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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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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Music Semi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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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창회(회장 윤상래)는 브레인 네트웍의 일환으로 10월 28일 저녁 6시, Harvard University Science Center에서 열린 AI Music Seminar를 후원하여 Harvard, MIT 한인학생회, 뉴잉글랜드 과기협회 주관으로 개최하였다. 연사는 이정수 동문(공대 71)의 자제 이지원 음악 박사(Eastman 학,석사, Rutgers 대 박사)였으며, 이지원 박사는 지난 2개월 간 동창회보에 AI Music을 소개, 연재하여 오고 있다. 이지원 박사는 현재 모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강연이 끝난 후, 질문과 대답의 시간에는 참석한 56-60명의 많은 학생들이 진지한 흥미를 보였다. 리셉션에는 모든 학생들이 참여해 푸짐한 음식을 즐기면서 매우 유익한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이지원 박사의 강의를 발췌한 글이다.

AI Music Seminar outline

1.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 AI Music의 중요성/ 4차 산업혁명과 AI Music (The importance of AI music from historical point of view/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nd AI music)

역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음악은 항상 그 시대의 예술, 사회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은 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어왔다. 1차산업혁명의 인쇄술 발달로 음악세계에서는 악보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2차산업혁명의 영향으로는 철강분야에서 기술혁신이 일어나며 악기가 발달하여 연주가 편리해지고 화려한 기교의 곡들이 작곡되고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3차산업혁명의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녹음, 소리의 재생, 음악의 디지털화, MP3, 전자 악기 발명 등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현재 4차산업혁명을 맞이하며 새로운 기술들이 음악분야에도 접목되면서 인공지능 음악(AI Music)이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맥락으로 보았을 때 현재 21세기의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며 Big Data, Artificial Intelligence, Machine Learning, Robotics, Sensor 등 새로운 기술들의 영향으로 AI Music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사회의 결과물이며 음악세계의 새로운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AI Music은 21세기 새로운 형태의 현대음악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음악시장의 크기/ 음악교육의 중요성 (The size of Music market/ The value of Music Education)

음악분야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시장 중 한 부분을 차지한다. 발표자료의 예를 들면 APP ANNIE에서는 앱스토어의 수익이 2016년에 510억 달러였고 2020년도에는 약101조원까지 도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중 음악시장이 핵심이라고 발표하였다. David Sousa는 “How the Brain Learns” 라는 책에서 음악을 통해 얻는 장점들을 소개했다; 음악은 우리의 뇌를 새로운 방법들로 자극하고, 악기를 연주함으로서 학습되고 연계작용 되어야하는 새로운 운동 능력을 발전시킴으로서 뇌 구조에 심오하고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발표했다. Music School Today라는 Organization에서는 음악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학교에서도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통계가 나왔다고하였다.

3. AI Music: The State of the Art 음악은 크게 연주, 악기, 작곡 3가지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이 세가지 분야에서 현재 어떻게 접목이 되고 있는지를 보면 첫번째로 음악에서 공연을 하는 연주부분에서 인공지능이 연주를 하려면 어떠한 형태의 하드웨어로 구현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제일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로봇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지휘를 하는 형태이다. 음악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를 차지하는 악기는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고 있을까? 핸드폰과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앱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음악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피아노, 기타, 드럼, 트럼본, 플릇 등의 악기들이 앱으로 구현이 되며 대중들에게 경제적으로 구입이 어려웠던 악기들이 핸드폰을 사용한 악기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작곡은 현재 스타트업 및 회사들이 가장 많이 인공지능을 음악에 접목시켜 상용화 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이다.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게 되며 많은 광고회사, 영화제작사 또는 게임 스튜디오 등이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되는 음악을 경제적이고 빠른 시간 안에 음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곡이 마음에 안 들 경우에도 부담없이 새로운 곡으로 대체가 가능해졌다.

4. AI Music에 대한 기대 이렇게 인공지능은 음악세계에서 연주, 악기, 작곡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앞으로 이 외에도 음악교육 및 음악가들에게 여러 면으로 도움을 주는 보조역할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이 영향으로 그동안 음악세계에서 경제적 (악기를 배우는데 있어서의 값비싼 레슨비) 시간적(연습하는데 소비되는 많은 시간)으로 문제가 되었던 점들이 개선되며 대중들도 음악을 쉽게배우고 연주하고 작곡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기사제공 윤상래 회장>


미주동창회장 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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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미주동창회 회장
윤상래(수의대 62입학)

경애하는 서울대학교 동문님:

이제 무술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도 여러분의 가정에 더한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금년은 우리 서울대 미주동창회가 발족된지 27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문님들께서 온갖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시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굳건히 자리잡고 계신 것처럼, 우리 미주동창회도 27년이 지난 지금  동문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매우 건재함을 여러 동문님께 보고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전은 여기서 멈출 수가 없으며, 또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현재 미주 지역으로 유입되는 젊은 동문수는 감소하는 추세이며 기존 동문들의 고령화에 따라 앞으로 예상되는 동문수의 격감과 그로부터 오게 될 미주동창회 운영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도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평의원회의에서 구상된 ‘서울대 미주동창회 기금’ 즉

‘SNUAAUSA CENTURY FOUNDATION’ 을 이제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저희 제 14회기 회장단이 들어선 후 지난 6개월간 12 분의 동문들께서 종신이사님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참여하신 종신이사님의 수 보다 더 많습니다.  이것은 바로 여러 동문님들게서 기금 설립의 중요성에 동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난 15년간  “종신 이사회 기금” 으로  22  만불 정도 축적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더많은 동문들을 종신이사님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하며,  축적된 기금은 안전한 투자나 높은 금리로 보다 더 나은 이문을 배당 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하겠습니다.

이러한 동창회의 장래를 위한 투자를 위해 헌금을 해주신 동문님들은 미주동창회의 주축으로 동창회 역사에 영구히 남아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개개인이 모두 다른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와서 언어의 장벽과 생활 풍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살아오고 있으며, ‘서을대 미주동창회’ 라는 큰 배 위에 함께 타고 있습니다.   이 배는 우리가 모두 참여해 협력할 때 힘차게 순항을 하여 목적지로 나아갈 것입니다.

저 멀리 지평선에 떠오르는 새해 아침의 햇살처럼 금년은 우리 서울대 미주동창회가 힘차게  도약하는 찬란한 한 해가 될 것임을 저는 믿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는 바입니다.

HAPPY NEW YEAR!!!

미주동창회장 윤상래

지부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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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보내며 희망의 새해를 기원하는 송년회가 각 지부에서 열렸다.

지부회장 신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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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찬 새해를 맞이하여 미주동창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진력하신 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동문님들 내내 건강들 하시고 가내 편강과 만복을 빕니다.   알라스카 윤재중(농대 55) 회장

안녕하세요? 워싱턴주 회장 공대 기계공학과 72학번 류성열입니다. 희망찬 2018년 무술년 새해를 맞아 미주 모든 동창회원님들의 가정마다 행복과 소망을 기원합니다. 저희 워싱턴 지부도 올해 한해 새로운 각오와 생각으로 본부 및 각 지역 지부와의 협조를 통해 더욱 더 발전하는 지역동창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워싱턴주 류성렬(공대 72) 회장

동문 여러분, 무술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동문회를 위해 수고 많이하신 민병곤 이사장님 과 임원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동문들이 여러 행사에 참여하여 선후배의 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문 각 가정에 항상 따뜻한 사랑이 넘치기를 앙망하나이다.  북가주 임희례(간호73) 회장

길고도 짧은 1년이라는 임기가 끝나갑니다. 미주 지역 동창회에서 가장 큰 남가주 총동창회의 회장으로서 지난 1년의 공과를 돌아보면서, 잘된 것은 더욱 키우고 미진한 것은 개선함으로 더욱 융성하는 동창회가 되기를 희 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과 마찬가지로 2018년도에도 전, 현, 차 라는 3명의 회장이 의기 투합하여 현 회장을 중심으로 끌고 밀며 협력하 는 최고의 남가주 총동창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진짜 70, 80의 위력을 보여주는 남가주 총동창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남가주 성주경(상대 68) 회장

황금 개띠해가 왔다. 1975 년 관악캠퍼스 첫 해 가을은 황금색 들판과 은행잎으로 가득찼다. 높고 푸른 하늘과 캠퍼스는 지난 30 여년 미국 생활에 대들보처럼 마음 속을 자나깨나 지키고 있었다. 2018년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 일을 손에 손잡고 앞장 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기적은 많은 부분 서울대인들의 피땀어린 열정의 결정체입니다. 조국에서도 그렇듯이 수 많은 미주 동문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로 반듯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 니다. SNU 동문 후손들은 미국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곳곳에서 휼륭하게 성장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는 미래 동포 사회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리더할 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동창회는 개개인이 이룩한 사회 활동과 한인사회 봉사, 원로잔치, 대표적 여러 문화활동을 통해 밝은 동포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동포회 발전을 위해 동문, 동문가족, 모교 그리고 이민 사회의 보석같은 인재들과 재화를 Network하여 앞장서서 동 포사회를 리더하는 최적의 시기에 와 있습니다. 2018년 동문들과 아이디어나 조언, 해결책을 의사 소통하겠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려도 창의적 해결 방법을 찾아 동문 한분 한분이 소속감을 느끼는 동창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동포사회의 변화를 선도하기 위해 SNU동문들께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예약문화(RSVP)를 통해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둘째, 정시(On Time) 시작을 통해 개개인의 일정을 존중하고 K.Time을 개선합시다.

셋째, 동문 년회비(Annual Due) 납부로 년회비에 의한 동창회 운영이 되도록 합시다. 밝고 희망찬 새해, 좋은 일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남가주 강신용 (사대 73) 차기회장

미국 땅 바쁜 생활중에도 동문회의 좋은 선후배들 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 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동 문회를 통해 소중한 만남 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 다. 동문 여러분 가정에 복 과 즐거움이 가득한 새해 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샌디에고 이제봉 (인문88) 회장

영하의 추위에도 씩씩하 게 건재하는 미네소타 동 문들을 대신하여 신년 인사를 드립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미주 동문 여러분들의 건강과 평안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미네소타 황효숙(사대 65) 회장

새해에는 동문 여러분의 가정과 미주 서울대 총동창회의 모든 일이 술술 ( 茂戌年) 잘 풀리고 다복하 시기 바랍니다. 또 금년에는 미주동창회의 오랜 숙원사업이며 발전의 초석이 될 “서울대 동창회관” (SNU-HOUSE) 건립 추진의 원년이 되어 많은 발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전미 각지의 “오뉘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싶어 하는 따뜻한 모임이 되고, 나아가 모교 발전에 기여하는 동창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카고 홍혜례 (사대 72) 회장

동문들께, 다가오는 새해 를 맞이하여 동문들 가정에 행복과 평안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나간 한해에 보여주신 친분과 도움을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건강과 희망이 또한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오하이오 이성우 (상대 72) 회장

하트랜드에 거주하시는 선, 후배 동문님 여러분, 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 다. 저는 작년 9월 하트랜드 동창회 20차 정기모임에서 11대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오명순(가정 69 입)입니다. 동창회보를 통해 여러분에게 신년인 사를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동창회는 6개주가 포함되기 때문에 장거리 운전도 마다 하시지 않고 여러 모임에 참여해 주신 선후배 동문님들에 게 이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에도 하트 랜드 동창회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해 온 것처럼 지역사회의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 수여, 춘계 친선골프 모임 및 임원/ 이사회 모임(4월 말경), 9 월 15일의 정기 동창회, 그리고 12월 초에는 송 년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역 동문님들 가정의 경조사에도 동문님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가교역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동문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가정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하트랜드 오명순(가정대 69) 회장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회 장님과 미주 동문께 휴스턴 동문 모두의 마음을 담아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휴스턴 구자동(상대 70) 회장

일년 항상 따뜻하고 바다가 아름다운 Florida 에서 미주 서울대 동문 여러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찾아오는 2018년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시고, 나이를 떠나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 제목처럼) 동문들이 자주 만나는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한인들이 많지않은 Florida 에 더 많은 동문들이 방문하고 이주하는 2018 년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플로리다 조동건 (공대 69) 회장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 쁨 중의 하나는 날마다 가 새롭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사다난 했던 지 난해는 역사의 한 페이 지로 넘기고 두근 거리 는 마음으로 새해라는 선물 꾸러미를 열어 보 아야 하겠습니다. 그 꾸 러미 안에 있을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을 기 대하며. 2018년에도 서 울대 미주 동창회원, 조 지아 지부 회원 및 그 가 족 모두에게 신의 은총 이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원 합니다.             조지아 김종구(수의 73) 회장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임을 안겨줍니다. 새해의 바람 중 하나는 우리 동창회를 통하여 동문들과 함께 우리 지역사회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는 동창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회의 고령화와 추세와 함께 저희 동창회 참여 멤버들의 고령화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선배들과 후배들의 삶의 가치와 생각의 기준이 다름은 우리 동창회에서도 만나는 어려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워싱톤 지역 동창회는 선배님들의 넓고 깊은 사랑과 이해의 창으로 후배님들의 거리감 없는 마음과 가족같은 푸근함을 느껴지게 해주시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새해엔 우리 모두 서울대인의 지성과, 한국인의 정서와, 미국시민으로서의 자유평등을 지향하며, 인류애를 나누는 새해가 되었 으면 합니다.   워싱턴 DC 안선미(농대 65) 회장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동 문님들께 새해 인사드립 니다. 새해에 좋은 복 많 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더욱 행복하세요! 필라동문회에서는 12월 초에 연말파티 및 비전공 동문음악회를 매우 즐겁 고, 정겹게, 또 멋지게 가 졌었습니다. 올해 미주동 창회 모임에서 뵙게 되기 를 기대하며, 더욱 화합 하고 발전하는 미주동창 회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필라델피아 박혜란(음대 84) 회장

