 전신으로 워싱톤 D.C. 에 있었 습니다. 1892년 3월, 조선인 최초로 미국의사가 되었 으니, 나이 28 세였습니다.

Muriel Marry Amstrong 과 결혼

그는 1890년6월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1894년 개업 의사로 일하던 때에 뮤리엘과 결혼했습니다. 미국 15대 대통령 뷰캐넌의 누이의 딸 이었습니다. 누이의 남편은 조지 암스트롱이었고 그는 미국 철도 우편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천만리 타국에 온 서재필은 이제 미국 시민, 의사 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결혼 식에는 미국에서 이렇다 할 저명 인사 200 여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가 15세 때 조선에서 맞이 한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 씨를 생각 했을까? 젊은 혈기에 저지른 역적 행위로 그 부인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2살 난 아들이 굶어 죽었음을 상기 했을까? 여러 분들의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의 복권과 귀국 과정

법무대신 서광범은 서재필을 복권시키고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1895년 가을에 워싱톤을 방문한 박영효를 만 나고 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1895년11월10일,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하와이, 일본을 경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 정부에서 주는 모든 관직을 거절 하고 충추원 고문직을 수락했습니다. 당시 조선 공사이면서 충추원 고문인 미국 인 알랜과 똑 같은 자격으로 고종을 보좌 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귀국한 서재필의 태도

조국은 그를 버렸습니다. 본인이 반역 죄인이라하여 아무 죄없는 가족과 친지를 죽이거나, 투옥 시켰습니다. 재산을 몰수당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망명한 그를 죽이려고 고종은 끈질기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딱지는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이 절실 한 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갑신정변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나 조선 사림들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연설은 반드시 영어로 했습니다. 물론 통역을 항상 대동했습니다.

전처와 생모의 산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서 평민이 되어 버린 양 아버지가 찾아 왔으나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거지가 된 장인이 찾아 왔으나 모른척 했습니다.

고종을 만나러 갈 때 양복을 입고 읍소 하지 않고 악수로 인사 했습니다. 왕을 알현 할 때는 안경을 착용 할 수 없는 데도 안경을 벗지 않고 고종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을 사용 하지 않고 필립 제이슨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습니다. 서재필이 쌘프란시코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돈을 보내 주었 던 윤치호는 일기를 매일 썼습니다. 1898년1월15일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는 서재필이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윤치호가 왜 영어만 쓰냐고 물으니 한국말을 다 잊었다고 대답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서재필의 태도는 동료 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정부 관료로 있는 윤치호와 유길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순 한글 신문인 독립 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서 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 한 원인을 민중이 우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민계몽에 총력을 기울렸습니다.

1896년4월7일, 순 한글과 영어로 된 독립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한글 띄어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글 3면, 영어 1면 이었습니다. 교육 확대, 산업 발전 강조, 의무교육, 과학 기술 도입, 식 생활과 위생 개선등을 주장했습니다. 중립외교를 주창했습니다. 유길준의 의견이 반영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 내외의 사정,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을 보도했으며, 뇌물 수수, 관리들의 부정을 비판했습니다.

신문이 순 한글로 발간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고 생각 합니다. 서재필이 얼마나 조선의 근본적인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황금 빛의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만들었다고 하는 한글은 자타가 공인 하는 세계에서 제일 과학 적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이 한글이 무려 500년 가까이 일반 백성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 교과서, 정부, 심지어 한글 박물관에서도 지적 해 주지 않고 “위대한 글자”라는 것 만 강조 합니다.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된 것은 대한제국 선포 된 후였습니다. 그 전에는 모든 문서, 책등은 거의 전부가 한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양반 집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자연히 백성들이 우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한 장 사서 서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아니 글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인 1945년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 인구의 겨우 27% 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오죽 했겠습니까?

독립문 건립

지금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 근처에 영은문이 있었고 이문을 통과 하면 모화관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영은문을 통과하면 모화관에서 조선 대신들이 그들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청이 조선 보다 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시설이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이 일본이나 서양 제국에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오랫동안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 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빨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 해야 나라가 발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 영은문 대신 독립문 설립을 추친했습니다.

