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018년 서울의대 미주 동창회 하계 컨벤션 강의 초록)
이 세사람은 19 세기 중반에서 19세기 말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초점은 민비가 어떻게 시해를 당하게 되는가에 맞추겠습니다. 민비는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대원군과 개화당을 정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일본과 결탁하여 민비를 제거하게됩니다. 서재필은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써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고 미국시민이 되어 생애를 마치신 분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어느때보다 어려운 그 시기에 어떻게 인생을 꾸려갔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 세기 중엽은 어떤 세상이었던가?
1840-1860 년 사이에 벌어진 1,2 차 아편전쟁은 세계의 질서가 중화 – 오랑캐 구도에서 문명-야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교를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이룩한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의 최강국이었고 세상의 중심은 중국(중화)이고 다른 나라는 모조리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구조의 하나로 종주국-종속국 관계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유롭과 미국은 계몽사상과 산업혁명를 거처서 근대국가로 변신 합니다. 중국의 낡은 제도는 부패해 갔고 산업화된 신흥구미국가들은 문명국-야만국 구도를 앞세워 침략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문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습니다. 쓸어저가는 공룡 중국은 구미 국가의 이권 찬탈로 외환을 앓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안으로는 수많은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난리가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홍수환은 자신이 하느님의 둘 째 아들임을 자칭하고 예수교의 평등교리를 앞세워 남녀평등, 토지균등 분배등을 주장하고 약 14년 동안 중국의 거의 반을 지배했던 사건입니다.
이 난을 제압한 인물이 이홍장입니다. 이 공으로 이홍장은 청나라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력 자가 됩니다. 그리고 망해가는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를 양무운동이라고 합니다.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민비-온건 개화파가 이 양무운동을 답습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합니다.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정권은 천황을 정권의 전면에 내세워 입헌군주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서양과 똑 같은 나라를 만드는 개혁을 했습니다. 양무운동이 절름발이 개혁이었다면 명치유신은 완전무결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주도한 사람 중에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는 명치유신같은 개혁을조선에서도 이룩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국의 이홍장,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등장할 무렵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합니다.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망국으로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실학을 바탕으로한 개혁이 정조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여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씨 왕조라기 보다는 김씨 왕조였습니다. 대원군은 이 씨왕권을 되찾으려는 기회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다가 철종이 죽을 무렵 안동 김씨와 대립관계에 있던 조대비(선정 왕후)와 접촉하여 12 살 난 자기 둘 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에 나섭니다. 1864년1월이었습니다.
정권을 거머쥔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당한 세금제도를 바로잡고 매관매직을 금지했으며, 붕당의 진원지이고 백성을 괴롭혔던 서원을 철폐하여 백성들의 삶이 많이 증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단순히 영,정조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대가 요구 하는 개혁은 옛것을 복구하는 수구보수적인 것이 아니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산업 사회를 만드는 좀 더 진취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은 이웃 나라인 일본의 명치유신은 물론 대국 청나라의 양무운동 보다도 훨씬 미흡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쇄국 정책, 제너럴 샤만호 사건과 박규수
청나라, 조선, 일본은 모두 오랜 동안 쇄국이 기본 외교정책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서양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무너져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천주교를 받아 드리면 신분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수구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우선 내치를 안정 시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한 다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하며 서양국가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66년 8월, 대동강 물은 장마로 크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미국 상선 General Scherman 호는 그 물을 타고 평양성 깊숙히 들어 왔습니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으로 무장을하고 있어서 해적선으로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선원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는 등 폭력을 가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강물이 줄어 들어 배가 움직을 수 없게 되자 평안 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배를 공격하여 배에 불이 붙자 선원 전원이 물에 뛰어 들어 사망했고 박규수는 배의 엔진를 노휙했습니다. 박규수는 이조 침판을 지내는 등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인물 이었습니다. 당시에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려면 지방 근무로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여 지방 수령직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침 중요한 사건이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큰 인물이 평양 감사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의 손자였습니다. 박규수 또한 베이징을 여러 차례 다녀 오면서 아편전쟁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조선도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개화파 육성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이 개화파는 민비의 강력한 정적이 됩니다.
민비의 등장과 고종 친정 시작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지 2년 만에 민자영은 고종의 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왔습니다. 장희빈의 음모로 많은 고초를 겪었던 숙종비 인현 왕후 집안인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이었습니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방지하기 위해서 형제 자매, 부모등 친척이 없는 것을 장점으로 여기고 대원군의 부인과 같은 집안인 여흥 민씨를 택한 것입니다. 당시 고종은15세, 민비은 16세 였으나, 민비의 권력욕과 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머리 굴리기는 대원군 못지 않았습니다.
1866년 민자영이 왕비가 되던 해는 대원군이 무려 8000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 9명을 죽이는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이로 인한 병인양요, 제너랄 셔만호사건 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흥 민씨인 대원군의 부인에게는 민승호라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민비는 민승호를 자기 아버지 민치록의 아들로입적 시키고 자신의 오라비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권력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반 대원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조 대비와 연대하여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은 풍양 조씨에게 충분한 대접을 해주지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성하를 포섭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형 흥인군 이최응도 민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이 개혁을 위해서 남인과 북인을 선호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노론 계인 안동 김씨 김병기를 포섭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반 대원군 세력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붕당의 아지트였고 백성을 착취하는 전위부대였던 서원을 철폐한 대원군은 유학자들의 원수였습니다.