지나간 2017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던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저희 뉴욕지역 동창회는 임원, 단과대 회장단, 그리고 동문님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으로 이사회/총회, 추계골프대회, 그리고 송년의 밤 등 큰 행사들을 모두 성황리에 잘 치루어서 2017 년의 좋은 추억으로 남겼다는 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별 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잘 뭉치지 못하는 것이 서울대 출신들의 특징인 것처럼 혹평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과시 하고도 남을 기록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본 동창회가 지역사회의 그늘진 곳을 살피는 일을 시작한 것은 세인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역시 서울대학교는 다르다는 칭송을 받기에 송구할 만큼 미약하게 시작을 하였는데, 앞으로 더 진전이 이뤄져서 모교의 명예와 동문들에게 긍지를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새해 2018 년에도 여러 동문님들 여전히 건강하시고, 내내 평강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뉴욕 이대영(문리 64) 회장

먼저 커네티컷 동문들의 안녕과 새해에 모두 건강하시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같이 갈 수 있는 희망의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은 여러가지 일에 참여하여 신년에는 결실을 맺는 해로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울 대학 미주총동창회에 지부로 등록을 마치고 준비 작업을 75% 했고, Oversee Mission Study Center 에 trustee로 참여 하게 되었으며, 10월에는 터키를 방문해 난인들을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여러 단체를 방문하고 난민들의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역을 통해 모슬렘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왔습니다. 저희 부부의 사역까지 4개의 fund raising을 부담하고 잘 조율할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커네티컷 동문들의 보람있는 모임을 위해 동문들의 조언과 협조를 구합니다.  커네티컷 유시영(문리 68) 회장

2018 년 새해에는 우리 서울대 동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사랑과 기쁨이 같이 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 동문님들은 자기가 하기를 원한 분야에서 professional로서 많은 것을 성취하신 훌륭하신 분들 입니다. 우리의 삶의 만족도를 보면 professional 로서 오는 삶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나 social interaction에서 오는 만족도는 그리 높지가 않습니 다. 그 이유는 미주 동문들이 caucasian dominated cultural society 에 살고 있 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주류사회에 참석하여 social interaction을 가질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을 보았고, 대부분이 미주류사회에서 outsider 로 보여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이도 저희들에게는 미주 서울대 동창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총동창회 및 지역 동창회에 active 하게 참석하셔서 social interaction 에서 오는 만족도를 증가시키십시요. 새로운 activity group (i.e. hiking, travel, medical advisory, health, history, politics, local small group, …)을 만들어 참여하여도 좋습니다. 더욱 건강해지고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뉴잉글랜드 박영철(농대 64) 회장

남가주 송년회 단과대학동창회별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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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 법대동창회 정기총회 및 송년모임

<p><span style="font-size: 9pt;">지난 12월 12일 Oxford Palace Hotel에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남가주 동창회(회장 정인환, 법대 54) 주최로 2017년 정기총회 및 송년모임이 6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최진석(법대 64) 총무의 사회로 진행된 이 정기총회는 정인환 회장의 개회사로 시작하여 교가 제창(피아노 반주: 제갈소망, 음대 02)에 이어 정인환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이어 참석자 소개로 이어졌는데, 초대 손님으로는 성주경(총동창회장, 상대 68), 강신용(수석부회장, 사대 73), 김지영(전 총동창회장, 사대 69), 김병연(전 총동창회장, 공대 68), 한효동(공대회장, 공대 58), 한귀희(미대회장, 미대 68), 위진록, 김동석(전 총동창회장, 음대 64), 홍선례(문화위원장, 음대 70) 등이 참석하였다.

이어서 이창신(법대 57) 재무의 사업보고 및 재무보고가 있었고, 2018년 신임회장으로는 최진석 동문이 선출되었다. 이어 정인환 회장에게 1년 동안 수고한 노고에 대한 감사패 증정이 있었다. 다음 최진석 신임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단체사진 촬영에 이어 점심식사로 이어졌고, 홍선례 문화위원장이 2017년 한 햇 동안 있었던 법대 정기 오찬모임 사진 남가주 법대 동창회 정기총회 및 송년모임 을 슬라이드로 보여 주었다.

이어 2부로 계속되었는데, 김동석(전 UCLA 민족음악과 교수) 동문이 “한국음악의 참 의미”라는 주제로, 가야금과 장구 등의 연주를 곁들인 열띈 강연에 모두 숙연한 분위기였다. 다음은 소음악회로 계속 최진석 신임회장 되어 최혜성(음대 99) 동문이 플룻 독주로 John Rutter’s 작곡 Suite Antique, 를 연주하였고, 제갈소망(음대 02) 동문이 피아노 독주로 N. Kapustin 작곡 Variation Op. 41을 연주하였는데, 이 완숙한 연주는 박수 갈채를 많이 받았다. 특히 제갈소망 동문의 앵콜 곡인 크리스 마스 캐롤 메들리 연주는, 그 활기차고 박 력있는 연주에 동문들이 끊임 없는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여 장내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웠다.

다음 3부인 마지막 순서는 최송규(법대 ?) 동문의 사회로 진행된 경품추첨 및 노래자랑 시간이었다. 이태로(법대 56), 홍세봉(법대 67), 한효동(공대 58) 동문들이 가라오께 반주로 열창하였다. 동문들은 푸짐한 선물을 가슴에 안고 다음 만날 날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기사제공: 홍선례 편집위원]</span></p>

 

남가주 공대동창회 총회 및 송년회

<p><span style="font-size: 9pt;">지난 12월 8일 다운타운에 위치한 "작가의 집" 에서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남가주 동창회(회장: 한효동, 공대 58) 주최로 정기총회 및 송년모임 행사가 있었다. 이 날 공대 동문들과 친지, 그리고 외부 초청 인사 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위종민(공대) 총무의 사회로1부 정기총회가 시작되었다. 교가와 공대학가를 제창하였는데, 서치원(전 총동창회장, 공대 69) 동문이 선창하였다. 다음은 고 이재겸(공대 57) 동문을 추모하는 묵념이 있었고, 한효동 회장의 인사말이 다음과 같이 있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 참석하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이 자리가 있기까지 수고하신 여러 동문들과 후원하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참석하신 모든 동문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이어 참석자 소개가 있었고, 성주경(상대 68) 총동창회 회장의 축사에 이어 조정시 (공대) 부회장의 사업보고와 차기민(공대) 재무의 재무보고가 있었다. 다음 한효동 회장이 권국원(공대 69) 전 동창회장에게, 2016년 한 햇 동안 공대 동창회의 발전과 동문 상호 간의 친목도모에 헌신한 노력에 감사드리며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하는 뜻에서 감사패 증정이 있었고, 홍선례(음대 70) 문화위원장에게, 음대 동문으로서 지난 12년 동안 공대동창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함을 치하하는 공로패 증정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신임회장은 한효동 현 회장의 연임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임원들도 자동 연임하기로 결정되었다. 한효동 신임 회장은, “저희 공대 남가주 동 창회는지난 1968년에 정형조(공대 초대회 장, 공대 45) 동문을 비롯하여 김동명(공대), 최순달(공대 50), 홍용식(공대52) , 김병 삼(공대 52) , 김병준(공대 51), 박경식(공대 53), 장준철(공대 56), 김영기(공대 52), 장동호(공대 53), 박병기(공대 54), 한효동 동문 등이 모여 공대 동창회가 발족 되었습니다. 오는 2018년은 공대 동창회가 창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당시 창립 멤버로서 유일하게 LA에 남아 있는 제가, 공대 새 주소록과 공대 남가주 동창회 50주년 기념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오니 많은 동문들의 참여와 후원을 부탁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특별 출연한 숙대합창단의 “꽃구름 속에, 캐롤송 메들 리” 합창은 장내를 가득 메우며 벽에 걸린 화가들의 추상화 그림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하였다. 다음 단체사진 촬영과 저녁 식사 후 2부는 박영호(공대) 동문의 "화성 탐사" 강연으로 이어졌다. 3부 여흥 시간에는 최경홍(공대) 동문이 이끄는 Line Dance 가 있었는데, 30여명의 동문들이 앞으로 나와 흥겹게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어 경품 추첨에서는 성주경 총동창회장이 1등상 (한국 왕복 비행기표)에 당첨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노래자랑 시간에는 모두 앞을 다투어 기량을 펼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기사제공: 홍선례 편집위원]</span></p>

 

남가주 음대 동창회 송년모임 및 총회

<p><span style="font-size: 9pt;">지난 12월 12일, LA 한인타운에 위치한 용수산 한식당에서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남가주 동창회(회장: 최명용, 음대 64) 정기총회 및 송년회가 열렸다. 음대 동문과 친지, 그리고 초대 손님 등 50여명이 참석하였다. 최명용 회장의 개회선언에 이어 교가제창이 있었고, 회장 인사말이 있었다. 성주경( 상대 68) 총동창회장은 인사말에서, “지난 9 월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남가주 동창회 연주회는 일반 음악전문인의 연주회 중에서도 톱 클라스의 클래식 연주회였습니다. 앞으로도 전문성을 살리고 또 전도가 양양한 후배들이 우리 서울대를 빛내주는 자리를 계속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음대 동문들의 전문성을 치하하였다.

다음은 참석자 소개로 이어졌다. 성주경 총동창회장, 강신용(사대 73) 수석부회장, 김상찬(문리대) 전 총동창회장, 김병연(공대 68) 남가주 음대 동창회 송년모임 및 총회 전 총동창회장, 한귀희(미대 68) 미대회장 등의 동문들이 초대손님으로 참석하였다. 이어 김미자 (음대) 총무의 사업보고와 송란(음대) 회계의 회계보고가 있었다. 다음 신임 회장 추첨 및 인준이 있었는데, 서정화 동문이 2018년도 회장으로 결정되었고, 신임회장 인사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많은 선배 님들이 수고하셨는데, 앞으로 역대 회장님들 의 뜻을 본받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 김영(수의대) 전 총동창회장이 전하는 장학금 전달식이 있었다. 수상자는 조가현(음대), 제갈소망(음대 02), 등이다. 김영(수의대) 회장은 1년에 1~2번씩 해마다 자택에서 홈콘서트를 열며 음대 동문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이어 홍선례(음대 70) 문화위원장의 단체사진 촬영이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는 최명용 회장이 손수 초대 손님들에게 와인을 권하며 건배를 하기도 했다.

다음은 재즈콘서트로 이어졌다. 밴드에는 이호 (음대 90) 동문과 친구들이 수고하였는데, 음색이 고운 외국인

소프라노와 앰프 기타 반주의 은은하고 감미로운 팝 멜로디는 파티장을 가득 채워 어느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을 방불케 하였다. 다음 김미자 동문의 사회로 게임이 진행되었으며 동문들은 푸짐한 상품을 한아름씩 안고 즐거워하며, 새해 복을 서로 빌어주며 헤어졌다. [기사제공: 홍선례 편집위원]</span></p>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전통과 신단수 최은관(상대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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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관(상대 64)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에서 네 강이 흘러나갔다고 하는데, 피숀과 기혼이라는 강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은 지난 몇천 년 동안 흐름이 조금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대체로 그 자리에 흐르고 있다. 에덴 동산은 이 두 강의 상류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메르인은 중국인과 인도인을 앞서,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일으킨 족속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5천 년경에, 유 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였다. 세상에서 첫 도시 에리두에서 우바이드 문화가 일 어났고, 수메르인은 키쉬, 라가쉬, 우륵, 우르 등지에서 도시 국가를 세웠다. 수메르인은 노아 홍수로 이름난 아라랏산 지역에서 살다가 농부가 되려고 두 강 사이의 지역으로 옮아갔다는 설이 있다.