독립협회 결성

독립문 건립을 추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1896년7월2일에 이완용,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등과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결성했습니다. 1897년11월20일, 개선문 축소판인 독립문이 영은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1200년 동안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 한다.”라고.

서재필이 주도 했던 독립신문, 독립문, 독립협회의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 인식 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재필의 청년 계몽

서재필은 매주 배재 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인권개념, 사회계약론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등이 서재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협성회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토론대회를 여는 등 청년들에게 토론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만민 공동회

독립문 건립을 의해서 관료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 협회를 시민 단체로 전환 하고 대중 토론회를 주관 했는데 이를 만민 공동회라고 했습니다. 토론회는 전국을 순환 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897년11월1일에 열렸던 제8회 만민 공동회는 노비 해방운동이 주제였습니다. 많은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 중에 대표가 찬,반 성토를 한 후 윤치호가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성토 하고, 서재필이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참상을 설명 한 후에 투표에 붙여서 다수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주장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입헌군주제를 주장 했습니다. 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하여 그 권한을 내각이 갖게하고 충추원을 의회로 바꾸자고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일본과 보수 세력 그리고 고종이 반대 하여 실현 되지 못했습니다.

아관 파천; 친러파의 쿠테타

권력은 친일파 개화당에게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화당, 대원군과 내통하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후에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씨워서 나쁜 국제 여론과 조선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들의 증언으로 여론은 일본측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러는 중에 대원군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음은 개화당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화당이 추진한 단발령은 친일 개화당에게는 치명 타였습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친러, 친미 정동 파들은 이러한 반일, 반 개화의 국민 감정과 고종의 공포에 떠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종을 외국 공관에 모시고 자기들의 정권 탈환을 계획 했습니다. 미국 공관으로 고종을 모시려고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춘생문 사건). 이범진과 심상훈은 러시아 공관과 긴밀하게 연락 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 모시는 데 성공했습니다. 1896년2월11일에 일어난 사건이고 아관 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을미사적 전원을 살해 할 것을 명령 합니다. 을미사적이라 함은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 된 대신들을 지칭 하는 것이었고 친러 파의 정적 개화파들이었습니다.

총리 대신 김홍집, 탁지부 대신 어윤중, 통상부 대신 정병하는 피살 되고 내무대신 유길준, 법무 대신 장박, 군부 대신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어려운 때마다 정파에 크게 관계 없이 내각 수반을 맏았던 김홍집은 길 거리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은 후, 군중이 그의 시체를 한 동안 끌고 다니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1890년대 중반의 조선 사회상

매관 매직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할 정도로 성했습니다. 갑오 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심해졌 습니다. 궁핍한 왕실예산을 충당 하기 위해서 왕도 벼슬을 팔아 먹었습니다.돈을 들여 관직을 받으면 부임 지 백성들을 착취하여 축재를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 놓은 소위 반상 제도는 조선 건국 이래 국가 구조의 근간 이었습니다. 1890년 대에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얼마 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양반 인구는 약 2%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 됩니다. 아무튼 소수였던 것은 분명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양반들이 소유 하고 있던 노비 인구가 30-40% 였다는 것입니다. 노비 제도는 19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이완되어 그 수가 19세기 말에는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재산 목록 이었고 사고 팔기도 했습니다. 나머지가 보통 사람 즉 상인 이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은 극 소수 양반의 착취 대상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1882년에 연해주 한인 인구가 만여명이었는데 러시아 사람은 겨우 8385명이었다고 합니다. 1897년에는 15년 전의 두 배가 넘는 2만 5천명이 되었습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연해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 하면서 조선인들의 생활 상을 관찰 했습니다. 그의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특권계급의 착취, 가혹 한 세금, 정의 부재, 쇠약해진 군주, 미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운 나라”라고 서술했습니다. 발전 할 수 없는 형편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 하여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뀝니다. “조선 사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이익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제도와 과도 한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지도자가 다스린다면 언젠가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했습니다.