대원군 섭정 10년, 고종의 나이 22세가 되자, 그중 지도자 격인 최익현을 포섭 하여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상소는 반 대원군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을 근거로1873년,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민비가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영흥민씨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반격
민비의 처가 여흥 민씨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보다 더 심한 매관 매직, 뇌물 수수 등 온갓 비리로 권력 유지와 축재를 했습니다.이로 인한 민생고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합니다. 민비와 고종 사이에서 난 왕자와 공주들은 낳자마자 죽거나 병약했습니다. 민비는 이를 해결해 보고자 무당을 불러서 궁중에서 굿을 하거나, 전국 유명한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습니다.민비는 무당과 사찰에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민비는 극과 풍악을 좋아하여 거의 저녁마다 잔치를 벌렸다고합니다. 밤잠을 설친 고종은 낮에 정사를 보면서 꾸벅 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국고를 썼습니다. 대원군이 궁중 재정을 흑자로 돌려 놓은 것을 고종과 민비는 적자로 만들었고 이를 매꾸고자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민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고 대원군의 인기는 상승했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끈질기게 민비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시도합니다. 민비숙소에서 폭탄이 폭팔했지만 민비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선물 보따리에 폭탄을 넣어 민승호의 집에도 보내어서 이것이 폭팔하여 민승호를비롯한 일가가 사망했습니다. 대원군의 형 흥인군 집에 불이 나는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에 대원군 집에 머물렀던 식객이 주도 한 것으로 후에 밝혀졌습니다.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통상 조약인 병자 수호 조약을 1876년에 일본과 체결했습니다. 이는 지독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권리만 명시하고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는 전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민비의 또 하나의 정적 개화당의 탄생
제너럴 샤만호 사건 때 평양 감사로써 대포와 총으로 무장 한 미국 상선을 제압했던 박규수는 개화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의 생각은 이홍장의 양무운동과 같이 전통적인 유교를 바탕으로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반 세도가들의 자식들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하여 북경에서가지고 온 새로운 서양 문물과 책를 소개하는 등 서양 지식을 그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김옥균, 유길준, 박용효, 박영교, 홍영식, 김윤식, 서광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고 그중 김옥균이 이들의 보스였습니다. 그는 노론계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 였습니다. 시문, 글씨, 그림에 뛰어나고, 매우 사교적이어서 위로는 정승 판서와 친했고 아래로는 시장 잡배와 어울렸다고 합니다. 가무, 음주, 주색 잡기, 바둑, 투전, 골패에도 탁월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박규수는 그에게 중화 사상이 허구 임을 가르쳤고, 개화파들이 청과의 관계 단절을 외치고 다니게되는 믿 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다. 박규수는 고종에게 박영효를 부마로 삼을 것을 추천 했습니다. 서광범은 이조 참판 서상익의 아들이었습니다.
서재필; 개화파의 일원이 되다.
1864년 1월7일에 서재필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고 보성은 그의 외가였습니다. 서재필 부모는 곧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사 하여 7살이 되던 해에 한양에 있는 6촌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한양에서 살게 되었는데, 서광하의 부인은 안동 김씨 김온순의 딸이며 구한말 대신 김성근의 누나였습니다. 서재필이 낳던 해와 달은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 한 해와 달과 우연히 일치합니다.
유년기의 서재필은 동료들 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싸움을 잘 했으며 명석했고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했는데, 김옥균, 서광범등이 이 집에 드나들었고 서재필은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옥균은 서재필을 총애했습니다.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재필은 곧 이들과 함께 박규수의 집에 드나 들면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서재필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옥균이 개화당의 모체인 충의계를 만들자 서재필도 이에 합류했습니다.
개화파와 붕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
박규수 외에 개화파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봉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입니다. 그는 일찍이 일본 사찰에 묶으면서 게이오 의숙에서 개화 사상을 배웠고 유기치와 개화파인사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활을 했습니다.
이동익은 부산 출신이어서 그 곳 왜관에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인과 접촉하여 새로운 문물과 서적들을 봉원사로 가져왔습니다.김옥균등 개화파 인사들은 봉원사에 드나들면서 이동익이 가져온 것들을 교재로 공부했고 12살 위인 김옥균은 서재필을 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했습니다.
개화파의 승계; 오경석-유흥기(대치)
1877년에 박규수가 죽자, 역관 중인 출신 오경석이 개화파를 승계했습니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이었습니다. 그는 박제가의 실학을 발전, 확대 시켰습니다. 개화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중인 출신인 그는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오경석은 한의사였던 대치 유흥기와 같이 활동했는데, 1879년에 오경석이 사망하자 유흥기가 승계하여 개화파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백의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졌었고 교육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 위정 척사파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갈라집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김성근 등 으로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시도하고 있는 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친청세력이었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두 다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일본이 앞서 시행했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조선의 뒷 처진 현실을 중국에 예속된 조선의 관계에 그원인이 있다고 보고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친일 세력이었습니다.
위정척사파 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유교는 옳은 것이고 천주교등 외래 사상은 틀리 다는 주장입니다. 서양문물은 물욕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순수한 인륜문명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으며, 과학보다 도가 더 중요하며 무보다 문이 중요하다고 고집했습니다. 최익현등이 주도했던 이들을 다수의 국민이 지지했습니다. 외세를 배제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조선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패망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고종; 청나라에 영선사 파견, 개화파; 후꾸자와 유키치와 접촉
1880년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던 중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황준헌을 만났습니다. 그는 김홍집에게 조선 책략 이라는 책을 줍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이 외세로 부터 살아 남을 려면 어떻게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가를 충고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청의 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 습니다. 친중, 결일, 연미가 정책의 골자였습니다. 김홍집은 이 책을 고종에게 가져다 주었고 고종은 이 세 나라와 잘 해 볼려고 노력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책이 전국으로 퍼지자위정척사파는 극열하게 반대 했고 백성들 또한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습니다. 1881년, 고종은 지금의 외무부와 비슷한 통리기무 아문을 설치 하고 청에 영선사, 일본에 신사 유람단을 파견합니다. 김윤집, 어윤중은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는데 임오군란 때 민비를 멸망 일보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구하는 데 큰 역활을 하게 됩니다. 고종은 극 비리에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위정 척사파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일본과 거래 하는 것을 반대 했기 때문입니다. 이동익이 주선했고 이동익도 수행하려고 했으나, 그는 떠나기 전에 행방 불명이 되고 그 이후로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 습니다. 이 때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됩니다. 그는 원래 계획 대로 일본에 남아서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웠습니다. 급진 개화파와 후꾸자와 유기치 와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꾸자와는 일본 제일의 현자이고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있는 인물입니다. 일본돈 만원권에 프린트된 그의 초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이오 의숙을 창설 하여 일본 근대화에 이바지한 많은 인재를 만들어냈습니다. 시사신보를 만들어 계몽활동을 했습니다.“탈 아시아”라는 기치를 앞세워 일본의 유롭화를 외쳤습니다. 김옥균은 1883년에 60명을 게이오 의숙에 유학하게 했습니다. 후꾸자와 유기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 이었습니다.
대원군의 반격; 이재선 반역 사건
조선책략을 읽어본 유생들은 이를 극열하게 반대했습니다. 여론 또한 위정척사파들의 편이었습니다. 인기가 좋았던 대원군은 첩의 아들인 이재선을 앞에 세워, 경기도 지방에 과거시험을 치려고 올라온 유생들을 이용 하여 대신들과 민씨일족을 제거하려는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임오군란 일 년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테타
권불 10년이라고했던가? 대원군의 섭정이 10년 째 되던 1873년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 된지 9년이 지난 1882년, 임오 군란이 일어 납니다. 이 사건은 구식군대의 “군란”이라기보다는 대원군이 민비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쿠테타였습니다. 구식 군대가 시작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합세했고 이 폭도들을 이끈 인물은 대원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목적인 정권을 일시 적이나마 장악 하게됩니다. 당시에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원성은극에 달했습니다. 1882년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일본과 통상을 연 후 부터 쌀이 일본으로 많이 송출되어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쌀값이 폭등했습니다.