1.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전통

우바이드(Ubaid) 문화의 도자기를 보면 돌림판을 쓴 흔적이 보이는데, 이미 기원전 5000년경에 수메르인이 바퀴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원 전 2100년경에 쐐기 문자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홍수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은 구약의 홍수 이야기보다 적어도 1천년을 앞선다. 또한 길가메시는 생명나무가 있는, 딜문의 바다에서 생명 식물을 얻는다. 이 식물을 먹으면 젊음 을 되찾는다고 하는데, 뱀이 이것을 훔쳐가서 길가메시는 불사의 희망을 잃고 슬피 운다. 이 이야기도 창세기에 아담이 생명 과일을 못 먹게 되어 죽는다는 이야기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인은 모세의 시대에도 글자가 없었고,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알파벳을 빌려 쓰고, 3세기에나 아람어 알파벳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후일에 아카드(Akkad) 제국의 사르곤 왕(Sargon the Great, 기원전 2334-2279 년)이 수메르를 점령하였고, 다시 기원 전 1894-1595년에 아모리 족속이 일어나 바빌론 제국을 세웠다. 수메르를 점령했어도, 바빌로니아인은 우수한 수메르인의 문화를 존중했고, 쐐기문자와 생명나무 전통을 이어받았다. 길가메시서 사시(Epic of Gilgamesh)는 셈족의 아카드 언어로 쓴 이야기이지만 쐐기 문자로 기록되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어, 바빌론에서 왕궁을 확대하고 이쉬타(Ishtar) 대문을 지었는데, 이것은 5층 건물의 높이다. 색칠한 타일로 지어진 이 대문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대문에는 생명나무 네 그루가 그려져 있다. 생명나무는 큰키나무가 아니라, 일 종의 관목이고, 꽃이 많이 핀다. 생명나 무의 가운데 꽃술은 노란 색이고 꽃잎은 흰색이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던 히브리인은 기원전 1050년경에 나라를 세웠으나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가 분단되었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씨리아에 점령당하여 망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나라를 잃었다. 느부갓네살이 점령했을 때, 유다의 인구는 7만5천에 달했고, 약 2만 명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데려갔다.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의 키루스(Cyrus) 대제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나서 이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거의 50여년 동안 바빌로니아에서 포 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인에게서 생명나무 이야기를 얻어 들었고, 상당히 와전된 형태로 생명나무 이야기를 창세기에 올려놓았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은 이들로부터 풍문만 들었고, 실물도 그림도, 浮彫로도 생명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직물이 발명되지 않아서, 당시에 수메르인은 아담과 이브처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걸쳤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이야기는 뒤이은 셈 족속, 바빌로니아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인은 글자뿐 아니라, 수메르인의 문화와 교육제도를 통째로 삼켰고 이쉬타 대문에 타일로 생명나무를 크게 새겼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 문화를 존중하여, 진흙 서판에 수메르-아카드어 사전까지 만들었다. 님롯(Nimrod)에 있는 북서 궁전(기원전 865년경)의 벽은 설화석고 부조(浮彫)로, 수십 장면에 생명나무와 날개 달린 압칼 루(Apkallu, 생명나무를 지키는 보호 영) 가 새겨져 있다 (출처: 대영박물관). 이 부조들은 높이가 2미터나 된다.

 

윗 사진에는 생명나무 양쪽에, 날개 달린 수호 영들이 이파리에 붙은 이슬을 가죽 주머니에 담고 있고 (물이 많이 담긴 자루는 아래가 불룩하다), 다른 벽에는 그렇게 모인 이슬을 淨化 의식 중에, 솔방울로 임금의 뒷머리를 적시는 장면이 새 겨져 있다. 생명나무는 일종의 떨기나무이다. 가지의 사방에서 잎파리가 생기고 꽃은 기본 줄기의 맨 밑에, 중간에, 그리고 꼭대기의 큰 잎파리 밑에 솟아난 것이 보인다. 또한 생명나무 꽃봉오리가 있는 가지와 만발한 가지들을 따다가 성전 예식에 쓰는 장면이 다른 벽에 새겨져 있다. 직접 보지는 못하고 수메르인에게서 말만 들었어도 이 아씨리아인들은 생명나무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상당히 애를 쓴 것이 눈에 보인다. 본 적이 없어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리거나 새기지는 않았다. 떨기나무이니까 꽃에서 조그만 베리같은 열매가 많이 열렸을 터이고, 아담과 이브는 이 열매와 이파리를 먹었을 것이다. 왕궁의 벽에 이러한 부조를 새긴 의도는 수호영이 생명나무 이파리에 묻은 이슬로 하늘이 선택한 임금을 정화시키고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예식을 묘사하려고 한 듯하다. 이처럼 수메르 지역에 굴러들어온 셈 족속은 생명나무 전통을 소중히 여겼다.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셈족 이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이들에게 밀려서 고향을 떠난 수메르인 의 일부는 유럽ㆍ크레테ㆍ에집트로, 일 부는 아라랏 산과 중앙 아시아로 흩어 졌고, 소수파는 한반도까지 왔을 가능성도 있다.

2. 왜 환웅의 아들을 단군이라 지었는가?

수메르인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농업을 시작하고 맥주와 쐐기문자를 발명하였다. 돌이 귀하여 돌로 지은 건물은 없고, 겨우 진흙으로 빚고 햇빛으로 말린 벽돌로 도시를 건설하고 지꾸랏을 지었다. 지꾸랏(ziggurat)은 3단계의 피라미드로 되어 있고 내부는 진흙 벽돌로, 겉은 구운 타일(평평한 기와)로 치장하였다. 기초는 가로 64미터, 세로 46미터가 되며, 높이는 30미터 정도였을 것이라 한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3층에 성전이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질 경우에 사제들이 맨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직각으로 만나는 두 계단을 거쳐 첫째 플랫폼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사제들은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통제하였다. 세월이 지나자 진흙 벽돌은 비에 씻겨 허물어졌고, 따라서 오래된 지꾸랏 꼭대기에 있던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단군이라는 말은 신단을 쌓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환웅 부족이 곰 부족을 동원하여 규모가 작은 지꾸랏을 이렇게 세웠다면, 그를 당연히 단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 상징으로 세워 놓은 신성한 생명나무를 신단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환웅이 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을 가져왔고, 이것들을 신물로 취급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곰 부족이 아직 신석기 시대의 부족이었고, 청동 기물을 신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왔으니, 환웅은 하늘에서 온 사람처럼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이다. 환웅이 수메르에서 왔다면, 단군은 아버지의 부탁대로 고향의 지꾸랏과 같은 신단을 쌓았고, 그 때문에 환웅은 아들의 이름을 단군이라고 지었을 듯 하다. 그러면 신단 또는 天檀은 무엇 때문에 쌓는가? 한국인이 하늘님을 믿었듯이, 중국인은 상제(上帝)를 믿었다. 공자가 쓴 서경(書 經)의 요전(堯典)에는 순(舜)임금(기원전 2230년 경)이 上帝에게 제사를 드렸다 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서민호 교수) 물론 우리는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 불렀고, 한자가 들어온 뒤에 그를 상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였다. 오소운 목사에 따르면 상제 개념은 중국인이 한국인에게서 배운 것이라 한다. 옛날의 고조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 서, 구경하는 중국인에게 삼신일체 이론을 자상하게 설명했을 리는 없다. 중국인은 한국인이 상제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보고 흉내내기만 했고, 하늘을 우러러 중얼중얼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늘님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배웠으나, 삼신일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중국인 사이에는 삼신일체 개념이 문서 에 기록되지 않았다. 중국인이 섬긴 상제는 그저 하늘에 계신 상제요, 고조선의 상제는 삼신일체 상제 였다. 오소운 목사의 말씀대로,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로부터 옛 중국인이 상제 사상을 배웠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 면 우리의 선조는 이 개념을 독자적으로 발명했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빌려왔는가?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기원전 2700 년부터 수메르 사람들은 三神一體 또는 삼위일체를 믿었다. 아누(Anu)는 하늘의 첫째 신, 아버지요, 신들 중에 제일 높은 이다. 아누는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엔릴 (Enlil), 곧 공기와 땅의 신, 창조하는 신이고, 엔키(Enki, 또는 Ea)는 물의 신, 지혜의 신이다. 이것은 天神ㆍ地神ㆍ人神이 하나가 된다는, 고조선의 삼신일체 개념과 대체로 비슷하다. 중국인에게 삼신일체 사상이 없다는 것은 중국인과 수메르인 사이에 (종교적) 접촉이 없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한국인이 삼신일체 상제를 믿었다는 것은 고조선 이전의 한국인(곰 부족)이 수메르 인과 접촉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열리기 이전의 한국인은 수메르인으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배워서 상제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오소운 목사에 따르면 "태조 3년 (1394 년)에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과 기우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고 하여 임금이 그대로 천제를 지냈으나, 중국의 압력으로 결국은 1464년에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조선 땅에서 천단의 제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명나라 시대에 북경에 지은 천단의 크기는 자금성의 네 배나 된다.

3. 단군신화와 에덴 동산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생명나무 이야기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이것은 환웅 부족이 곰 부족과 관련을 가진 것은 사르곤 대제가 수메르를 통일했을 때나 그 직후가 아니라 훨씬 후였음을 암시한 다. 오히려 신단수와 신시(神市)의 이야기는 에덴 동산과 아담이 거기서 쫓겨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느님의 아들은 여럿이 있었고, 그 중에 서자 환웅은 처음에 신단수가 있는 신시로 갔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기도했다는 말은 신시가 수메르와 한반도 사이에 어딘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에덴 동산 이야기의 비슷한 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환웅은 하나님의 서자이다.

 아담의 무대는 에덴 동산이었고, 환웅의 무대는 神市였다.

 에덴 바깥에는 가인이 생명의 위협 을 느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 고, 환웅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니 사 람이 이미 많이 살고 있었다.

 에덴에서 쫓겨난 뒤에,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제단을 쌓았으며, 환웅의 아들 단군도 신단을 쌓았고 거기에는 신단수가 있었다.

 (창세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고, 하늘에서 온 환웅은 웅녀를 아내로 삼았다.

 아담은 생명나무만 있으면 영생할 수 있었고,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항상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 단군신화는 신단수가 생명을 주는 나무인 것을 강조한다.

에덴 동산 바깥에는 생명나무가 없으므로 아담은 결국 죽어버린다. 신단수가 있는 곳으로 환웅이 내려가서 신시를 세웠다는 것은 신단수가 영생에 필요한 것을 암시한다. 환웅은 천부인 세 개를 가져왔지만, 불멸하지 않고 (기록에는 없지만) 결국 죽었다. 단군이 신단을 쌓았다면,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와 단군의 신단수 이야기를 독립된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쳤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수메르 문명이 최초의 문명이었으니까, 수메르인이 단군신화를 베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빌로니아의 생명나무와 에덴 동산 이야기가 한반도까지 전해졌지만 글자가 없었던 시절에 곡해된 형태로 우리에게 단군 신화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우수한 청동기 문물을 가지고 왔다면, 신단수는 생명나무였을지 모른다. 신단수라는 나무 앞에서 웅녀가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고, 단군은 자라서 신단을 세웠기 때문에 그 아들을 단군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는 곰을 숭상하던 부족들의 곰 토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랄 산 지역과 내몽고(홍산 문화)에는 곰을 숭상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곰 토템 부족이 살던 곳이 우랄 산이나 내몽고 지역일 가능 성이 높다. 이것은 환웅 부족이 아마도 옛 고향 아라랏 산을 지나서, 우랄 산 지역이나 내몽고의 홍산 지역에서 곰을 숭상하던 부족과 서로 결혼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커네티컷 동창회 설립 기념 유시영(문리 68) 초대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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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26차 평의원 회의(보스턴)에서 만장일치로 인준을 받고 미국내 26번째 지역동창회로 등록한 커네티컷동창회 초대회장 유시영(문리 68) 동문이 본 회보와 미니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는 지난 9월 10일 보스턴에서 가졌던 회보 편집회의를 마치고 신응남 차기회장 부부, 김원영 편집장이 뉴욕으로 귀환하는 길에 유 회장의 자택을 방문하여 하게 되었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의 방문에 말끔한 잔디 정원과 잘 가꾸어 놓은 꽃밭과 각종 채소, 허브 밭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유 회장 부부는 밝은 얼굴로 오래된 친구라도 방문한 듯 따듯하게 맞아주셨다.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덱(Deck)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다 어둠이 내려서 안으로 자리를 옮겨 화기애애한 가운데 인터뷰를 계속했다.

<사진: 단체로 뉴욕 관광을 하는 커네티컷 동문 가족>

 

* 커네티컷 주에 서울대 동창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

유시영 회장: 미국을 25개 지역으로 나누면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커네티컷 주에 동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임을 하겠다는 미주동창회 명의로 나온 4 줄 3단 기사를 지역 한인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한 후, 김정현 전 편집장님, 손재옥 전 회장님과 수시로 연락하며 지부 설립과 관련한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김정현 전 편집장님은 동창회보 6개월 분을 보내주며 동문 모임을 결성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모임이 동창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커네티컷 거주 동문이 일부 포함되었던 뉴욕지역 동창회의 김도명 전 회장님과 뉴잉글랜드 동창회의 정태영 전 회장님의 배려로 지부를 형성해 보겠다는 마음을 굳힌 후, 평의원 회의에도 참석하여 마침내 평의원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지부 결성의 인준을 받아 미주 26번째로 커네티컷 동창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평의원 회의 바로 전, 뉴욕지부 회장님이 뉴욕지부 회원 명단에서 커네티컷 주에 주소가 있는 51명의 명단을 저에게 메일로 보내주셔서 저희 명단과 합하여 77명의 명단을 평의원 회의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 커네티컷 거주 동문 분포?