고종의 경운궁 환궁 (1897년3월4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든 정사를 그와 상의 해서 결정했습니다. 웨베르는 많은 이권을 따 내는 대신 고종에게 친절 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100일,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시덥지 않게 변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서로 나누어 먹으려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선에서 분활 하여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가 관장할 것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습니다. 운명의 38선 아디어는 일본이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요구, 러시아의 푸대접, 왕 호위병 훈련완료 등 여건이 마련 되자, 고종은 외국 공관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탄생

1897년10월12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등극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 했습니다. 대한이란 말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22일에 민비 시해 2년2개월 만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요지음 돈으로 무려 110억이 소비됬다고 합니다.

대원군 사망

1898년2월22일, 주상이 보고 싶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대원군이 사망 했습니다. 며느리 장례식이 치루어 진지 일년여 만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원군의 약력은 조선의 운명사이다. 조선은 완전한 유교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오랜 역사의 반복과 다름 없다. 지금의 세계대세로 보면 조선은 유교국의 최저를 유지 하는 데도 모자란다. 대원군은 이러한 유교국가의 명군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 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처다보았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아들을 철저히 이용했고 아들의 아내까지 죽인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재필 다시 미국으로

1898년5월, 서재필은 귀국한지 2년 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국수주의적인 생각과 왕의 권력을 제한 하려는 입헌 군주제 주장은 러시아는 물론 모든 외국 세력들과 고종에게 도전하는 것들이었 습니다. 특히 미국 공사 알랜과도 서재필은 사이가 좋지 않 았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외국 공사들의 부당 한 조선이권 취득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이들이 좋아할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종 앞에서의 예의 없는 행위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행동등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양반 고위 관리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 하는 독립신문의 논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미국공사 알랜은 공사이면서 고종의 고문 이었습니다. 그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이권에 개입했던 사업이 많았습니다. 서재필은 알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재필에게 귀국 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미국에 있는 서재필의 장모에게 자신이 위독 하다는 전보를 서재필 부인 뮤리엘에게 보낼 것을 요청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보를 받은 뮤리엘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조선을 떠났습니다.

미국 귀환 후 서재필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원선 군의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의대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일을 그만 두고 문방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3월1일, 조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일을 모르던 조선 사랍들이 이제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금을 써서 1924년에 파산 선고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연 했는데, 마침 유한주식회사를 만든 유일한 씨가 1925년에 서재필에게 사징직을 맡겼습니다. 유한양행의 유명 한 버드나무 로고는 서재필의 딸 뮤리엘이 도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 병리학 전문의

1926년, 62세의 고령으로 펜실바니아 의대에 입학 하여 병리학을 더 전공 했습니다. 1929년에 조선인 서재필은 최초로 병리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 약 4년 동안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 하여 미의회로 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쿠테타 군을 지휘하여 고종에 반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 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해방과 죽음

1945년, 해방후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 할 만한 인물을 물색 하던 중 김규식의 추천으로 서재필을 초청했습니다. 1947년에, 서재필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정치 참여를 종용 했으나 모두 거절 하고 미국인 자격으로 미군정 고문관으로 일하다가 1948년9월에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조국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 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풍운아 서재필은 후두암과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투병 하다가 1951년1월5일 향년 88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유골은 화장 되어 필라델피아 안장되어 있다가 감신정변때 노비의 등에 업혀서 살아남았던 조카의 아들인 전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서희원 교수와 종친회에 의하여 1994년 국립묘지에 묘셔졌습니다.

결론

우리가 이제 까지 알고 있는 역사는 지나치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악으로 강조 하고,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취약한 국력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추어서 자존심을 살리기에 치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결코 명성황후 오페라나 연속극에 나오는 지혜로운 국모가 아니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라 살림 보다는 부정 축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동 시대의 옆 나라 서 태후에 버금가는 나쁜 왕비였습니다. 전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고 후자는 작은 청 나라인 조선을 일본에게 먹히게 한 많은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은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거의 죽을 때까지 유지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 이었습니다. 그의 끈 질긴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민비 시해에 깊숙히 관련하게 했습니다. 철 없는 젊은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철저히 이용 당했습니다. 그들은 청이 조선 망국의 원인 이라고 굳게 믿었고 일본 세력을 빌려서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게 했으나,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데는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일본, 개화파, 대원군은 모두 민비가 걸림돌이었습니다. 뇌화 부동 할 소지가 농후했습니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은 권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주어진 인생을 한 순간도 낭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생각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능한 고종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애증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좀 더 계몽된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조선이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부를 때 마다 돌아와서 성의 껏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만한 인생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직시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풀린 자존심은 현 세대를 교만하고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