민씨 외척들의 매관매직과 돈들여 벼슬자리 얻으면 본전에 이익까지 챙기려고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고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갔습니다. 민비의 잦은 무당굿과 밤이 늦게 벌리는 잔치는 궁중의 예산을 탕진했으니 무슨 돈으로 백성을 돌보았겠습니까? 대원군은 섭정 때 구식군대를 잘 정비했고 그들은 병인양요, 신미 양요등 그런대로 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구식군대 5군영을 2군영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일본의 힘을 빌려서 창설했습니다. 말을 하자면 전자는 대원군의 군대고 후자는 민비의 군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세청장 쯤 돼 보이는 민겸호는 구식군대에 지급 될 쌀을 몽땅 착복해 버립니다. 무례 1년 동안 구식 군대는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13개월 만에 쌀로 월급이 지급되었습니다. 무게를 늘일 려고 물과 모래를 부어서 쌀이 썩어있었습니다. 화가 난 군인들은 폭도로 변하여 민겸호 집에 방화하고 무위영대장 이겸호 집을 습격하는 등 우왕 좌왕 하다가 대원군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 그들을 이용한 쿠테타를 주도하게 됩니다. 일반 백성 까지 합류하여 대원군은 막강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대원군 형 이최응을 살해하면서 창덕궁을 함락시킵니다. 궁궐로 피신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은 민비를 살해하려려고 혈안이 되어 찾았으나 민비는 무사히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구식군대 병졸들은 대원군 집권을 요구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 들여 전권이 다시 대원군에게 넘어갑니다. 궁을 빠져 나간 민비는 충주 장호원 목사 민응식 집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민비를 놓친 대원군은 행방불명으로 간주하고 시체가 없는 민비장레식을 치루었습니다. 백성들은 대원군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물가고 해결을 위해서 시전 상인 1000명을 처형 했습니다. 1866년 천주교 신도 8000 처형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냉혈한 대원군의 무자비한 행위였습니다.
청; 반란군 진압-대원군 납치, 민비 복권
충주에 숨어 있던 민비는 친척을 통해서 청에 영선사로 가 있는 김윤식, 어윤중과 접촉하여 청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과 접촉 할 수 있었고, 청과 김윤식은 대원군을 납치 하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이홍장은 많은 영토와 자기들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이 서양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을 확실하게 자기들 영향권에 넣으려고 조선에 회군대장 오장경이 지휘하는 3000명의 병력을 한양에 보냈습니다. 이 때 김윤식도 같이 귀국했습니다. 오장경은 고종을 예방한 후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방문하면서 대원군을 자기 막사로 초대합니다.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군 막사로 대원군이 들어 서자 마자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텐진으로 유폐되어 4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3일 동안의 권력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이제는 절름 발이 정권이 되었습니다. 청나라 장수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는 권력이었습니다. 조청상민수륙장정 이라는 일종의 행정 명령을 내려 청나라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조선에서 상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상인들에 대한 피해와 청군의 보호를 받은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행패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서재필의 정계 진출과 개화파와 후꾸자와의 밀착
1883년5월, 서재필은 14명의 유학생 대표로 일본에 가서 6개월 간 게이오 의숙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언어 습득력이 남달리 뛰어 난 서재필은 불과 6 개월 만에 통역 없이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1884년 1월에 그는 일본군 하사관 학교에서 6개월 간 군사 교육을 받고 귀국 하여 사관 학교 교장 격인 장교 양성 학교 사관장으로 봉직했습니다. 1882년8월에 급진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뒷 처리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 등은 후꾸자와 유기치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키치에게 감화되어 우리도 일본같이 개혁을 해야 된다고 굳게 믿게 됩니다.
갑신정변; 청과 일본의 대결-청의 승리
임오군란 후 청군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 내고 복권하게 된 고종과 민비는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에 크게 의존 하게되었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청군이 조선에 주둔 함으로써 많이 약화되는 수 밖에 없었고 친일 세력인 개화파는 점점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횡포는 중국의 영향이 조선의 쇠약한 국력의 원인 이라고 생각 하는 개화파 인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민영익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한 사이였고 급진 개화파와 같이 일했으나, 미국, 구라파를 돌아본 후에 친민비 집권 당인 친청 온건 개화파 쪽으로 이탈했습니다. 한편 박영효는 한성 판윤에서 광주 유수로 급기야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크게 그 세력이 위축된 개화파는 일본공사와 접촉하여 쿠테타 계획을 세우고 그 시기를 염탐하던 중,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을 놓고 전쟁을 하기 시작하자, 조선 주둔 군의 반인 1500명을 본국으로 소환했습니다. 1884년12월4일 우정국 낙성식 때 주요 인사가 한 자리 모인 현장에서 주위에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운 후 이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감금 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 요강을 발표했습니다.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려고 찿아온 대신11명을 고종 앞에서 살해했습니다. 다음 날 고종의 요구를 거절 하지 못하고 고종이 환궁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경우궁은 협소 해서 방어 하기가 용이한 편이었으나 넓은 창덕궁은 진압군을 방어하기 힘들어서 환궁 허용은 큰 실수 였다고 합니다.
청군 대장 원 세개는 고종과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쿠테타 세력을 진압할 것을 통고했습니다. 일본정부는 다케조에에게 청군과 충돌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다케조에는 개화파들과의 약속과는 달리 전혀 싸우지 않고 슬그머니 후퇴해 버립니다. 12월6일 3일만에 쿠테타 세력은 원세계에 의해서 완전히 제압되고 개화파는 반역죄를 지은 역적이 되었습니다. 황영식과 박영교는 청군한테 참살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은삼족이 멸는 함을 당하는 참혹 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서재필의 역활과 가족들의 피해
서재필은 사관생도와 쿠테타 병력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과 협조하여 요인 살해에 직접 참여 했습니다. 쿠테타 진압군으로 부터 궁을 수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삼족이 다 죽거나 중형을 면치 못하는 대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친 아버지 서광효는 투옥된 후 자결 하였고 어머니와3 형제는 사약을 받거나 살해 당했습니다. 부인은 친정을 찿아 갔으나 아버지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의 아내라고 집 밖에서 극약을 주어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 가는 길에 기생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으 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2 살 난 아들은 굶어죽었습니다. 딸은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으나 행방이 묘현합니다. 보성의 친 외가는 몰락했지만 생명은 부지했습니다.