유 회장: 주로 젊은 층보다는 장년이나 노년의 동문이 많으시고, 의사, 교수, 비즈니스 하시는 분 등 여러 분야에 종사하고 계 십니다. 단과대학은 주로 공대, 상대, 문리대, 음대 동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 비영리 단체 등록?

유 회장: 7월 31일부로 커네티컷 주 정부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을 마치고, IRS로부터 TAX ID (EIN)도 받았습니다. 이제 동창회 지부로의 법적 절차를 마침으로써 미주동창회의 Group Tax Exempt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적인 절차를 마치는데, 뉴욕의 신응남 차기회장께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 동창회 정관이나 회칙 준비?

유 회장: 저희 지역은 처음에 회칙도 없었고, 회비도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30 정도 참가비를 받고 럽스터 디너 파티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곤 했습니다. 손재옥 전 회장님이 필라델피아 동창회 회칙을 보내주셔서 현재 이를 참고하여 기본적인 틀은 만들어 놓았 습니다.

* 동문 모임이나 앞으로 계획하는 행사를 소개?

유 회장: 그동안 모임을 가져온지 얼마되지 않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많이 모이면 20명 정도 모이는데 자녀들을 동반한 가족모임을 권장합니다. 지난번에는 단체로 뉴욕 관광을 다녀 왔습니다. 앞으로 동문들이 참여하고 모이면 베네핏을 주려고 합니다. 은퇴하신 동문은 동창회가 결성된 것을 무척 반기십니다. 2017년 연말에 송년 파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 커네티컷 주에서 사시는 이야기?

유 회장: 70년대에 빈 손으로 미국에 이민 와서 전화회사에서 19년 간 일한 후, CSC 라는 컴퓨터 관련 업체에서 2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살기까지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 유은주 선교사님과 함께 주위 노숙자(홈리스)를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내는 2002년에 ‘아가페 노숙자 교회’를 창립하여 매일 아침 7시 교회에서 교인들과 예일대 학생 봉사자와 함께 노숙자를 위해서 커피를 끓이고, 빵과 따듯한 수프를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지난 15년 동안 해오고 있 습니다.

* 커네티컷 동창회 가입을 위한 연락 처는?

유 회장: t60syu@gmail.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잘 가꿔진 유 회장 자택의 꽃 밭을 배경으로 신응남(농대70) 이희만(간호대70) 미주동창회 차기회장 부부와 유시영 회장

뉴욕 변호사 시험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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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원(문리대61)

2001년 5월 8일, 나는 이 날 아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일찌감치 출근한 나는 괜히 커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갔다 왔다 하면서 마음을 진정한 다음 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을 열고는 뉴욕 변호사 시험 결과를 클릭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전날 밤 12시에 컴퓨터 상에 뜨게 되어 있었으나 괜히 태연을 가장 하느라고 일찍 자고 회사 출근 때까지 확인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알파벳 순으로 나오는 합격자 명단은 내 이름자가 나오는 Y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Y 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마냥 콩닥거렸다. 여태까지 참고 태연을 가장하고 마음을 진정했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Yeon Bong Won 이란 내 이름이 화면에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나왔다. 눈을 들어 다시 봤지만 눈가에 서린 물기로 화면이 뿌옇기만 하였다. 눈을 씻고 내 이름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안 지난 2년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나는 1964년 1월에 브라질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4.19 그리고 5.16을 겪은 우리 세대에게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시골에서 논 팔고 소 팔아서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냈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었던 때. 오죽하면 당시의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상아탑(象牙塔)이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 짓는데 꼭 필요한 소를 팔아서 그 뼈로 세운 우골탑(牛骨塔)이란 자조 섞인 말까지 나왔겠는가? 고등 실업자를 양산한 사회에서 오갈 데 없는 청년들은 하루 종일 다방에 모여 앉아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담배나 피워대며 빽 없는 타령만하고 정부와 사회에 대한 적개심만 키워 가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우리 역사를 상고해보면 고려 시대까지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던 사회가 조선(朝鮮)에 들어 와서는 나라를 꼭꼭 잠그고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 경우에는 극형을 처하는 쇄국(鎖國) 일변도로 500년을 다스려 왔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비 애국자 취급을 하면서 심지어 4-5년 걸리는 유학생에게도 가족은 본국에 떼어 놓고 당사자만 유학을 보내는 정책을 취했다. 대학생이던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서는 우리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하던지 여기서 탈출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날 외국여행이 자유화되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국교가 맺어져 있어 뜻만 있으면 어디든지 여행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1960년 대의 우리 나라 실정이었다. 당시에 만일 누군가가 우리 나라가 미국에 승용차를 수출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4.19 세대인 나는 4.19 혁명 후 사회 분위기가 일시에 변하고 의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느꼈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더니 마구 잡이로 학생들을 구속하고 어제까지도 존경의 대상이던 고명한 교수가 정부의 어용(御用) 교수로 돌변하는 세상에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다.

내가 결정적으로 외국 이민을 결심한 계기는 영화관의 조조(早朝) 할인제였다. 할 일 없는 청년으로 득시글거리는 데 착안한 극장이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반값으로 할인 한다고 선전하자 극장은 대학생으로 초 만원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계 어디에 아침 8시부터 영화관이 대학생으로 초 만원을 이루는 나라가 있겠는가?

 5.16후 박정희 대통령은 과밀 인구와 실업자 해결 그리고 현 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제거 하는 방책으로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했고, 마침 브라질에서 농업 이민을 받겠다고 해서 이민 문호가 열렸다. 난 남미고 아프리카고 간에 어디든지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어렵게 노력해서 1964년 1월 18일 브라질로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말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동포도 거의 없는 브라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젊음과 의지 그리고 성실성 하나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공부를 계속할 마음이 생겼다. 나의 친구들은 브라질 말인 폴투갈어를 배울 용기가 없어서 대학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지만 나는 독하게 결심하고 한 1년 준비한 후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브라질 법과 대학은 5년 과정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5년 후에 졸업을 하고 변호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변호사 자격증을 받아 쥐고 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더군다나 부모님과 가족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내 책임을 통감하였다. 변호사 라이선스를 받자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한인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업무가 폭주하였다. 이것도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어느덧 지천명(智天命 )의 나이인 50을 넘기고 나니 언제나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미국은 법과 대학이 아니라 법과 대학원 제도로서 그것도 3년이나 공부해야 한다. 내 나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3년간 공부만 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외국에서 법과 대학을 나온 사람은 1년에 마치는 코스가 있어서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결심했다. 여러 대학과 연락한 결과 보스턴 법과 대학원(Boston University Law School)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입학 허가를 받고도 난 근 일년을 망설였다. 35년간 살던 브라질 땅을 하루 아침에 정리하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생소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8년 8월, 50이 넘은 나이에 20-30대 학생들과 입학식을 치르고 나니 만감(萬感)이 교차하였다. 내가 학생 중에는 나이가 가장 많았고 대부분의 교수들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미국 법과 대학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까짓 남이 하는 것 나라고 못하겠나 하는 만용(蠻勇)에 가까운 심정으로 부닥쳐 보았으나 강의를 쫓아가는 것도 허덕거릴 지경이었다. 일생을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 살다가 갑자기 미국에 와서 이곳에서 성장하고 초, 중, 고등 학교에 대학 4년까지 마친 우수한 학생들과 영어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무모하게 생각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몇몇 교수는 심한 보스턴 사투리를 기관총처럼 내 뿜으며 강의 하는데 받아 쓰는 것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미국 법과 대학원 (Law School) 강의는 약 100 년 전 하버드 법과 대학장이 시작하였다는 일명 <소크라테스 식 강의법>을 사용한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2,500년전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문답식 강의다. 아무 학생이나 예고 없이 불러서 질문을 하면 학생은 즉시 답을 해야 한다.

그리스의 원형 극장처럼 생긴 강의실에 학생 좌석이 정해지므로 강의 하는 교수는 어느 자리에 앉은 학생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어 있다. 한국처럼 대리 출석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강의 도중에 교수는 쉴새 없이 이름을 불러서는 질문을 하고 그 학생의 대답이 시원치 않을 때는 다음 학생을 지적 하고 하는 식이다. 준비를 어설프게 하고 수업에 들어 갔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나오게 된다. 강의 시간에 한번 망신을 당한 것을 잊어 버리려면 적어도 3개월은 걸린다고 학생들이 이야기한다.

나이 들어 외국에 와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도와준 것은 우리 유학생들이었다. 나이 많아서 공부하겠다고 온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강의 내용이라던가 각 교수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 채 받아 쓰지 못한 과목의 요점을 정리한 노트를 빌려 주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또 한번 진한 동포애를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가다가 점심이나 저녁을 사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 법과 대학원생들의 열심히 공부하는 태도에 놀랬다.  밤 11시 30분까지 도서관은 학생들로 꽉 차 있다. 시험 때는 24시간 도서실을 개방하는데 새벽 2, 3시에도 만원인 것을 보고 미국 학생들은 놀기도 열심이지만 공부도 죽기 살기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녀본 한국, 브라질, 미국 대학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대학생이 제일 공부 안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만학(晩學)이기도 하지만 젊은 학생들을 따라 가려고 아침 6시부터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지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강의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혹자는 나보고 변호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법학 공부 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브라질은 대륙법(大陸法 Civil Law) 계통이지만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미국을 위시하여 영미 법(英美法 Common Law) 계통이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차라리 브라질 법과 한국 법에 공통점이 더 많다.  미국 법과 대학원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셈이었다.

이렇게 보스턴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서는 다행히 졸업을 하게 되고 학위도 받았다. 졸업을 할 때쯤 뉴욕 변호사 응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내 운명을 걸어볼 욕심이 생겼다.

졸업 후 일단 뉴욕으로 주소를 옮겼다.

뉴욕 변호사 시험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처음에는 변호사 윤리 규정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 경우 학교 강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변호사 시험 준비 코스 같은 학원이 있다. 뉴욕에 와서 시험 준비를 하면서 무사히 일차 관문을 통과 하였다. 그 다음에는 본 시험이 있는데 매년 7월과 2월 일 년에 두 번 실시한다.  사람들이 뉴욕 시험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시험 과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 (州) 변호사 시험 과목이 8가지 이내인 것에 비해 뉴욕은 무려 23 가지나 된다.

뉴욕은 이틀간 시험을 본다. 첫날은 뉴욕 법, 주관식 필기 시험이다. 오전에 3 문제 오후에 3 문제 총 여섯 문제만으로 23 과목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문제에 여러 과목에 대한 문제가 겹쳐서 출제된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주관식 필기 시험을 보는 동안 뉴욕 법에 대해 오전 오후 25문제씩 총 50 문제를 객관식으로도 시험 본다. 필기 시험 문제는 어떤 주제를 설정해 놓고 논하라 하는 논술식인데 매 문제에 약 6-7개의 이슈(issue)를 뽑아서 논해야 한다.  한 문제를 읽고 약 7-10 페이지에 해당하는 답을 쓰는데 주어진 시간은 50분.

나는 본래 악필(惡筆) 이기 때문에 필기 시험에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잘 썼더라도 채점관이 못 알아보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모든 글을 필기체가 아니라 인쇄체로 썼다. 인쇄체로 쓰면 속도가 떨어져서 분, 초를 다투는 시험에는 불리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최대의 속도를 내서 인쇄체 쓰는 연습을 했다. 시험관이 보기 편리하게 한 칸씩 띄어쓰기 (double space) 를 하는 것도 연습해 뒀다.

필기 도구에도 신경을 써서 여러 개의 연필과 펜을 준비 했는데 볼펜처럼 생겼으나 쓸 때는 만년필처럼 잉크가 술술 나오는 일제 볼펜을 준비했다. 지우개도 제일 성능이 좋은 것으로 준비해 놓았다.

다음날은 미국 거의 모든 주가 같은 시간에 보는 객관식 시험.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 3시간 동안에 100 문제, 오후에도 3시간 동안 100 문제의 정답을 맞혀야 한다. 한 문제에 1분 45초 밖에 시간이 없다. 그래야 겨우 다시 한번 살펴 볼 시간이 된다. 헌법 같은 경우에는 문제의 지문이 반 페이지 이상 된다. 한 번 읽고 답을 알아 내야지 두 번 읽을 시간이 없다. 객관식으로 4개 항목 중에서 맞는 답을 고르는 것인데 그 답이 그 답 같고 그 중 두 개는 아주 비슷하고 정답도 그 말이 그 말 같은 알쏭달쏭 한 것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if….. only if…, unless.. 가 겹치기로 나오면 그것인지 아닌지 확실한 의미를 모를 경우도 있다.