제27차 평의원 회의 보스턴에서 성황리에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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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김원영 편집장] 제27차 미주동창회 평의원 회의가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보스턴 근교 Crowne Plaza Boston-Natick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미전역 총 134명의 전체 평의원 중 51명의 평의원이 참석하였고, 위임장 40명, 대리 참석 2명 등 모두 93명의 성원이 회의에 참석했다.

윤상래 회장은 환영사에서 "미주 동창회는 모든 임원의 희생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잘 운영되고 있으며 재정적으로도 매우 양호하다. 이는 우리 동창회를 사랑하시는 평의원 여러분과 미주 동문의 뜨거운 후원의 결과"라고 말하고, "이런 현실적 만족에 앞서 앞으로의 백년대계를 위한 꿈과 계획이 서 있어야 하고,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만이 우리가 선택한 이 땅에 영구히 미주동창회가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신수정 총동창회장은 민경업 상임부회장이 대독한 격려사에서 "동창회 조직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돌파해 나가겠다는 당당함. 선배들의 유산을 계승·발전시켜 후배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책임감. 거대한 대륙 속에서 조국과 모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역사의식까지. 그 결의가 여전히 미주동창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먼곳에서도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그 열정을 보며 고국의 많은 분들이 큰 위안과 격려를 받고 있음도 꼭 전해드린다."라고 말했다. 이번 평의원 회의에는 모국에서 민경업, 최병갑 총동창회 부회장, 이효원 발전기금 상임이사, 김태일 기금 본부장이 참석했다.

본 행사는 15일 전야제(기사 참조), 16일 평의원 회의 오전, 오후 세션(기사 참조)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15일 전야제가 있기 전 이번 행사를 위해 초빙된 클레어몬트 멕키나 대학 이채진 교수의 "한반도의 통일은 가능한가?" (P 18 참조)와 모국 국방부 김경욱 과장의 "북한의 핵 미사일 능력과 우리의 대응전략"(회보 2018년 3월호 P 20 참조) 이라는 주제의 두 강연이 있었다. 이채진 교수는 판문점 선언과 미북 정상회담의 평가와 전망, 통일은 필요한가?라는 테마로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집중 조명하였다. 김경욱 과장은 강연에서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 수준 및 전망, 우리 대응 전략의 기본 개념, 한미 연합 억제·대응 태세 등을 소개하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의 실체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반까지 오전 오후로 나눠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평의원회의가 1차년도 사업, 재무, 모교발전기금, 종신이사회비, 감사 보고, IRS 규정 안내, 2차년도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 심의, 기타 안건 토의 등 시종 열띤 토론을 하며 진행되었다. (P 5, 21, 22, 23, 24 전체 회의록 참조)