갑신정변의 배후; 후꾸자와 유키치
사실상 후꾸자와 유기치가 이끄는 일본 진보파가 김옥균을 앞세워 일으킨 쿠테타였습니다. 후쿠자와는 3년 동안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 기획, 지휘 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일본 진보파 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개화파를 연결고리로 삼아 조선을 근대화 시켜 일본이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구도에서 구미국가의 제국주의식 식민지화 정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망명 한 달 동안은 일본측이 잘 보호해주고 친절 했으나, 쓸모 없는신세가 된 조선의 망명객들은 헌 신짝처럼 버려집니다.
서재필의 후회와 좌절, 일본의 천대, 조선의 자객; 미국 망명
이제 갓 20 살이 된 서재필은 압뒤를 가리지않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같은 자신의 경솔 한 행위를 깊이 후회 했습니다. 국민들은 아직도 위정 척사파들의 외세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일본을 끌어드려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구테타 계획 자체가 허술했음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불장난 같은 행위로 인한 가족, 친지들의 참혹한 불행은 서재필의 가슴을 메게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 죄가 없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중죄를 가한 조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푸대접 했고, 더구나 안전을 보장 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끝임 없이 일본정부에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고,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쎈프란 시코로
이렇게 일본이 위험해지자 이들은 미국 쎈프란 시스코로 피신 했습니다. 1884년12월13일에 인천을 떠난지 약6개월이 된 1885년5월26일 요꼬하마를 출발 하여 쎈프란시스코에 6월말에 도착했습니다. 공주의 남편 박영효는 미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돌아 오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소갯장을 들고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이제 혼자 남아서 이민생활을 개척해 나갑니다.
서재필의 쎈프란시코 생활과 윤치호의 도움
한국 사람이라고는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종차별 또한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영어를 못했던 서재필이 직장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얻은 일은 광고전을 붙이기였습니다. 평균 5 마일 정도 커버 했는데, 서재필은 10 마일에 걸처서 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잡일을 하던 중 윤치호와 연락이되어 그는 서재필에게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온건 개화파의 득세와 텐진조약
갑신정변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청과 일본이 싸워서 청이 승리한 셈입니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을 밀어 낸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는 더욱 그 세력를 굳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테타군 진압 과정에서 공사관이 소실되었고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손해 배상 요구, 사과, 공사관 부지 제공 등을 약속 받은 한성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 진보파가 조선의 개화파를 앞세워 일으킨 정변을 청의 젊은 장군 원세개가 진압한 후 이홍장은 자기 영토인 텐진에 이토 히로 부미를 불러 텐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의 골자는 양국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앞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에게 통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85년4월이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대원군은 같은 도시 텐진에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동양 삼국의 거물이 한 도시에 있었으나 국력은 그들의 입지를 반영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청일 전쟁의 빌미로 이용 하게됩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1884년9월20일, Horrace Newton Allen 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던 날 우정국 낙성식 때 크게 부산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왕과 왕비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광혜원과 제중원을 창설하는 등 처음 5년간은 의료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 7년간 공사관 서기 그리고 8년 간 공사로 봉직 했고 동시에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미국에 이로운 조선의 사업과 자신의 치부를 위한 사업에 많이 관여했 습니다. 자연히 조선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서재필은 이것을 비난 했고 그 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Horrace Undrwood, Henry Appenzeller, W.B. Scranton, Mary Scranton 등이 1885년에 입국 합니다.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중제에 나서서 북경조약을 체결 하게 한 댓가로 브라디 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를 청나라로 부터 넘겨 받았습니다.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년 이후로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접경 하게 됩니다.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는 이제 조선을 넘겨다보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러시아와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더욱이나 갑신정변 이후에는 조선은 청나라에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슬그 머니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나라를 견제해 볼려고 했습니다. 이 낌세를 알아 차린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 하고 청나라에게 알립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청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청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렸습니다. 물론 조선 조정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 했다는 사실을 한 달 동안이나 모르고 있다가 청이 알려 주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위안스카이; 조선최고의 권력자, 대원군의 귀국
1885년10월5일, 갑신정변을 제압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돌아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텐진에 구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대동했습니다. 청이 대원군을 구금에서 풀어주어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민비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청은 민비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자, 민비는 친 대원군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한달 사이에 무려 30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감국이 됩니다. 조선의 왕을 감독한다는 뜻입니다. 고종은 완전한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궁녀를 대려다 농락했고 고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에 신해혁명으로 선출된 대통령 손문으로 부터 대통령직을 양보 받아 망국 청 나라를 접수 한 인물이 바로 조선 감국 위안스카이입니다. 향후 1894년 청일 전쟁때 까지 청나라의 조선 통치는 약 10년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영국군 거문도 철수, 베베르 공사 와 손탁 입국
1887년2월27일 약 2년 동안 조선의 거문도에 머물었던 영국군은 러시아가 청국에게 조선을 점령할 계획이 없음을 선언 하자, 철수 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고 청은 조선의 장악력에 관계된 러시아의 방해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베베르 공사가 부임하면서 사교계의 여왕 손탁(Antoinette Sontag)이 들어와 손탁호텔을 운영하는 등 외교관, 정치인들과 사귀어 소위 친러파라는 소위 정동파를 만듭니다.
19세기 중, 후반의 한반도 정세와 사회
우편제도, 신문, 전신 제도, 전기 등 근대 국가의 문명의 이기가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제 학당,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표면적인 발전은 전혀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일을 해야했으나 국방을 하기에 앞서 외세에게 나라의 이권을 내주어서 자기 정권 유지하려했고, 국민을 착취하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양반관료들은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았고 돈을 써서 한 자리 얻은 관리들은 부당한 세금을 걷어 본전과 이익을 챙겼습니다.
고종과 민비의 궁중 예산 낭비로 인한 적자를 매꾸기 위해서 고종 자신도 관직을 팔았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여러나라와의 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서 외국으로 부터 싸고 좋은 물건들이 범람하여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진 물건들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조선 지배는 청나라에게 엄천 난 특권을 주는 경제 정책을 강요 받았고 조선 상인 보다 청나라 상인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인천의 차이나 타운과 짜장면 집, 호떡 집 등은 원세계와 같이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없게된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도적 떼에 가담하여 전국에 도둑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식량이 없어서 나무 껍질을 먹은 사람들이 대변을 누다가 항문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를 보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 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1894년 조선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을 청이 물리 치고 조선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 하게 한 사건 들이었습니다. 또다시 권불 10년의 그 10년 쯤 되던 해가 1894년 입니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해입니다.