한 수 더 떠서 4가지가 전부 정답이지만 그 중 가장 좋은 답을 고르라던가 4가지가 다 틀린 답인데 가장 틀린 답을 고르라고 할 경우 법률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영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미국에서 자라지 않은 외국인들이 알아 맞힌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일 수 밖에 없다.

하루에 10 시간 이상씩 매일 공부하고 2000년 7월에 시험을 치려고 뉴욕주 수도인 올바니(Albany)로 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데서나 잘 자는 편인데도 호텔 옆 방의 젊은 애들이 밤새도록 부스럭거리는데다가 긴장이 됐는지 밤을 하얗게 새웠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마셔대고 보니 그 날 밤 또 한잠도 못 잤다.  이렇게 사흘씩이나 밤을 새우고 시험장에 들어 가니 몽롱 한 것이 내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악 물고 시험을 다 보고는 어쩌면 합격 할는지도 모른다는 일루의 희망을 안고 뉴욕으로 돌아 왔다.

시험 발표는 11월 말 경, 발표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맨허턴 소재 은행에 취직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뉴요커들 틈에 끼어 출퇴근 하며 일하는 재미도 괜찮았다.

드디어 운명의 11월, 그 날이 왔다. 밤 12시 1분에 인터넷으로 발표되는 합격자 명단에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내 이름은 고사하고 비슷한 이름도 없었다. 실망! 대 실망! 내 일생에 불합격이라는 최초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브라질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가족, 언제나 나를 위하여 기도의 생활을 하시는 노부모님, 그리고 장도를 축하 하면서 환송 해준 친구들 생각을 하니 도저히 맨 손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좌절 할 수는 없다. 칠전팔기(七轉八起) 라는 옛 말도 있지 않은가.  마음을 다시 고쳐 먹고 다음 2 월에 있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풀 타임(full time) 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을 조정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하루 24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에 승패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국 변호사 시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교만 하지는 않았는지……. 여러 번 반성도 했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미국으로 떠나오던 초심(初心)으로 돌아갔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맨 처음 한 것은 티비 없애기. 그리고 골프 채도 가방과 함께 아는 사람에게 줘버렸다. 신문도 눈 앞에서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고 한국, 브라질에서 오는 각종 간행물을 봉투도 열지 않은 채 큰 여행 가방 속에다 자물쇠로 잠가 버리고 시험 끊난후 보기로했다. 두꺼운 시험 준비용 교재를 찢어서 항목 별로 여러 권의 얇은 책으로 만들어서는 손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앉으나 서나, 지하철, 버스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읽었다. 출장 중인 비행기 속에서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호텔 방에 파묻혀서 읽고 또 읽었다. 나에겐 토요일도 일요일도 휴일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없이 지나갔다. 시험 때가 가까워 오자 직장에 일주일간 휴가를 냈다.

드디어 2001년 2월 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뉴욕 시내에서 시험을 봤는데, 변호사 협회가 장소를 못 구했는지 88번 부둣가 세관 창고가 시험장이었다. 책상 밑으로 불어대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발을 저리게 하였다. 저번 시험 실패 이유가 시간(time management)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어려운 문제에 집착하다가 마침내는 시간에 쫓겨서 나머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어서 이번에는 문제 당 시간 배분을 정확히 하고 정해진 시간이 넘으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식으로 해서 모든 문제를 다 답할 수 있었다. 수 백 명의 수험생들을 둘러 보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보였고 가물에 콩나기 식으로 30, 40대도 가끔 있었다.

나는 시험 기간 중 건강에 이상 없이 끝까지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특히 우리 노 부모님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무리 일생을 건 시험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당장 달려가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3시간 시험 친 후에 한 시간 동안 점심 시간이 있다. 지난 7월 시험 때는 점심시간에 밥맛이 없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냥 늘어져 있던 것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점심으로 훈제(燻製) 연어를 은박지에 싸가지고 가서 먹었더니 기운이 났다. 또 먼저 번에는 밤을 꼬박 새워서 시험 치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었기에 아예 수면제를 먹고 일찌감치 푹 잤더니 다음 날 기분도 상쾌하고 컨디션이 만점이었다.

첫날 오후 시험이 시작되어 약 한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내 앞에서 시험 보던 25세 가량의 미국 아가씨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간질 비슷한 발작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급히 응급 요원들이 와서 싣고 나갔지만 분위기가 한동안 어수선해 졌다. 아마 시험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그리 된 것 같았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실려 나가는 것을 보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나한테도 심장 발작이 나면 어떡하지?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끝까지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기분이 차분한 것이 먼저 시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2월에 친 시험 결과는 5월에 발표된다. 그 5월이 영겁(永劫)의 세월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시험 발표 때까지는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코메디를 봐도 하나 우습지 않았다. 늘 목에 가시가 걸려 있는 기분으로 지냈다. 5월이 가까워질수록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드디어 5월 8일 0시 1분에 합격자 발표가 인터넷 상에 뜬다는 소식을 받았다. 5월 7 일 밤, 내 앞날을 갈라 놓을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고 느꼈다. 나는 마음을 크게 먹었다. 밤 12시까지 목을 빼고 기다릴 것이 아니다. 내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여 천천히 보리라 마음 먹고 일찍 자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했으나 컴퓨터를 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고 마음에도 없는 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이런저런 서류도 들췄지만 무엇을 봤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심 호흡을 한 다음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 합격자 명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 이름을 찾아 냈다. “주님, 감사 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오며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누구한테라는 생각도 없이 손 가는 대로 다이알을 눌렀더니 아내가 나왔다. 이 순간을 위해 수 많은 말을 준비 하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여보,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하는 한마디 말 밖에는. -끝-

 


지부회장 신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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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부 동창회 회장들 신년인사 드립니다.

 

희망 찬 새해를 맞이하여 미주동창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진력하신 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동문님들 내내 건강들 하시고 가내 편강과 만복을 빕니다.   알라스카 윤재중(농대 55) 회장

 

안녕하세요? 워싱턴주 회장 공대 기계공학과 72학번 류성열입니다. 희망찬 2018년 무술년 새해를 맞아 미주 모든 동창회원님들의 가정마다 행복과 소망을 기원합니다. 저희 워싱턴 지부도 올해 한해 새로운 각오와 생각으로 본부 및 각 지역 지부와의 협조를 통해 더욱 더 발전하는 지역동창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워싱턴주 류성렬(공대 72) 회장

 

 

동문 여러분, 무술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동문회를 위해 수고 많이하신 민병곤 이사장님 과 임원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동문들이 여러 행사에 참여하여 선후배의 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문 각 가정에 항상 따뜻한 사랑이 넘치기를 앙망하나이다.  북가주 임희례(간호73) 회장

 

길고도 짧은 1년이라는 임기가 끝나갑니다. 미주 지역 동창회에서 가장 큰 남가주 총동창회의 회장으로서 지난 1년의 공과를 돌아보면서, 잘된 것은 더욱 키우고 미진한 것은 개선함으로 더욱 융성하는 동창회가 되기를 희 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과 마찬가지로 2018년도에도 전, 현, 차 라는 3명의 회장이 의기 투합하여 현 회장을 중심으로 끌고 밀며 협력하 는 최고의 남가주 총동창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2018년에는 진짜 70, 80의 위력을 보여주는 남가주 총동창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남가주 성주경(상대 68) 회장

 

황금 개띠해가 왔다. 1975 년 관악캠퍼스 첫 해 가을은 황금색 들판과 은행잎으로 가득찼다. 높고 푸른 하늘과 캠퍼스는 지난 30 여년 미국 생활에 대들보처럼 마음 속을 자나깨나 지키고 있었다. 2018년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 일을 손에 손잡고 앞장 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기적은 많은 부분 서울대인들의 피땀어린 열정의 결정체입니다. 조국에서도 그렇듯이 수 많은 미주 동문들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로 반듯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 니다. SNU 동문 후손들은 미국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곳곳에서 휼륭하게 성장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는 미래 동포 사회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리더할 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동창회는 개개인이 이룩한 사회 활동과 한인사회 봉사, 원로잔치, 대표적 여러 문화활동을 통해 밝은 동포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동포회 발전을 위해 동문, 동문가족, 모교 그리고 이민 사회의 보석같은 인재들과 재화를 Network하여 앞장서서 동포사회를 리더하는 최적의 시기에 와 있습니다. 2018년 동문들과 아이디어나 조언, 해결책을 의사 소통하겠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려도 창의적 해결 방법을 찾아 동문 한분 한분이 소속감을 느끼는 동창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동포사회의 변화를 선도하기 위해 SNU동문들께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예약문화(RSVP)를 통해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둘째, 정시(On Time) 시작을 통해 개개인의 일정을 존중하고 K.Time을 개선합시다.

셋째, 동문 년회비(Annual Due) 납부로 년회비에 의한 동창회 운영이 되도록 합시다. 밝고 희망찬 새해, 좋은 일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남가주 강신용 (사대 73) 차기회장

 

미국 땅 바쁜 생활중에도 동문회의 좋은 선후배들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동창회를 통해 소중한 만남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동문 여러분 가정에 복과 즐거움이 가득한 새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샌디에고 이제봉 (인문88) 회장

 

영하의 추위에도 씩씩하게 건재하는 미네소타 동 문들을 대신하여 신년 인사를 드립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미주 동문 여러분들의 건강과 평안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미네소타 황효숙(사대 65) 회장

 

새해에는 동문 여러분의 가정과 미주 서울대 총동창회의 모든 일이 술술 ( 茂戌年) 잘 풀리고 다복하 시기 바랍니다. 또 금년에는 미주동창회의 오랜 숙원사업이며 발전의 초석이 될 “서울대 동창회관” (SNU-HOUSE) 건립 추진의 원년이 되어 많은 발전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전미 각지의 “오뉘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싶어 하는 따뜻한 모임이 되고, 나아가 모교 발전에 기여하는 동창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카고 홍혜례 (사대 72) 회장

 

동문들께,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여 동문들 가정에 행복과 평안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나간 한해에 보여주신 친분과 도움을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건강과 희망이 또한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오하이오 이성우 (상대 72) 회장

 

하트랜드에 거주하시는 선, 후배 동문님 여러분, 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 다. 저는 작년 9월 하트랜드 동창회 20차 정기모임에서 11대 동창회장으로 선출된 오명순(가정 69 입)입니다. 동창회보를 통해 여러분에게 신년인사를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동창회는 6개주가 포함되기 때문에 장거리 운전도 마다 하시지 않고 여러 모임에 참여해 주신 선후배 동문님들에게 이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에도 하트 랜드 동창회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해 온 것처럼 지역사회의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 수여, 춘계 친선골프 모임 및 임원/ 이사회 모임(4월 말경), 9 월 15일의 정기 동창회, 그리고 12월 초에는 송년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역 동문님들 가정의 경조사에도 동문님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가교역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동문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가정에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하트랜드 오명순(가정대 69) 회장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회장님과 미주 동문께 휴스턴 동문 모두의 마음을 담아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휴스턴 구자동(상대 70) 회장

 

일년 항상 따뜻하고 바다가 아름다운 Florida 에서 미주 서울대 동문 여러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찾아오는 2018년 새해에도 모두 건강하시고, 나이를 떠나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 제목처럼) 동문들이 자주 만나는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한인들이 많지않은 Florida 에 더 많은 동문들이 방문하고 이주하는 2018 년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플로리다 조동건 (공대 69) 회장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날마다가 새롭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사다난 했던 지난해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기고 두근 거리 는 마음으로 새해라는 선물 꾸러미를 열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꾸러미 안에 있을 희망의 선물, 사랑의 선물을 기대하며. 2018년에도 서울대 미주 동창회원, 조지아 지부 회원 및 그 가족 모두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조지아 김종구(수의 73) 회장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임을 안겨줍니다. 새해의 바람 중 하나는 우리 동창회를 통하여 동문들과 함께 우리 지역사회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는 동창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회의 고령화와 추세와 함께 저희 동창회 참여 멤버들의 고령화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선배들과 후배들의 삶의 가치와 생각의 기준이 다름은 우리 동창회에서도 만나는 어려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워싱톤 지역 동창회는 선배님들의 넓고 깊은 사랑과 이해의 창으로 후배님들의 거리감 없는 마음과 가족같은 푸근함을 느껴지게 해주시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새해엔 우리 모두 서울대인의 지성과, 한국인의 정서와, 미국시민으로서의 자유평등을 지향하며, 인류애를 나누는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워싱턴 DC 안선미(농대 65) 회장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동 문님들께 새해 인사드립 니다. 새해에 좋은 복 많 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더욱 행복하세요! 필라동문회에서는 12월 초에 연말파티 및 비전공 동문음악회를 매우 즐겁 고, 정겹게, 또 멋지게 가졌습니다. 올해 미주동창회 모임에서 뵙게 되기를 기대하며, 더욱 화합하고 발전하는 미주동창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필라델피아 박혜란(음대 84) 회장

 