16일 저녁에는 이번 행사의 주요 연사로 초빙된 세계 약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College of Pharmacy UGA 대학의 주중광 교수가 “The Big Picture (Future of the USA)”라는 타이틀로 강연을 했다. 주 교수는 과학자의 시각으로 그동안 미국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 공부해 왔던 주제인 “미국은 어디로 가는가? 미국은 계속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사향 길에 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과학적 통계와 역사에 나타난 사실을 예로들며 미국의 장래를 풀어냈다. 주 교수는 결론에서 “미국은 현재 세계를 리드하고 있고 앞으로도 리드할 것”이라며 그 이유로 “미국은 1. 대학과 학문의 번영, 2. 이민 유입, 3. 에너지 혁명, 4.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5. 다양한 문화 흡수, 6. 인공 지능의 발전, 7. 국가간 공존 번영 의지 등 일곱가지의 원동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조 강연이 끝난 후, 모국에서 미주평의원 회의 축하 공연을 온 모교 음대생들의 국악 공연이 펼쳐졌다. 연주자들은 정세연 (판소리 05), 김도연 (가야금 10), 신지희 (거문고 13), 이헌준 (대금 11), 윤하림 (해금 07), 김수연 (타악 14) 등 6명이 공연했다. 오랜만에 우리나라 전통 국악의 향연을 미국땅에서 즐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성낙인 모교 총장이 수여하는 공로패 수상식에서 영광부문상은 김진형 (문리 54), 김은한 (의대 60) 동문이 수상하였고, 학술부문상은 이채진 (문리 55), 송창원 (문리 51), 참여부문상은 이병준 (상대 55), 고일석 (대원 69), 사회기여부문상은 이전구 (농대 60) 동문이 수상했다. (신수정 총동창회장상, 윤상래 미주동창회장상 등 전체 수상자 참조)
제14대 미주동창회 집행부는 제1차년도(July 1, 2017~May 15, 2018)에 총수입 $292,885.50에 $182,125.64을 총지출하여 $110,759.86의 순수익금을 냈다. 제2차년도(July 1, 2018~June 30, 2019)에는 총수입 $203,000 총지출 $191,100을 하여 $11,900의 순수익금을 낼 것으로 보고했다.
마지막 날인 6월 17일 일요일엔 보스턴 지역 관광 투어가 있었다. 26명이 참가하여 뉴햄프셔 햄프톤 비치를 방문했고, 지역 명물인 랍스터로 식사도 하며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세계경제의 명과 암 _ 백순 (법대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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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4분기를 지내면서 세계경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경제계에 적지 아니한 논난이 일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감세정책과 관셰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경제에 대하여 밝은 면(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어두운 면(암)이 있다고 제창하는 의견이 팽팽히 맞 서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겠다.
세계경제의 움직임은 크게 나누어 미국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경제와 발전도상에 있는 뜨는 경제의 향방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 경제계의 중론으로 제창되고 있다.
즉 2018년 이후 얼마 동안 주로 미국경제와 뜨는 경제가 계속 현재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이 세계경제의 밝은 면(명)을 예측하고 있으며, 반대로 미국경제와 뜨는 경제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상황으로 판단해서 세계경제는 어두운 면(암)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현재 미국경제는 2.8%의 성장율과 3.8%의 실업율을 들어 내고 있지만 얼만전 연방준비은행의 발표는 미국경제의 전망은 낙관적이며 어느 경제예측가들은 2/4분기이후 미국경제가 4%정도의 성장세를 보여 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또한 뜨는 경제의 대표적인 경제인 중국과 인도가 각각 6.8% 내지 7.7%의 고도성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세계경제의 밝은 면을 제창하는 견해를 뒷 밭침하는 근거는 두가지이다.

첫째 밝은 면의 근거는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와 지출 증대 정책이다. 기업감세정책과 인프라 지출 정책은 국민경제 성장의 기분 틀인 기업가 정신을 부축이는 효과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밝은 면의 근거는 근래 계속 올라가고 있는 석유 값의 상승이다. 석유 값의 상승은 현대산업생산의 기본 생산요소인 석유자원, 특히 미국의 쉐일개발을 위한 투자를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세계경제의 어두운 면을 제창하는 주장은 미국경제가 현재 3%이하의 성장율을 넘기지 못하고 어쩌면 2%이하로 떨어질지 모르며,그리고 뜨는 경제들도 침체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견해이다. 두가지의 근거를 비관론은 제시하고 있다.