동학 농민 혁명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는 반상제도는 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백성 (상민)들을 착취하는데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인내천을 교시로 하는 동학사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었고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백성들 간에 빠른 속도로 퍼저 나갔습니다. 1890년 대에도 천주교는 국가에서 인정을 해주었으나 동학교는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반상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인정해주면 양반들이 자기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892, 1893년에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주고 동학교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가 삼례를 기점으로 하여 충청도 보은에서는 2만내지 8만명이 운집하는 대규모의 집회가 여러 날 계속되었고 금구와 밀양에서도 작은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봉준, 조병갑에게 반기를 들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중앙 관료 들이 알아 주는 백성 수탈의 명수였습니다. 백성들로 부터 걷어들인 세금과 뇌물을 중앙 관료들에게 잘 바쳐서 노른 자위 지방 관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부는 비옥 한 농토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포탈할 산물이 풍부 했습니다. 1894년2월26일 전봉준은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반기를 들고 그 동안의 평화적인 시위를 한단계 뛰어 넘는 농민들로 구성된 반군을 지휘하여 각 고을을 공격,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사발통문으로 방을 부처서 반군을 모집했습니다.그들은 전주성을 점령 하고 서울로 진격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정부군과 싸웠습니다.
하필이면 왜 호남에서?
조선 전국의 논 30.8%가 호남에 있었고 쌀의 42.3% 가 호남에서 생산 됬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수탈 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할 정도로 관리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전라도 관리의 대부분이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전주성 점령과 청에 원군 요청
1894년5월10일, 그러니까 난이 발발 한지 3개월 만에 홍계훈이 정부군 800 명을 청나라 군함에 싣고 군산에 들어옵니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상궁으로 변장 한 민비를 등에 없고 궁을 빠져 나가 민비가 반군의 칼날을 피하게한 장본인이 홍계훈입니다. 조선은 아직도 원세계가 지배하는 청나라 세상임을 상기하면 조선군이 청나라 군함을 이용함은 당연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임진 왜란 때나 마찬 가지로 조선의 군인 들은 농민인지 군인인지 모르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요지음 세상으로 치면 예비군이 정규적인 훈련도 하지 않고있다가 전쟁이 나면 차출되어 적과 싸우게 되는 꼴 입니다. 800명은 막상 동학군과 싸울 때는 겨우470명 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악에 밪친 동학군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당도했을 때는 관료와 관군은 전부 도망가고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전주성이 동학군에게 점령당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청합니다. 이 때가 6월1일, 그 다음날 일본은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닷새 후인 6월6일 청군 1500 명이 아산으로 출발하고 다음 날에 텐진 조약에 약속 된 대로 일본에게 통고를 했습니다.
전주 화약과 동학군 자치 정부, 집강소 설치
홍계훈은 정부군을 재정비하여 동학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는동학군이 패배 했습니다. 성 안의 식량은 고갈 되어갔습니다. 때는 모내기 할 농번기 였습니다.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6월11일 그들은 새로 부임한 전주 감사 김학진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내 줍니다. 전주성을 나온 동학군은 모심으러 집에 돌아 가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 하여 각 고을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혁명군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는 호남 일원 행정 관청 안에 설치 되었고 고을의 수령은 자연이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세기 전 프랑스 혁명을 방불케 하듯 12개의 행정 요강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했습니다. 탐관오리의 죄를 조사하여 처벌함, 노비문서 소각, 천인 대우 개선, 청춘과부 재가 허용. 토지 균등 분배 등을 골자로 했습니다. 아이러니칼 한 것은 비슷한 개혁이 한달 여후 중앙 정부에서 개화파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청군이 조선에 파병 되자 일본 또한 군대를 보냈습니다. 뜻 밖에 반군이 전주에서 철수하자, 조선정부는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미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고 이 계획을 하나 하나 진행 해 나갔습니다. 7월23일, 한양에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경복궁을 점령 했습니다.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 고종과 민비 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얼굴마담으로 하여 친일 개화파를 집권 시킵니다(경복궁 쿠테타). 이제 조선 정계의 세력 구도는 민비-친청 온건 개화파 에서 대원군-친일 개화파로 바뀐 꼴이 되었습니다. 민비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개화파와 대원군의 결탁이 눈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12년전 임오군란 때 청과 민비의 연합으로 권좌에서 물러 났던 대원군은 다시 절름 발이지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7월27일에 군국 기무처가 설치되고 소위 갑오 개혁이 시작 되었습니다. 한양에서는 군국기무처가 갑오 개혁, 호남에서는 집강소에서 동학혁명이 진행 되고 있었습니다. 1894년7월25일, 일본 군함은 이홍장이 심혈을 기우려서 만든 북양함대를 충청도 아산 앞바다에서 대파했습니다. 역사가 들은 이를 풍도 해전이라고 하고 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로 시작 된 이홍장의 양무개혁과 일본의 명치 유신이 조선땅 에서 그 결과를 증명하는 일전을 벌린 대리전쟁이 청일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반도와 같은 지정 학적 위치에서 취약하기 그지 없는 국력은 주위 강한 나라에게 전쟁터를 제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일 전쟁 외에도 임진 왜란, 러일 전쟁 그리고 한국 전쟁도 일종의 대리 전쟁 이었습니다. 7월28일 에는 성환에서 일본 육군은 청군을 섬멸 했고 청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여 전병력을 집중시키고 일전을 기다렸습니다. 8월26일, 경복궁을 접령하고 고종을 제압 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청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선이 제공 할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가난 한나라에서 무려 20만 대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했습니다. 일본은 평양 전투에 필요한 토지, 건물, 전신을 징발했습니다. 그리고 동학란을 조일합동으로 제압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9월15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조선 안에 있었 청군 병력과 본국에서 들어온 병력이 총 집결해 있는 청군을 대파 했 습니다. 한편 절름발이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원래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완전한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민비를 폐비 시키기 위한 공작을 했고, 손자 이준용이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 하게 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집권 한지 한 달 후에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수에게 친일 개화파를 제거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평양 전투 중에 이 서한이 일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믿을 수 없는 대원군을 퇴진 시켰습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기로우, 개화파 귀국 허용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청을 제압하자, 민비-친청-온건 개화파가 무너지고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 해 있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1894년 8월, 10년만에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 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에 임명 되었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이 군국 기무처 결정 사항을 잘 이행 하지 않는등 일본과 개화파를 좋아 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박영효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 했 습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을 지어 주고 대저택을 하사 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효를 다리로 일본 측과 친해져서 대원군을 밀어 내고 자기가 실권을 잡으려고 했던것입니다. 곧 원수 지간이 될 이들은 당분간 밀월관계를 유지합니다.
전봉준 체포
1894년 12월, 7 일간 계속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동학군은 섬멸 되고 전봉준은 체포되었습니다. 동학혁명은무려 20 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었습니다.