지나간 2017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던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저희 뉴욕지역 동창회는 임원, 단과대 회장단, 그리고 동문님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으로 이사회/총회, 추계골프대회, 그리고 송년의 밤 등 큰 행사들을 모두 성황리에 잘 치루어서 2017 년의 좋은 추억으로 남겼다는 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별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잘 뭉치지 못하는 것이 서울대 출신들의 특징인 것처럼 혹평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과시하고도 남을 기록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본 동창회가 지역사회의 그늘진 곳을 살피는 일을 시작한 것은 세인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역시 서울대학교는 다르다는 칭송을 받기에 송구할 만큼 미약하게 시작을 하였는데, 앞으로 더 진전이 이뤄져서 모교의 명예와 동문들에게 긍지를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새해 2018 년에도 여러 동문님들 여전히 건강하시고, 내내 평강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뉴욕 이대영(문리 64) 회장

 

먼저 커네티컷 동문들의 안녕과 새해에 모두 건강하시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같이 갈 수 있는 희망의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은 여러가지 일에 참여하여 신년에는 결실을 맺는 해로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미주총동창회에 지부로 등록을 마치고 준비 작업을 75% 했고, Oversee Mission Study Center 에 trustee로 참여 하게 되었으며, 10월에는 터키를 방문해 난인들을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여러 단체를 방문하고 난민들의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지도자를 훈련하는 사역을 통해 모슬렘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왔습니다. 저희 부부의 사역까지 4개의 fund raising을 부담하고 잘 조율할 수 있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커네티컷 동문들의 보람있는 모임을 위해 동문들의 조언과 협조를 구합니다.  커네티컷 유시영(문리 68) 회장

 

2018 년 새해에는 우리 서울대 동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고,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사랑과 기쁨이 같이 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 동문님들은 자기가 하기를 원한 분야에서 professional로서 많은 것을 성취하신 훌륭하신 분들 입니다. 우리의 삶의 만족도를 보면 professional 로서 오는 삶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나 social interaction에서 오는 만족도는 그리 높지가 않습니 다. 그 이유는 미주 동문들이 caucasian dominated cultural society 에 살고 있 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주류사회에 참석하여 social interaction을 가질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을 보았고, 대부분이 미주류사회에서 outsider 로 보여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이도 저희들에게는 미주 서울대 동창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총동창회 및 지역 동창회에 active 하게 참석하셔서 social interaction 에서 오는 만족도를 증가시키십시요. 새로운 activity group (i.e. hiking, travel, medical advisory, health, history, politics, local small group, …)을 만들어 참여하여도 좋습니다. 더욱 건강해지고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뉴잉글랜드 박영철(농대 64) 회장

 

배움의 병리학  –아는 것도 병이련가 –이원택(의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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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택 (의대, ’65)

인간은 호기심이 많다. 뭐든지 알고 싶어 한다.

공자는 논어 1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 해서 배움의 기쁨을 피력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를 한탄했고 우리 속담에는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말이 있다.

반면에 진시황은 책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시켜버려 자기보다 많이 아는 짓을 원천봉쇄 했고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 폴 포트도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수십만의 지식인을 학살했으며 많은 문화에서 여성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르치기를 억제해 왔다.

세상에는 배워야 될 것도 있고 배우나 마나인 것도 있고 또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데 배움이라는 것도 칼날의 양면 같아서 잘 쓰면 약이 되지만 못 쓰면 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예 안 배울 수도 없는 것이 배움이야말로 생존경쟁의 필수조건이고 배워야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때문이니 선한 마음으로 배움이란 무엇인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원칙적으로 배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게 모르게 은연중에 배우는 묵시적인(implicit) 학습이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근거에 따라 배우는 명시적(explicit) 학습이어서 전자는 무의식적, 무조건적이고, 후자는 의식적이며 조건적이다. 과학적으로 학습이론을 전개하려면 이상의 분류를 따라야 하겠으나, 우리는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므로 정신의학의 통념적인 분류에 따라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분류해 보기로 했다.

 

  • 생리적인 학습

러시아의 생리학자 Pavlov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에서 개한테 종소리를 울리면서 먹이 주기를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음식을 가져오지 않고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질질 흘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우리나라 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그 양반이 혈기 방장했던 젊은 시절에 매일같이 방과 후에는 단골 기생집을 찾아갔더니, 얼마 후에는 고삐를 잡아주지 않아도 말이 알아서 그 집으로 모셔 주더란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우리의 김유신 장군은 단칼로 자기 애마의 목을 치고 주색을 끊었다는데, 이때 그 양반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왜 말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를 생각했더라면, Pavlov보다 1300년이나 먼저 노벨상을 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또한, 그때 왜 자신이 자신을 채찍질 못 하고 애매한 말을 베었는가를 성찰해 보았다면, Freud보다 1300년이나 앞서 대표적인 방어기제 “전치(displacement)”를 발견해 냈을 텐데, 역시 김유신 장군은 글쟁이(문관)가 아니라 칼잽이(무관)였기 때문에 그 대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하긴 노벨상보다야 삼국통일이 백배 나을지니, “깅께, 칼잽이가 글쟁이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뵈-”      

학습이란 한마디로 특정 상황에서 한 가지 일을 계속 반복할 때 뇌의 특정 부분의 회로 형성(net working)이 강화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뇌의 심층에 찍힌 프로그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움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감작작용(sensitization)’이다.

 

학습의 첫 단계인 연상작용은 어떤 일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고전적 조건화로, 이는 모든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초로서, 번개의 무서운 파괴력을 보고 베자민 프랭클린은 가느다란 전깃줄로 만든 연을 날려 번개의 정체가 전기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피뢰침을 고안해서 인류를 보호했으며, 토머스 에디슨은 번개가 칠 때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음극과 양극을 충돌시켜 세상을 밝혀주는 전등을 발명해 내지 않았는가?

간단하게 조건 반사(conditional response)라고도 불리는 이 고전적 조건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들이다. 사람도 개와 같이 공복 때 음식을 보거나 냄새만 맡아도 혈중의 insulin이 올라가므로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오후 6시 저녁 끼니때가 되면 음식이 안 들어가더라도 혈중의 insulin이 올라가서 혈당량을 내려주기 때문에, 시계가 없더라도 사람이 “허기”가 지는 것으로 몇 시쯤인지 알게 된다.

당뇨 기가 있는 한 친구는 저녁 6시가 되면 속이 헛헛해서 반드시 무엇을 먹어야지 기운을 차리고 알코올 중독 끼가 있는 저자는 그때가 되면 속이 출출해지기 시작한다. 여름철 오후에 할인 골프를 칠 때 그 친구는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끝까지 치고 저자는 9홀만 돌고 클럽하우스에 가서 맥주를 마시다 보니 골프 실력이 비교가 안 된다. 학습에서 두 번째 중요한 것은 “끈기”이다.

 

이때 매일같이 반주를 계속하면 알코올중독자가 되나 반주 대신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 세월이 지날수록 술 대신에 기도가 “고파”진다. 이것은 알코올중독자를 치료하는 한 방편이지만 기도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시거나, 기도하기 전에 술을 마시는 사람, 또는 저자같이 술을 마시면서 막간을 이용해서 기도하는 사람들한테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오로지 기도만 드려야지 왔다리갔다리 하다간 삼천포로 빠져버린다. 학습에서 세 번째 중요한 것이 “집중력”으로 이는 잡생각을 싹 쓸어버리는 일이다.

Pavlov의 실험에서 나중에 음식도 주지 않으면서 종만 계속 울려대면, 얼마 후에는 개도 알아차리고 종이 울려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되는데 이를 소멸(또는 소거 extinction)이라고 한다.

이 이원택 박사가 마누라가 한국 나간 열흘 동안 저녁을 매일같이 밖에서 때우느라 반주로 소주 한 병씩을 까고 왔더니, 그 후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도 식탁에 앉으면 배는 고프지 않은데 속이 출출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애절한 눈빛으로 마나님한테 싸인을 보내는데, 이 무정한 어부인께서는 아랑곳없이 일일이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가족들의 건강, 친구나 동료들은 물론 하다못해 오바마,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까지 빌면서 장장 15분간이나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술이 고팠던 배가 서서히 밥이 고픈 배로 변해가곤 한다. 이만하면 목사들이 왜 기도를 오래 하는지 이해가 가는가?

그런데 6개월 후에 마나님이 다시 한국에 나갈 일이 있어서 다시 밥집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식탁에 앉자마자 그동안 소멸된 줄 알았던 그 몹쓸 술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밥보다도 술이 더 고파지는 것은 마누라가 없어서 허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젊고 발랄한 그 식당 종업원이 술맛을 돋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좌우간 6개월간이나 술을 끊었다가도 식당 아가씨의 다정한 눈빛 한 번에 그동안 공든 탑이 좌르르 무너지나니, 이는 한 번뇌에 깊숙이 각인된 추억은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심층부로 가라앉았다가 대뇌피질에 틈만 생기면 다시 뚫고 올라오므로, 결국은 많은 정신병이 완전히 회복이 안 되고 단지 부분적 회복(partial recovery)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체 재활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에서는 한번 중독자는 평생 중독자라고 해서, 30년 전에 술을 끊었어도 아직도 회복하고 있다는 뜻의 recovering(not recovered) alcoholic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한눈을 팔지 못하게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AA 모임에 참석하라고 한다. 말로 해서 안 되는 사람은 몸으로 때우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이원택 박사가 예쁜 아가씨를 보면 한 잔 생각이 나는 버릇이 지속되어, 밥집보다는 예쁜 아가씨들이 더 많은 술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을 연속적인 자극이라고 하며, 이때 한 자극에서 다른 자극으로 옮겨진 경우에도 같은 조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자극의 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가 사물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고등학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험으로, 예를 들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있거나 건널목에 stop sign이 붙어 있거나 차선 위에 stop이라고 쓰여 있으면 우리는 일단 차를 멈추고 보아야 한다.

한 단계 더 올라간 학습활동으로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따지고 보면 다른 것을 발견하는 식별력(discrimination)이라는 것이 있는데,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 한, 차를 직진하지는 못하지만, 우회전할 때는 잠시 쉬고 진행할 수 있으며, 신호등이 없는 네거리의 모든 길에 stop sign이 있으면 일단정지 후 살펴보고 직진을 해도 무방하다.

이와 같은 식별력(분별력이라고도 함)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질인데, I.Q.가 두 자리 숫자 밖에 안 되는 이 이원택 박사는 밥집, 술집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직도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또한,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밥을 보고 배가 고파지는 무조건 반응(unconditional response)과 예쁜 여자를 보면 술이 고파지는 조건 반응(conditional response: 왜냐하면 술을 많이 팔아주어야만 몸도 팔아주기 때문에)을 구별해야 되는데, 저자와 같이 정을 떼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장군(김유신)이 못되고 한낱 졸개로서 인생을 마감해야 되는 것이다.

 

  • 심리적 학습

미국의 심리학자 Thorndike(1874-1949)는 고양이를 안에서 빗장을 걸어 닫아 놓은 상자에 놓아두고 관찰해 본 결과, 이놈이 이것저것 다 만져보고 흔들어 보다가(trial and error learning: 시도와 과오를 반복) 마침내는 빗장을 올리고 탈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쥐를 쇠창살로 만들어진 우리에 넣어놓고 전기충격을 가할 때 삐죽 나와 있는 지렛대를 누르면 전기가 단절되는 장치를 하면, 몇번 당하고 나서는 전기신호가 가기가 무섭게 지렛대를 눌러서 충격을 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도구적 학습(instrumental learning)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행동을 도구를 써서 조정할 수 있다는 모든 행동심리학의 모체가 되는 학설이다.

그 후 미국의 행동심리학자 Skinner(1904-1990)는 쥐 한 마리를 막대기가 붙어있는 상자에 가둬놓고 보았더니, 이놈이 그 안에서 배가 고파서 지랄발광을 하다가 우연히 그 막대기를 건드리니까 음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다음부터는 배가 고플 때마다 그 막대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도구를 강화재(reinforce)라고 하고 이때 받아먹는 음식을 보상(reword)이라고 한다.

강화(reinforcement)에는 쥐새끼가 지랄발광을 하면 음식이 안 나오고 얌전히 있어야 음식이 나오는 긍정적(+) 강화와, 전기충격을 피하려고 고양이가 빗장을 열고 도망을 치는 부정적(-) 강화가 있는데, 이와 같은 조건화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조작적 조건화의 이론이며, 현재에도 많이 쓰이는 행동수정(behavioral modification) 요법의 근간이 되는 학설이다. 혹자는 부정적 강화는 어떤 원하지 않는 반응을 약화시키기 위한 괴로운 자극이고 처벌(punishment)은 어떤 반응이 재발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다 그것이 그것이다. 다만 행동요법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벌을 하면서 돈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데서 온 양심의 가책 때문에 처벌이란 말 대신 ‘부정적 강화’란 고상한 말을 썼으리라 짐작한다.