첫째 어두운 면의 근거는 트럼프의 관세정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15일이후 중국으로부터 4천5백억달라 상당의 수입상품에 대하여 최고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였고, 유롭연합에 대하여 철강 및 알리미늄 수입관세를 높이기로 하였으며, 카나다와 멕시커에 대하여 북미자유무역협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미국의 무역적자(중국으로부터 수입이 중국에 수출의 4배)를 줄이고 국내기업을 활성화한다고 하는 미국제일주의 장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관세정책은 상대국가들의 보복관세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미국경제뿐만 아니라 상대국가경제, 특히 뜨는 경제에 적지 아니한 부정적 효과를 결과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부정적 효과는 세계경제가 자급자족경제(Autarky)로 빠지게 되어, 미국경제는 중국경제와 연관되어 있는 공급연쇄체계(Supply Chain System) 가 무너져 오히려 5십5만의 실업자를 결과하게 된다는 예측이 있다. 또한 중국경제도 GDP의 3%에 달하는 미국경제와의 무역흑자가 살아지게 되어 국민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둘의 부정적 효과는 세계경제가 새로운 중상주의(Mercantilism)에 몰입하게 되어 경제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심각한 경쟁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 국가주의(Nationalism)가 제창되어 경제대공황의 미끼를 마련하게 된 역사를 트럼프의 관셰정책이 환기시키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은 근래 유롭과의 경제관계연관을 위하여 새로운 실크 로드를 건설하고 있으며, 경제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저개발경제에 투자를 증가 시키며, 인접국가 특히 한국과 일본과의 교역확대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어두운 면의 근거는 미국이자율의 상승과 달라의 인상이다. 얼마전 미국연방준비은행은 이자율을 1.75%-2.00%로 0.25%을 올렸으며 금년내로 2번정도 상승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금리상승으로 인한 금융경색과 달라고가는 미국의 자본시장에 압박을 가할 뿐만아니라 특별히 뜨는 경제에 경색을 가하게 되어 세계경제에 침체의 가능성을 결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근 뉴욕증시와 뜨는 경제의 증시가 계속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 이러한 경제상황전개를 예축하게 하는 전조인지 모를 일이다.

트럼프의 감세 및 지출정책과 석유값상승을 근거로 미국경제와 뜨는 경제가 현재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세계경제의 밝은 면(명)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트럼프의 관세정책과 금리상승 및 달라고가로 인한 미국경제와 뜨는 경제가 자급자족경제 및 상업주의경쟁에 돌입하게 되어 세계경제가 어두운 면(암)에 빠지게 될 것인지, 매우 흥미로운 전망이 될 것이다.

트럼프의 감세 및 지출정책 대 트럼프의 관세정책, 석유가의 상승대 금리상승 및 달라고가, 이러한 두가지 측면의 상반된 경제현상이 세계경제전망에 어떠한 결과, 즉 밝은 면(명) 대 어두운 면(암)을 가져 오게 될 것인지는 각각 상반된 경제현상의 실현크기와 정도에 달려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전 미국 노동성 선임경제학자
워싱턴 버지니아 대학교수

미국 건국 정신 “독단 버리고, 오픈 마인드 실험주의 정신 추구” _ 정태영 (문리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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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기념일의 역사적 의의

미국 건국 정신 “독단 버리고, 오픈 마인드 실험주의 정신 추구”

 

‘민주적 전제정치’로 가는길 막는 것은 오직 ‘자유에 뿌리를 둔 사회’

177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지 240여년이 지났지만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상념했던 이상은 아직도 유효하다. ‘자유에 바탕한 나라’ 그것이었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가 신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설계할 때 특별히 주목한 것은 토마스 홉스, 죤 로크로 이어지는 계몽사조(사회적 계약론)이었다. 홉스나 로크나 모두 당시 지배체제의 근간이었던 왕의 권리가 ‘신이 내려준 것(왕권신수설)’이 아니라 인민들이 준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른바 계약론이다. 당시 이러한 사상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홉스는 역작 ‘리바이던’ 을 쓰고도 왕따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① 로크도 왕이 폭군이면 인민에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시민 정부론’을 이름을 감추고 썼고 한참 동안 출판 조차 할 수가 없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목표한 나라는 ‘왕이 없는 나라’ ‘절대적으로 확립된 신조(信條)’ 같은 것이 없는 나라였다. 당시 유럽은 도그마티즘 즉 독단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신의 굳은 신념하에 쌓아 올린 체제에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그러한 도그마를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 정신과 자연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실험주의 정신이 충만한 오픈 마인드 정신을 견지했다. 이렇게 탄생한 미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은 의심없이 세계에서 첫번째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민자에 의해 건설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인종과 종교적 다양성, 그리고 지리적으로 자유로운 이동성, 경제적으로 계층 사다리의 개방과 기회 제공, 자유로운 이동성 등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모든 인민들은 계층간의 이동성을 굳게 믿었다. 미국은 이렇게 성공한 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미국을 분석하거나 연구할 때 비껴갈 수 없는 인물이 알렉시 드 토크빌이다. 2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저작은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system)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의 관점에서 바라본 점에서 당시대의 다른 연구자들과 달랐다. 그는 민주주의가 신대륙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관찰하고 ‘미래의 민주주의’ 향방을 분석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민주적 전제정치(Democractic despotism)’이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을 평등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평등이 진전됨에 따라 모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된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1인 통치자는 사상 전례없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가 말하는 ‘민주적 전제정치(Democractic despotism)’ 가 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이 중앙집중화되는 과정을 토크빌은 그의 저작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대한 민주혁명이 일어난 초창기에 계급들 사이에 전쟁이 막 벌어졌을 때, 인민은 현지 업무의 통할권을 귀족계급으로부터 빼앗아 내기 위해서 공공행정을 중앙정부의 수중에 집중시키려 애를 쓴다. 이와 반대로 혁명이 끝나갈 무렵에는 일반적으로 패배한 귀족계급이 모든 업무의 통할권을 국가에 맡기려 애쓴다. 왜냐하면 귀족계급은 자신과 동급이 되고, 심지어 자신의 주인 노릇을 하려드는 인민이 조금이라도 폭정을 일삼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제2권 제4부 4장)