시모노 세키조약과 삼국 간섭
1895년4월17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토 히로 부미는 이홍장을 자기의 영토 인 시모노세키로 불러서 시모노 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첫번 째 조항은 “조선은 완전 무결한 독립국임을 선언 한다.” 였습니다. 적어도 조선 500 년 동안 계속 되던 중국의 종주국 노릇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하든 청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뜻이었 습니다. 그리고 청은 요동 반도, 타이완, 펑우 열도를 일본에게 양도했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6일 후 만주 진출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꼬두겨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 할 것을 요구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 할 만 한 해군력이 부족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 주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나라 전체가 “와신상담”이라는 말로 위로하며 억울함을 달럤습니다. 그리고 훗 날 러시아를 제압 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삼국 간섭 이라고 합니다.
민비의 친러 정책과 정동 파의 집권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것을 본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를 밀어 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동 구락부 라는 모임 소속 친러, 친미 정객들을 대거 입각 시켜서 친일 개화파를 밀어냈습니다.
이 정객 들을 정동파라고 했는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같이 조선에 온 손탁이라는 여인이 만든 사교 단체 정동 구락부 인사들입니다. 정동은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 손탁은 정동에 호텔을 운영하며 외교관들과 조선 정객이 어울 릴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친 구미, 반일, 친 민비 성향의 인사들이었습니다.
박영효 민비 시해 음모 실패와 일본 재 망명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들이 장악 하고 있는 군국 기무처의 힘에 밀려 나 자기 권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1894년 여름 부터 급진 개화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비는 러시아 공관과 접촉하여 개화파 말살 계획을 도와 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 이 계획이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접촉하여 민비살해계획을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해가 바뀌고 씨모노 세끼 조약 후 삼국 간섭으로 대세가 일본에서 러시아 쪽으로 넘어 가자 민비는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 당을 쓸어버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박영효 귀에 들어 갔고, 1895년 7월,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 습니다.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을 찿아가 병력을 요구한 다음 유 길준에게 자기 계획을 알렸습니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믿었습니다. 왜냐면 유길준도 대원군과 같이 일본측과 접촉 하여 민비 제거를 계획 하고 있었고 이 사실을 유길준이 자기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은 고종에게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밀고 했 습니다. 7월6일 고종은 즉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박영효 체포령을 내렸 습니다. 이윤용은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고, 그는 즉시 담장 넘어로 체포령을 알린 다음 움직였습니다. 7월7일 포졸이 박영효 집에 도달했을 때는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작은 증기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공덕리 대원군 별장 아소당에 가택연금 돼 있었고 일본 공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비 시해 계획을 논의 했던 것으로 추측 됩니다.
유길준 대원군 파에게 포섭되다.
유길준은 일찌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등과 같이 수학 했던 개화파 중에 한 사람이었고,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근대 문명을 이해 할 수 있는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안은 유길준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합니다.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통해서 유길준을 포섭했습니다. 결국 유길준은 대원군, 이준용이 주도하는 민비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나 명성황후 암살 전후 까지 개화파 인사들은 그와 대원군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박영효의 민비 암살 계획 폭로 후 민비와 고종의 개화파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민비 시해 사건(을미 사변)
1894년 10월4일, 유길준이 의주 관찰사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의 지방관직 발령으로 이제 개화파는 전부 내각에서 축출 된 셈이었 습니다. 바로 그날 일본측은 대원군과 접촉 하여 10월8일 새벽에 거사할 것에 합의했습니다. 죽기 전 날 밤에 민비는 척족 민영준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 된 것을 축하 하는 연회를 베풀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민비를 살해한 장본인인 일본 낭인들은 진고개 파성관에서 한성신보기자 들과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낭인들은 일본의 열혈 애국 청년 들이었습니다. 인류 대학 출신들로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조폭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5년10월8일 새벽 5;30에 일본 낭인과 조선 훈련대 병력은 경복궁으로 침입 하여 침전인 옥호루에 있는 민비를 시해했습니다.민비를 칼로 벤 장본인은 물론 일본 낭인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일본 병력을 지휘한 인물은 일본 공사 고로였고 조선 병력을 지휘 한 장 본인은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 이었습니다. 우범선은 임오군란 직전에 신식군대 별기군 교관 이었는데, 그는 중인 출신이었고 생도들은 양반 집 자제들이었습니다. 생도들은 교관에게 반발을 했고 교관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생도들을 모아 놓고 장황한 연설을 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친일 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훈련대 대대장을 맏게 되었으나, 고종과 민비는 훈련대를 해체하려고 했습니다. 불만에 찬 우범선을 고로가 포섭한 것입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 해 있던 우법선은 자객 고영근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는 우범선의 아들 입니다.
거사날 새벽 3시, 공덕리 별장을 습격한 일본낭인들은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옷으로 변장한 후, 반 강제로 대원군을 대리고, 훈련대 병사 들과 같이 경복궁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민비 시해 직후, 친일 내각 재 집권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힘입어 친러 정책으로 정권을 잡았 던 친러파는 민비가 대원군-개화파-일본에 의해서 제거 되자, 일본은 일단 대원군을 떠 받들고 개화당 인사 들을 대거 재 집권 시켰습니다.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이 물러 나고 만년 재상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박영효, 서광범등이 다시 내각에 들어 오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 됬습니다.
고종 공포에 떨다.
민비가 정적인 대원군과 개화당 그리고 일본 세력에 의해서 사살되자 고종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자기 주위에는 자신이 물리 치려고 했던 세력이 에워 싸고 있었습니다. 일본 공사는 고종을 위협 했고, 대원군이 자기를 죽이고 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언도우드 부인이 직접 가지고 온 음식만 먹었습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식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서재필 귀국
민비가 시해된지 두 달 여 만인 1895년12월25일 미국으로 망명 했던 서재필이 귀국했습니다. 갑신 정변이 실패 한지 무려 11년 이 지난 후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백인아내와 결혼한 미국시민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미국시민이었고 미국의사였다.
1895년, 쌘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는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했으며 주말에는 교회에 나갔 습니다. 교회 신자의 소개로 탄광업으로 돈을 번 독지가인 John Hellenbeck을 알게 되었습니다. 1886년9월에 헬렌벡은 서재필을 펜실바니아 주 윌키스 바레에 있는Harry Hillman Academy 고등 하교에 입학 시켜주었습니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도 헬렌벡이 지어주었습니다. 22살은 동료들 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언어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 학교를 졸업하여, 학생 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준비 과정인 콜롬비안 대학 예과 코크리안 스크울 야간 부에 입학했습니다. 예과를 마치자, 헬렌벡은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 선교 활동을 할 것을 권유 했습니다. 이것을 서면으로 약속 하면 학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부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대역죄를 지은 망명객이어서 돌아 가면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을 것이고, 7년 후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그는 법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미 입학 허가가 나온 라파얕 대학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여 학비를 조달 할려고 했으나, 학 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운 좋은 서재필
워싱톤에 있는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 일본과 중국에서 수집한 의학 서적 5000여권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있었는데, 적임자는 일본어,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 해야했습니다. 모교인 힐맨 아카데 교장 댁을 방문하고 있던 모 교수가 서재필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는 도서관장 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이 소개장을 들고 도서관을 찿아 가자, 성경 구절을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문과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 했고 이미 크리스찬인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무려 월급 120불이라는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것에 만족 하지 않고 콜롬비안 대학 의학부 야간반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의 조지 워싱톤 대학 전신으로 워싱톤 D.C. 에 있었 습니다. 1892년 3월, 조선인 최초로 미국의사가 되었 으니, 나이 28 세였습니다.