 

세계 1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이 세계의 패자로 부상함에 따라 과학의 무대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는데, 심리학에서도 인간의 내면세계를 연구하는 자기심리학이나 분석심리학이 인간의 외부에 나타나는 행동을 중시하는 행동심리학(behavioral psychology)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문명이 경제력에 비례하는 것처럼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돈에 좌우되는바, 연구하는 데도 돈이 들지만 선전하는 데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즉 저자의 책이 빛을 못 보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흥청망청하던 경기를 타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미국사람 Watson(1878-1958)은, 1920년에 11개월짜리 어린애한테 처음에는 무서워하지 않았던 흰쥐를 보여주면서 계속 벼락 치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그다음부터는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흰쥐만 보면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것(classical conditioning)을 보고, 나중에는 기고만장하게 자기에게 심신이 건강한 정상애를 주면, Skinner 성님이 고안해낸 operant conditioning(조작적 조건화)을 적용해서, 의사건 변호사건 예술가건 정치가건 마음대로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다녔다.

모든 것이 틀에 잡히고 고리타분한 봉건주의와 구교를 배척하고 자유의 땅에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활개를 펼쳐보려는 개척정신이 투철한 신교도(protestant)들한테는 여간 솔깃한 말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행동심리학의 발달은 자본주의 토대 위에,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면적인 것에, 질보다는 양, 이론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시하는 양키 문화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이미 정신유전학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애는 자라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라고 세 살 때부터 피아노 독선생을 따라 붙였는데 자라보니 장사꾼이 되어있고, 또 어떤 애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라고 다섯 살 때부터 웅변대회에 끌고 다녀도 결국은 시인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바야흐로 궁지에 몰린 행동심리학의 왕초(god father: 알카포네 비슷하게 생겼음) Watson 두목께서는 골치 아픈 심리학을 때려치우고 유수한 광고회사를 차려 떼돈을 벌었는데, 그 당시의 동료들이나 후학들이 그가 변신을 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아마도 이 이원택 선생도 골치 아픈 정신과를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소설가가 되었다면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조작된 인간 또는 계획된 사회(planned society: 역시 또 하나의 극단주의자인 Skinner가 만들어 낸 말)라는 말은 쑥 들어가고, 유전학에 기초를 둔 복제인간(clone)이나 생태학에 기초를 둔 세계화(globalization)란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 사회적인 학습

사회적인 학습이론의 시초로는 오스트리아의 생태학자 Lorenz의 각인(imprinting)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모양으로, 연못에 떠 있는 오리새끼들은 항상 제 어미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모든 동물이 갓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 이외에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상대방을 모방(modeling)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학설이다. 오리 새끼가 처음 깨어나서 최초로 본 커다란 움직이는 물체는 아마도 제 에미일 것이므로 에미가 움직이면 자기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어린 놈들이 과연 제 에미인지 알고 따라다니는 것인가 하고 의심한 Lorenz는 갓 부화된 오리 새끼들한테 어미를 제쳐놓고 자기 자신이 그들을 유도하였더니, 그다음부터는 어미를 갖다 놔도 어미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오리 새끼가 아주 어렸을 때는 통하지만 그놈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통하지 않으므로, Lorenz는 아주 어렸을 때 어떤 기억을 뇌에다 낙인찍는 것이 잊어먹지 않는 비결이라고 그랬다.

상대방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일은 인간에게서도 어릴 때 말을 배우거나 어떤 동작을 개발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으로 대체로 어린애는 부모를 통해서 이와 같은 학습을 시작하고 있다. 저자가 젊었을 때 딸내미가 얼마나 귀여운지 항상 “요놈의 새끼”라고 부르던 중 하루는 또래들이 몰려와서 같이 숨바꼭질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저자는 애들 애를 먹이느라고 차고에 있는 소금 통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마침 6살 난 딸애가 술래가 돼서 산지사방 찾다가 안보이니까, “요노무 새끼가 어드메 자빠졌나.” 하는 것이 아닌가(그려서 애들 앞에서는 숭늉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이어--)?

Lorenz는 나중에 물고기나 새 떼들이 자기 구역(territory)을 사수하는 것을 보고 인간세계에서도 가장 좋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해야 된다고 보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열악한 유전자를 가진 종족에 의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종족이 침범당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막아야 된다고 보았다. Lorenz 자신은 무력에 의한 구역의 확보나 종족의 선택에는 우려를 표시했으나, 일차대전 패전 후에 절망에 빠져있던 독일 민족을 단합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Hitler (그의 의부와 그를 미술학교 입시에서 떨어뜨린 사람이 유대인이었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에게 그의 사상은 정말로 가뭄에 단비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치 군국주의의 모토는 우수한 국민이 우수한 지도자를 따라가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Eugent(우수한 학생)라는 학도병을 만들어 마치 오리새끼가 떼거지로 Lorenz를 따라간 것처럼 Hitler를 따라 세계를 정복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Nazi 정권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또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Lorenz는 이차대전 패망 후 일급 전범으로 몰려서 감옥살이까지 했으나 정치와 학문을 구분한다는 방침에 따라 마침내 1973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이 사회적인 학습은 군대에서 신병훈련을 시킬 때도 유감없이 써먹는바 숙달된 조교가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하나, 둘, 셋을 세고 나서 목표물을 향해 던지는 것을 보고, 결국은 자기도 그 조교와 같은 군인으로서 그 조교가 하는 일을 못 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정신요법의 하나인 집단치료에서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본받아 행동함으로써 금연이나 체중조절, 공포증치료 등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인지적 학습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난감한 경우 중의 하나가 바로 인지(cognition)와 인식(perception)인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perception은 지각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지각은 여러 가지 인지작용 중의 일부로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매우 주관적인 개념인 것이다. 개념이다. 한 송이의 장미꽃을 보고도 어떤 이는 화려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우아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요염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여자를 고를 때도 “제 눈에 안경”(beauty is in the eyes of behold)이란 말도 있다. 즉 세상만사가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백 번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지각작용에는 과거의 경험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머니한테서 장미꽃을 자주 받아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모성애를 느끼고 주로 애인한테 장미꽃을 받아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색정을 느낄 것이며 저자같이 여자들한테서 흑장미만 받아 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배신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했던 고전적 조건화도 인지적 개념 없이는 설명하기 곤란한데 1967년 Robert Rescorla 는 쥐들을 세 집단으로 나눠서 첫 번째는 Pavlov 실험 때와 같이 종이 울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었더니 쥐들은 종이 울리면 공포에 떨게 되고 두 번째는 종이 울리거나 말거나 무작위로 전기 충격을 주었더니 이놈들은 종이 울릴 때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언제 전기 충격이 올지 모르므로’ 고요한 상황에서 제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섞어서 종을 울리면서 어떤 때는 규칙적으로 어떤 때는 불규칙적으로 전기충격을 주었더니 쥐들이 ‘나도 모르겠다’라고 종소리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배움은 조건적 자극(종소리)이 무조건적 자극(전기 충격)에 대한 일관된 정보를 제공해야만 일어난다는 속발학설(Contingency theory)을 주장했다.

결국은 인지작용이란 자기가 지각한 정보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를 연결해주는 학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계모한테 매만 맞고 자라서 나중에 자기가 죽자 살자 쫓아다니던 계집애한테 딱지를 맞고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살아나서도 여자를 보면 겁이 나고 좀 괜찮은 애가 접근을 해와도 결국은 파투가 날 것이라고 결혼을 못(안)하고 있다. 이 친구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세상만사를 검은색을 칠한 안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어머니도 나를 버리고 첫사랑도 나를 버렸는데 네가 지금은 암만 알랑방귀를 뀌어도 결국은 내 계모같이 되어 버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는 부정적인 자기관, 부정적인 해석, 부정적인 기대라고 해서 우울증으로 빠져버리는 3대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정신과에서 인기가 있는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안경 색깔을 검은색에서 분홍색이나 푸른색으로 바꾸어 준다. 예를 들면 네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불과 두 살로서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계모는 콩쥐팥쥐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무식한 여자인데다가 너를 차버린 애는 보석을 돌멩이로 잘못 본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지금 너는 24세의 의과대학 학생인 데다가 너를 좋아하는 애도 알로까진 애가 아닌 것 같은데 불알 차고 나온 놈이 그렇게 용기가 없느냐고 부추겨 세우는 일이다. 우리 딸 아이가 Yale 대학에 지원했다가 미역국을 먹고 한 말이 “It’s their loss – 결국은 지들 손해” 였는데, 이 아이는 지 애비를 닮아서 어려서부터 자가 인지치료에 통달했다. 그 딸에 그 애비라고 저자도 여자들한테 딱지를 맞고는 “나를 몰라주는 너 같은 꼴통은 필요없다.” 고 자위를 하곤 하는데, 암만 봐도 딸 아이의 경우는 인지치료라고 할 수 있으나 저자의 경우에는 “신포도”에서 나오는 “자기 합리화”의 경향이 짙은 것을 보면 이것은 자신감 또는 나이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그동안 우리가 지주나 자본가의 착취에 얼마나 시달려 왔는가, 이제 공산 혁명이 왔으니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고 다 같이 못 먹고 잘 사는 공산주의를 향해 매진하자.”라는 공산당원의 세뇌교육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정신과 의사들은 안경의 색깔을 붉은색으로 바꿀 줄 모른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인지요법은 세뇌작용(brain wash)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보험회사에 치료비를 청구할 때, 내가 오늘 이 친구 뇌 세척(brain wash)을 했으니까 100불 내시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를 비롯한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cognitive psychotherapy라는 점잖은 말을 쓰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주로 인지요법의 긍정적인 면만을 생각해 왔는데 만약에 이 인지요법을 악용하는 경우 그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새파란 김정은이를 ‘어버이 수령’으로 모시는 북한의 동포들을 비롯해서 극단주의 이슬람교도들이 테러리스트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인지요법(즉 세뇌교육)의 한계가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세상이 지성과 이성으로 피땀 올려 쌓아 왔던 현대주의를 해체시키려는 후현대주의로 들어서면서 세계화(globalization)에 따른 다문화의 영향, 오관(五管)을 자극하는 다매체(multimedia) 내지는 전산기나 인터넷을 통한 기계적(mechanical) 학습에다가 인공 지능(A.I.)과 가상 현실(V.R.)을 추구하는 조타주의(Cyberism) 등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배움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학습 이론도 더욱더 복잡해질 모양이나 저자 같은 꼰대가 나설 처지가 아닌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_박평일(농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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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농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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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화요일 오후에 매년 연말마다 갖는 동네 모임에 참석했다. 우리 동네는 모두 33가구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동네다. 그중에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들 가정이 30가구이다. 18년 전 내가 이사 올 때만 해도 동양인 가족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 후 10여 년 전에 인도계 변호사 가정이 이사 왔고, 5년 전쯤에 중국계 대학교수 부부가 이사왔다. 동네 거주 기간이나 미국 땅에서 산 경험, 나이로 보아서는 나는 고참 수준에 속한다. 하지만 백인 이웃들 눈에 비친 나는 항상 외국에서 굴러들어온 이민자다. 우연히 마주칠 때면 습관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라고 국적을 묻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 째 모임에 불참해 오다가 동네 모임 서기직을 맡은 친구 Jon의 수차례 요청으로 올해 모임에는 참석을 결정했다. Jon은 미 중북부 미네소타주 태생으로 연방정부에서 평생 근무하다가 5년 전에 은퇴했다. 나이도 나보다 5살 위이고, 우리 동네에 산 기간도 5년 정도 고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후를 자연을 즐기며 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15년 동안 집을 물색하다가 우리 동네에서 자기 맘에 드는 집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 탓으로 우리 동네에 대해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난 여름 날 오후였다.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 부을 듯한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평상시 산책차림으로 산책 길에 올랐다. 15분 쯤 동네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척을 분간키 어 려운 장대비가 퍼부어 내리기 시작했다. 곧 끝날 것 같지 않는 억센 기세였다. 길 가 큰 느티나무 밑에 젖은 몸을 피했다. 마침 차를 운전하고 지나가던 Jon이 나의 처량한 모습을 발견하고, “지금 시장에 가고 있는데 집까지 차로 데려다줄 께."라며 차에서 내려서 차 뒷문을 열었다. “고마워, 그런데 오늘은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비를 실컷 맞아보고 싶어. 지나가는 폭우라서 잠시 후에 멎겠지.” 하고 정중히 사양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Good luck!"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차를 몰았다. 그래도 내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걸렸던지 몇 분 후에 다시 와서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우산 하나를 내 손에 건네고 갔다. 차를 되돌려 자기 집에 들렀다가 온 듯했다.

우리 동네의 특이한 점은 젊은 층들보다 노년층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다. 그 이유는 대충 이러하다. 동네가 위치한 Clifton City 지역에 Occoquan River가 흐르고 있다. 수만 에이커에 달하는 울창한 숲에 생수를 공급해 주는 생명의 젖줄이다. 그 강의 수질을 보호할 목적으로 우리 동네 주변은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대지면적이 최소 5에이커로 제한되어 있고, 상수도와 하수도 연결도 불가능하다. 그런 탓으로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대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까다로운 건축허가 조건 때문에 건축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또, 숲으로 뒤덮여 있어서 길이 좁고 직장인들에게는 출퇴근하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크리프톤 다운타운의 경우 대부분 건물이 미국 남북전쟁을 전후로 해서 지어진 건물들이어서 역사적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새로운 건물은 물론 증·개축마저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 버지니아 지역의 최초 실내 화장실 건물과 최초의 노예들 전용 교회도 우리 동네에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연을 정말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 동네를 주거지로 선뜻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이사를 오면 질병이 나거나 늙어서 거동이 아주 불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주저앉아 사는 경우가 많다.