그는 “아메리카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아메리카와 같은 민주적인 사회 상태는 전제정치가 확립되기에 특별히 유리한 기반을 조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아메리카 민주주의’를 쓴 저작 동기 중 하나를 ‘민주적 전제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그 극복 방안으로 ‘자유’에 의존했다. 영국처럼 자유 제도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보다 보장되는 부드러운 전제정치로 나간다. 반면 유럽처럼 자유의 역사적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는 절대적 전제정치로 나간다고 보았다.

토크빌 이후의 역사를 보면 유럽 대륙에선 뭇소리니, 히틀러 등을 위시한 전체주의 국가, 스탈린의 쏘련 독재국가 등이 출현된 반면, 영국에서는 맑스가 그토록 기대했던 공산주의 혁명 희망이 비껴갔다.

토크빌은 미국 사회는 영국의 자율 및 자치, 자유 정신을 이어받아 개인 및 하부 단계에 자유와 자치의 여지가 남겨져 있다고 당시 아메리카 민주주의 상황을 분석했다. 바로 그점 때문에 아메리카에서는 ‘민주적 전제정치’ 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는 아메리카에는 ‘자유진보적이지만 혁명적은 아닌 집단 (liberal but not revolutionary party)’ 이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면서 한국에 눈이 돌아간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 잠재하던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노조 운동을 시작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후 지난 30여년 동안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토크빌의 분석틀을 한국에 적용하여 보면 한국은 현대판 ‘민주적 전제정치’에로 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전망이 나온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토크빌이 지적한 (서구식) 자유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

“권력은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조여간다” 는 말이 떠오른다.

***주 ①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기적인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이기심과 충돌한다. 홉스는 이러한 상황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각자는 타인의 이기심과 자기의 이기심이 충돌하지 않도록 계약을 맺었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계약도 지켜지지 않으면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칼을 갖지 않은 계약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리바이던 제17장)”고 했다. 그리고 계약을 강제시켜줄 존재로 국가를 상정했다. 그는 국가를 성경 욥기에 나오는 거대하고 전능한 짐승인 ‘리바이던’ 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를 지켜줄 존재로 군주제를 옹호했다.

그런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문제였다. 이전의 왕권신수설을 깡그리 무시하고 왕권의 정당성이 인민의 계약에서 출발한다고 설파했다. 이것이 왕당파의 비판을 샀다. 홉스의 논리는 군주제가 의존하고 있는 충성과 경의, 정서 등을 모두 약화시키는 철저한 용해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로부터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또한 그는 당시 왕당파와 대결중인 의회주의자들로부터도 배척당했다. 그의 저작 목적이 왕당파를 옹호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적대적인 두 세력 모두에게 왕따 당한 이유이다.

결국 종국에 그의 저서는 출판금지가 되었다.