Muriel Marry Amstrong 과 결혼
그는 1890년6월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1894년 개업 의사로 일하던 때에 뮤리엘과 결혼했습니다. 미국 15대 대통령 뷰캐넌의 누이의 딸 이었습니다. 누이의 남편은 조지 암스트롱이었고 그는 미국 철도 우편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천만리 타국에 온 서재필은 이제 미국 시민, 의사 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결혼 식에는 미국에서 이렇다 할 저명 인사 200 여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가 15세 때 조선에서 맞이 한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 씨를 생각 했을까? 젊은 혈기에 저지른 역적 행위로 그 부인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2살 난 아들이 굶어 죽었음을 상기 했을까? 여러 분들의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의 복권과 귀국 과정
법무대신 서광범은 서재필을 복권시키고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1895년 가을에 워싱톤을 방문한 박영효를 만 나고 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1895년11월10일,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하와이, 일본을 경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 정부에서 주는 모든 관직을 거절 하고 충추원 고문직을 수락했습니다. 당시 조선 공사이면서 충추원 고문인 미국 인 알랜과 똑 같은 자격으로 고종을 보좌 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귀국한 서재필의 태도
조국은 그를 버렸습니다. 본인이 반역 죄인이라하여 아무 죄없는 가족과 친지를 죽이거나, 투옥 시켰습니다. 재산을 몰수당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망명한 그를 죽이려고 고종은 끈질기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딱지는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이 절실 한 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갑신정변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나 조선 사림들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연설은 반드시 영어로 했습니다. 물론 통역을 항상 대동했습니다.
전처와 생모의 산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서 평민이 되어 버린 양 아버지가 찾아 왔으나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거지가 된 장인이 찾아 왔으나 모른척 했습니다.
고종을 만나러 갈 때 양복을 입고 읍소 하지 않고 악수로 인사 했습니다. 왕을 알현 할 때는 안경을 착용 할 수 없는 데도 안경을 벗지 않고 고종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을 사용 하지 않고 필립 제이슨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습니다. 서재필이 쌘프란시코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돈을 보내 주었 던 윤치호는 일기를 매일 썼습니다. 1898년1월15일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는 서재필이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윤치호가 왜 영어만 쓰냐고 물으니 한국말을 다 잊었다고 대답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서재필의 태도는 동료 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정부 관료로 있는 윤치호와 유길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순 한글 신문인 독립 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서 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 한 원인을 민중이 우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민계몽에 총력을 기울렸습니다.
1896년4월7일, 순 한글과 영어로 된 독립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한글 띄어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글 3면, 영어 1면 이었습니다. 교육 확대, 산업 발전 강조, 의무교육, 과학 기술 도입, 식 생활과 위생 개선등을 주장했습니다. 중립외교를 주창했습니다. 유길준의 의견이 반영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 내외의 사정,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을 보도했으며, 뇌물 수수, 관리들의 부정을 비판했습니다.
신문이 순 한글로 발간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고 생각 합니다. 서재필이 얼마나 조선의 근본적인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황금 빛의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만들었다고 하는 한글은 자타가 공인 하는 세계에서 제일 과학 적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이 한글이 무려 500년 가까이 일반 백성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 교과서, 정부, 심지어 한글 박물관에서도 지적 해 주지 않고 “위대한 글자”라는 것 만 강조 합니다.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된 것은 대한제국 선포 된 후였습니다. 그 전에는 모든 문서, 책등은 거의 전부가 한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양반 집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자연히 백성들이 우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한 장 사서 서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아니 글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을 것입니다. 해방 후인 1945년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 인구의 겨우 27% 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오죽 했겠습니까?
독립문 건립
지금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 근처에 영은문이 있었고 이문을 통과 하면 모화관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영은문을 통과하면 모화관에서 조선 대신들이 그들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청이 조선 보다 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시설이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이 일본이나 서양 제국에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오랫동안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 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빨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 해야 나라가 발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 영은문 대신 독립문 설립을 추친했습니다.
독립협회 결성
독립문 건립을 추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1896년7월2일에 이완용,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등과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결성했습니다. 1897년11월20일, 개선문 축소판인 독립문이 영은문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1200년 동안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 한다.”라고.
서재필이 주도 했던 독립신문, 독립문, 독립협회의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 인식 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재필의 청년 계몽
서재필은 매주 배재 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인권개념, 사회계약론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등이 서재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협성회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토론대회를 여는 등 청년들에게 토론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만민 공동회
독립문 건립을 의해서 관료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 협회를 시민 단체로 전환 하고 대중 토론회를 주관 했는데 이를 만민 공동회라고 했습니다. 토론회는 전국을 순환 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897년11월1일에 열렸던 제8회 만민 공동회는 노비 해방운동이 주제였습니다. 많은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 중에 대표가 찬,반 성토를 한 후 윤치호가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성토 하고, 서재필이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참상을 설명 한 후에 투표에 붙여서 다수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주장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입헌군주제를 주장 했습니다. 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하여 그 권한을 내각이 갖게하고 충추원을 의회로 바꾸자고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일본과 보수 세력 그리고 고종이 반대 하여 실현 되지 못했습니다.
아관 파천; 친러파의 쿠테타
권력은 친일파 개화당에게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화당, 대원군과 내통하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후에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씨워서 나쁜 국제 여론과 조선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들의 증언으로 여론은 일본측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러는 중에 대원군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음은 개화당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화당이 추진한 단발령은 친일 개화당에게는 치명 타였습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친러, 친미 정동 파들은 이러한 반일, 반 개화의 국민 감정과 고종의 공포에 떠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종을 외국 공관에 모시고 자기들의 정권 탈환을 계획 했습니다. 미국 공관으로 고종을 모시려고 시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춘생문 사건). 이범진과 심상훈은 러시아 공관과 긴밀하게 연락 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 모시는 데 성공했습니다. 1896년2월11일에 일어난 사건이고 아관 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을미사적 전원을 살해 할 것을 명령 합니다. 을미사적이라 함은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 된 대신들을 지칭 하는 것이었고 친러 파의 정적 개화파들이었습니다.