<논설위원>

제27차 보스턴 평의원회의 전야제 (6/1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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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김원영 편집장] 15일 오후 1시부터 제27차 평의원 회의 등록이 시작되었다. 2시부터 5시까지 이번 행사를 위해 초빙된 클레어몬트 멕키나 대학 이채진 교수의 "한반도의 통일은 가능한가?" (P 18 참조)와 모국 국방부 김경욱 과장의 "북한의 핵 미사일 능력과 우리의 대응전략" (회보 2018년 3월호 P 20 참조) 이라는 주제의 두 강연이 있었다.

전야제는 15일 금요일 6시, 이상운 (수의대 87) 사무총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윤상래 회장의 환영사와 박영철 뉴잉글랜드 지부 회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윤상래 회장의 미주동창회 14대 임원단 소개 후, 미주동창회장 표창패, 공로패 수여식이 열렸다.

봉사상에는 서병선 (음대 65), 구자동 (상대 70) 동문, 감사상은 백순 (법대 58), 박종수 (수의대 58), 한재은 (의대 59), 참여상은 제영혜 (가정 71), 공로상은 김원영 (미대 81), 배지선 (수의대 94), 황보민영 (공대 03) 동문이 수상했다.

이어서 뉴잉글랜드 동창회장 공로패 수여식과 장학위원회 (윤상래, 김용구 공동위원장)가 주관하는 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장학위원회는 미국내 대학에서 수학하는 동문의 학구열과 지도자 자질을 증진, 격려하는 목적으로, 모교에서 수여하는 학위를 이수한 후 미국내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동문을 대상으로 장학생을 선발한다. 올해는 모두 11명의 동문이 수혜를 받았다. (수혜자 명단 참조)

저녁 식사를 부페식으로 마친 후, 이상운 사회자의 제안에 따라 참석 평의원과 지부 소개는 각 테이블에서 제일 학번이 어린 동문이 일어나 그 테이블에 앉은 선배 동문을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모두 화기애애한 가운데 반갑게 서로를 알리는 시간이 되었다. 행사 주최측은 작년처럼 보스턴의 명물인 랍스터의 인형을 준비하고 재미 있는 넌센스 퀴즈 게임을 진행했다. 이미지로 단어 맞추기 게임으로 뇌에 자극을 주어 자칫 지루하기 쉬운 분위기를 새롭고 즐겁게 유도했다. 매년, 미주 동창회의 평의원 회의에 총동창회 임원단이 참석하는데, 올해에는 모국에서 민경업 총동창회 상임부회장, 최병갑 총동창회 부회장, 이효원 발전기금 상임이사, 김태일 발전기금 본부장이 참석했다. 토요일 평의원 회의 점심을 ‘모국 총동창회장의 평의원 환영 오찬’으로 명명하여 작년처럼 제27차 평의원 회의를 후원하여 주었다.

이번 평의원 회의에는 남가주, 북가주, 뉴욕, 뉴잉글랜드, 시카고,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조지아, 하트랜드, 커네티컷, 오하이오, 한국에서 부부동반으로 100여 명이 넘는 동문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전야제는 예정된 시간을 넘기게 되어 다음날 평의원회를 감안해 전야제가 끝나고 하기로 한 지역동창회 회장단 모임은 적당한 시간을 정해 하기로 했다.

  • 미주동창회 표창패, 공로패
    서병선 (음대 65), 구자동 (상대 70), 백 순 (법대 58), 박종수 (수의대 58), 한재은 (의대 59), 제영혜 (가정 71), 김원영 (미대 81), 배지선 (수의대 94), 황보민영 (공대 03)
  • 미주동창회 장학생
    이충호 (Juilliard School), 유상옥 (U. Minnesota), 제갈소망 (USC), 이종욱 (U. Minnesota), 강유진 (U. Minnesota), 이나래 (U. Minnesota), 이상민 (U. Minnesota), 유종은 (U. Michigan), 김슬아 (U. Maryland), 백 솔 (U. Maryland), 김수지(U. Wisconsin)
  •  뉴잉글랜드 장학생
    Chris Jun, Hayeun Kim, Jinyung Suh, Seongjun Park, Stephanie Park​
  •  뉴잉글랜드 동창회장 공로패​
    김선혁 (약대 59)​, 정태영 (문리 71), 김제성 (공대 87), 이상운 (수의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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