총리 대신 김홍집, 탁지부 대신 어윤중, 통상부 대신 정병하는 피살 되고 내무대신 유길준, 법무 대신 장박, 군부 대신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 했습니다. 어려운 때마다 정파에 크게 관계 없이 내각 수반을 맏았던 김홍집은 길 거리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은 후, 군중이 그의 시체를 한 동안 끌고 다니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1890년대 중반의 조선 사회상
매관 매직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할 정도로 성했습니다. 갑오 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심해졌 습니다. 궁핍한 왕실예산을 충당 하기 위해서 왕도 벼슬을 팔아 먹었습니다.돈을 들여 관직을 받으면 부임 지 백성들을 착취하여 축재를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 놓은 소위 반상 제도는 조선 건국 이래 국가 구조의 근간 이었습니다. 1890년 대에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얼마 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양반 인구는 약 2%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 됩니다. 아무튼 소수였던 것은 분명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양반들이 소유 하고 있던 노비 인구가 30-40% 였다는 것입니다. 노비 제도는 19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이완되어 그 수가 19세기 말에는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재산 목록 이었고 사고 팔기도 했습니다. 나머지가 보통 사람 즉 상인 이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은 극 소수 양반의 착취 대상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1882년에 연해주 한인 인구가 만여명이었는데 러시아 사람은 겨우 8385명이었다고 합니다. 1897년에는 15년 전의 두 배가 넘는 2만 5천명이 되었습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연해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 하면서 조선인들의 생활 상을 관찰 했습니다. 그의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특권계급의 착취, 가혹 한 세금, 정의 부재, 쇠약해진 군주, 미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운 나라”라고 서술했습니다. 발전 할 수 없는 형편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 하여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뀝니다. “조선 사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이익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제도와 과도 한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지도자가 다스린다면 언젠가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했습니다.
고종의 경운궁 환궁 (1897년3월4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조선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든 정사를 그와 상의 해서 결정했습니다. 웨베르는 많은 이권을 따 내는 대신 고종에게 친절 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100일,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시덥지 않게 변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서로 나누어 먹으려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선에서 분활 하여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가 관장할 것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습니다. 운명의 38선 아디어는 일본이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요구, 러시아의 푸대접, 왕 호위병 훈련완료 등 여건이 마련 되자, 고종은 외국 공관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탄생
1897년10월12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등극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 했습니다. 대한이란 말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22일에 민비 시해 2년2개월 만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요지음 돈으로 무려 110억이 소비됬다고 합니다.
대원군 사망
1898년2월22일, 주상이 보고 싶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대원군이 사망 했습니다. 며느리 장례식이 치루어 진지 일년여 만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원군의 약력은 조선의 운명사이다. 조선은 완전한 유교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오랜 역사의 반복과 다름 없다. 지금의 세계대세로 보면 조선은 유교국의 최저를 유지 하는 데도 모자란다. 대원군은 이러한 유교국가의 명군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 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처다보았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아들을 철저히 이용했고 아들의 아내까지 죽인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재필 다시 미국으로
1898년5월, 서재필은 귀국한지 2년 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국수주의적인 생각과 왕의 권력을 제한 하려는 입헌 군주제 주장은 러시아는 물론 모든 외국 세력들과 고종에게 도전하는 것들이었 습니다. 특히 미국 공사 알랜과도 서재필은 사이가 좋지 않 았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외국 공사들의 부당 한 조선이권 취득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이들이 좋아할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종 앞에서의 예의 없는 행위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행동등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양반 고위 관리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 하는 독립신문의 논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미국공사 알랜은 공사이면서 고종의 고문 이었습니다. 그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이권에 개입했던 사업이 많았습니다. 서재필은 알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재필에게 귀국 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미국에 있는 서재필의 장모에게 자신이 위독 하다는 전보를 서재필 부인 뮤리엘에게 보낼 것을 요청 했습니다. 어머니의 전보를 받은 뮤리엘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조선을 떠났습니다.
미국 귀환 후 서재필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원선 군의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의대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일을 그만 두고 문방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3월1일, 조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일을 모르던 조선 사랍들이 이제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금을 써서 1924년에 파산 선고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연 했는데, 마침 유한주식회사를 만든 유일한 씨가 1925년에 서재필에게 사징직을 맡겼습니다. 유한양행의 유명 한 버드나무 로고는 서재필의 딸 뮤리엘이 도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 병리학 전문의
1926년, 62세의 고령으로 펜실바니아 의대에 입학 하여 병리학을 더 전공 했습니다. 1929년에 조선인 서재필은 최초로 병리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 약 4년 동안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 하여 미의회로 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쿠테타 군을 지휘하여 고종에 반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 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해방과 죽음
1945년, 해방후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 할 만한 인물을 물색 하던 중 김규식의 추천으로 서재필을 초청했습니다. 1947년에, 서재필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정치 참여를 종용 했으나 모두 거절 하고 미국인 자격으로 미군정 고문관으로 일하다가 1948년9월에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조국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 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풍운아 서재필은 후두암과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투병 하다가 1951년1월5일 향년 88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유골은 화장 되어 필라델피아 안장되어 있다가 감신정변때 노비의 등에 업혀서 살아남았던 조카의 아들인 전 이화여대 법정대학장 서희원 교수와 종친회에 의하여 1994년 국립묘지에 묘셔졌습니다.
결론
우리가 이제 까지 알고 있는 역사는 지나치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악으로 강조 하고,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취약한 국력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추어서 자존심을 살리기에 치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결코 명성황후 오페라나 연속극에 나오는 지혜로운 국모가 아니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라 살림 보다는 부정 축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동 시대의 옆 나라 서 태후에 버금가는 나쁜 왕비였습니다. 전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고 후자는 작은 청 나라인 조선을 일본에게 먹히게 한 많은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은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거의 죽을 때까지 유지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 이었습니다. 그의 끈 질긴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민비 시해에 깊숙히 관련하게 했습니다. 철 없는 젊은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철저히 이용 당했습니다. 그들은 청이 조선 망국의 원인 이라고 굳게 믿었고 일본 세력을 빌려서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게 했으나,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데는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일본, 개화파, 대원군은 모두 민비가 걸림돌이었습니다. 뇌화 부동 할 소지가 농후했습니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은 권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주어진 인생을 한 순간도 낭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무식하다고 생각하여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능한 고종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애증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좀 더 계몽된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조선이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부를 때 마다 돌아와서 성의 껏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만한 인생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직시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풀린 자존심은 현 세대를 교만하고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