회의 시작 시각인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하니 이미 13명 정도가 자리를 잡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참석을 예상 치 못한 듯, 약간 놀란 눈으로 일제히 나 를 쳐다보았다. 눈에 익은 몇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분위기가 약간 어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때마침 앞에서 회의 진행을 서두르고 있던 Jon이 하던 말을 멈추고, “Bill, 참석해 주어서 고마워! 오늘 네가 좋아하는 자연에 대한 특별 강연이 있어. 너도 좋아할 거야”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참석자들 자리를 일일이 돌아가며 악수를 청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다. 굳이 장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이고, 세상이고, 이웃이고 내가 다가가는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특별 연사로 Ms. Margaret Fisher가 초청되었다. 주제는 ‘Invasive Plants with us’ 였다.

그녀는 Occoquan River 주위의 생태계를 보호, 보존하기 위한 자원 봉사 활동을 하는 ‘자연 애호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Occoquan River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수십만 년 동안 살아온 식물들이 외국에서 침략해 온 식물들에 의해서 정복되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현재 이 지역 식물 중에서 원래부터 이곳에 살아온 토종들은 25%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75% 정도 식물들은 유럽이나 아시아, 러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외국에서 온 침략한 식물들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자 80세가 넘어 보이는 한 늙은이가 “식물뿐만이 아니라 인구분포도 그와 마찬가지로 변해가고 있습니다.”라며 맞장구를 쳤다. ‘사돈에 남 말을 하고 있군. 미국 원주민들이 살던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 먹은 놈들이 얼굴 낯짝도 없이...!’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가슴 속에서는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하자… 그녀의 강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이 지역 토종 식물들은 이지역 토양과 기후와 궁합이 맞아서 잘 자라나고 성장하기 때문에 따로 물이나 비료를 줄 필요가 없고 병해충에 강해 살충제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자태가 다른 식물들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아울러 천연물과 토양을 보호, 유지해 주며 곤충들이나, 벌, 나비, 벌레, 새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 역할을 해줍니다. 외국에서 침략한 식물들 때문에 토종 식물들뿐 아니라 그 식물들을 의존하고 살아가는 토종 새들, 곤충들, 개구리, 벌 레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침략한 식물들을 뿌리째 뽑아 제거하고 그 자리를 토종 식물들로 대체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Japanese barberry 가지들을 들고나와 그 침략자 식물의 예로 들었다. 다소 이해가 가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나의 평소 견해와는 사뭇 달랐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나의 견해를 밝혔다. “나는 토종 식물들을 보호하는 운동에 일부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 문제는 지구 전체의 생태계 변화와 파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인류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 지역적인 문제을 들어 단편적으로 접근해서는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구 생태계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급속한 산업화와 소비 위주의 자 본주의 경제 문명에서 비롯된 공해로 인한 오존층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Occoquan River 강변 숲길을 산책하면서 매년 눈에 띄게 숲의 생태계가 변하고 달라지는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해 오고 있습니다. 미 대륙의 기후변화, 온난화 현상 때문에 이 지역 토종식물들은 점점 죽어가고 North Carolina, South Carolina, 심지어는 Georgia 주 식물들까지 북상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달에 테네시주에 위치한 The Smokey Mountain을 일주일간 다녀왔 습니다. 그곳에서도 이 지역과 유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스모키 마운틴에는 대 충 100여 종류의 토종 나무들, 150여 종류의 꽃들, 240여 종류의 새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난화 현상으로 남부주들 식물들이 북상해서 토종들의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고 합니 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의 폴라 곰들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와 마찬가지겠지요.” 그녀는 “남부주들 식물들은 이 지역 식 물들과 유사한 종류의 미국 식물들입니 다.” 하며 서둘러 대답을 마쳤다. 맞는 주장이다. 그들도 미국 식물들임을 부인할 미국인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외국에서 침략해온 식물들이 아니다. ‘Made in America’, 미국산 식물들이다.

2

자연계는 인간사회들처럼 국경 개념이 없다. ‘이민’이라는 개념도 없다. 다만 창조주 신이 부여한 자유 의지와 생존의지를 따라 자기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이동할 뿐이다. 이는 준엄한 창조 섭리이고 자연질서일 뿐, 동식 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고, 금하고, 제거할 권리가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옛 우리 속담이 있다. 굴러온 돌들은 벽을 좋아하는 탐욕적인 인간 세계에서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만큼은 결코 통용될 수 없는 윤리다. 새로운 지역으로 삶의 터를 옮기는 동식물들은 생존적 본능 때문에 토종 동식물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탐욕에서 비롯된 침략행위가 아니라 니체가 주장했던 생명의 본질인 생존을 위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 진화를 즐기고, 싱싱한 새것을 좋아하는 신의 독특한 기호 탓인지도 모른다. 밤과 낮을 두어서 낮이 늙어 저물어가면 싱싱한 밤으로 대체시키고, 밤이 늙어 깊어가면 새로운 낮으로 대체시키며, 또, 사계절을 두고 봄에 탄생한 생명이 늙어가면 겨울에 거두어들여 다가오는 봄의 싱싱함을 즐기시는…

깊게 생각해 보면 인류의 지난 역사도 그 예외는 아니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인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의 5천 년 역사를 연구하던 중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는 놀라운 역사의 법칙을 발견해 냈다. 중국의 중심 문화가 시들고 병들어 갈 때마다 변방 오랑캐 문화가 구세주로 나타나 중심문화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심문화로 자리매김했었다. 테네시주 군인 출신 미국 7대 대통령 Andrew Jackson은 1930년 5월 28일 The Indian Removal Act에 서명했다. 테네시 주를 비롯한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을 미시시피강 서부로 추방시키기 위한 법안이었다. 15,000 여명의 인디안들 중에 4,000 천명 이상의 인디안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 갈증으로 죽어간 그 유명한 Trail of Tear의 처참한 고난의 행렬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백인들의 눈에는 인디언들이 Relocation이라는 단어 대신 Remov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동식물들같이 하찮은 존재들로 보였을 것이다. Invasive plants 들을 Removal 하고 미국 토종식물들을 심으라는 강의를 듣고, 왜 갑자기 The Indian Removal Act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가고 가슴 속에 이유 없는 서글픔이 파도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U_Mass 교수 김용구 (공대 66) 동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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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Massachusetts Dartmouth  김용구 교수가 'The 2016 Scholar of the Year' Award를 수상했음이 2017, 11월 16일자 Confirmation Letter에 의해 밝혀졌다.  김 동문은 70년 섬유공학과 졸업, 74년 동 대학원 석사, 81년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에서 Ph.D. in Fiber and Polymer Science를 취득했다.

Dr. Yong Ku Kim (공대  66), Chancellor Professor of Bioengineering at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Dartmouth received the 2016 Scholar of the Year Award.

Excellence in Research: High Fiber Density Fuel Cell Electrodes and Multiple Patents

Chancellor Professor Yong Ku Kim is working with a variety of research partners and has been issued 12 US patents ranging from structures for absorbing mechanical impact energy, auxetic fabrics biomedical specimen collection device and material, materials methodology to improve the delamination strength of laminar composites, lead pellet recovery fabric and high fiber density fuel cell electrodes.

Kim and his colleagues submitted eight pending US and European patents. He has received research funding from the federal government as well as private sources. One of his projects with the Naval Undersea Warfare Center involves increasing fiber density in electrostatic flocking for fuel cell electrodes. This type of material can enhance current density of fuel cells and heat transfer, and has a number of potential uses, such as in fuel cells for use in underwater applications, as well as in certain consumer electronic products. Currently UMass Office of Technology Commercialization and Ventures licensed this technology to a microelectronics manufacturer in San Diego, California.

Kim is also involved in the Head Health Challenge Ill. The Head Health Challenge was developed by the NFL, Under Armour, GE and the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 Technology to better diagnose mild traumatic brain injury, improve protection, and advance materials to mitigate impact in sports. Kim and his partners developed Flocked Energy Absorbing Material technology, a radical new energy-absorbing padding used in helmets and body armor.

Yong Kim and Dr. Samuel Ugbolue developed and patented warp-knitted auxetic fabric structures with Navy grants, which can be applied to biomedical, protective structures and comfortable apparels.

 

Award confirmation letter:

Thu 11/16/2017, 3:10 PM

Dear Dr. Kim:

On behalf of the 2016 Scholar of the Year Committee, I would like to congratulate you on receiving the Scholar of the Year award. I would also like to thank you personally for the work you have contributed to your field and to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Dartmouth.

The University is fortunate to have had you as a faculty member doing significant and consistent work in materials engineering, particularly your work on composites and energy-absorbing materials. You have a strong track record of publications, presentations of your research at scholarly conferences, as well as numerous grants and patents.  Your work reflects what the committee seeks to uphold in this award: an exemplary scholarly achievement of international significance. 

Best regards,

Lisa Maya Knauer
Chair, Scholar of the Year Award
Committee

 

Dr. Lisa Maya Knauer, PhD. 

Associate Professor and Chairperson

Department of Sociology and Anthropology

University of Massachusetts Dartmouth

285 Old Westport Road

North Dartmouth, MA 02747

 

남가주 간호대 동창회 정기총회 및 신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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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0일 서울대학교 남가주 간호대학 동창회(회장 이호진, 간호대 74)가 Oxford Palace Hotel에서 정기총회 및 신년회를 개최하였다.

50여명의 동문들이 모인 이 행사는 양수진(간호대 80) 총무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교가제창과 회장인사로 이어졌다. 2018년에도 연임하게 된 이호진 회장은 “바 쁘신 가운데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동창회에서 전, 현, 차기회장님과 문화위원장님이 참석해 주시어 자리를 빛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2017년 한 해의 모든 행사를 무사히 치룰 수 있도록 여러분의 협조와 격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도 총동창회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간호대 동문간의 돈독한 관계와 총동창회 동문간의 관계를 계속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올해는 작년부터 추진해 오던 주소록 발간을 마무리하여서 내년 신년회 때 배부하겠습니다. 주소록 발간에 동문들과 관심 있으신 분들의 광고를 올려서 fund raise의 효과도 올리고자 합니다. 시대적으로 점점 줄어가는 동문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신 동문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특히 항상 적극적인 참여로 저희 동창회를 밀어 주시는 69학번 동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격려와 참석으로 동창회를 이끌어 주시는 대선배님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다.

이어 양수진 총무의 사업보고가 있었고, 남가주 간호대 동창회 정기총회 및 신년회 - 새해도 동문 모두 더욱 행복하고 번영하기를 기원 - 이호진 회장의 회계보고가 있었다. 다음 양수진 총무의 참석자 소개가 있었고, 초대손님으로는 성주경(상대 68) 남가주 총동창회장, 강신용 (사대 73) 수석부회장, 김병연(공대 68) 전 총동창회장, 홍선례(음대 70) 문화위원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어 단체사진 촬영이 있었고 점심식사에 이어 제2부 순서로 진행되었다.

사회는 노선호씨가 맡았는데, 김수향(간호대 68) 전 회장의 첼로 독주, Dvorak 작곡 ‘Humoresque’를 박연숙(간호대 87) 동문의 피아노 반주로 연주하였는데, 4년간 숙련된 솜씨로 능란한 연주를 보여주어 모두를 감탄케 하였다. 다음 제스쳐게임, “몸으로말해요.”에서는 동물 이름 맞추기, 운동경기 이름 맞추기 등이 있었고, 동문들의 우스꽝스런 몸 놀림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다음 복면가왕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호랑이 아니고 고양이”로 분장한 최경복(간호대 69) 동문이 “만남”을 불러1등을 차지했고, “삼바의 여왕”으로 분장한 손선행(간호대 69) 동문이 “댄서의순정”을 불러 2등을 차지했다. 가면을 쓰고 열창하는 출연자들에게, 모두들 폭소하며 큰 박수를 보냈다. 동문들은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푸짐한 선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기사제공: 홍선례 편집위원]

브레인 네트웍 웍샾 – 201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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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 문리대 동창회 신년하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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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로부터: 이종호, 임원규, 최명룡 동문)

 2018년도 남가주 문리대 (문리, 인문, 사회, 자연) 동문 신년하례식이 1월 13일 (토) 오후 3시에 LA의 Rotex Hotel에서 있었다. 60 여명의 동문이 참석한 이날 모임은 이종호 동문 (동양사 81; LA 중앙일보 Orange County 지국장)의 사회로 진행이 되었는데, 각자 자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문들은 삶의 위험한 순간, 인생여정이 달라진 기로에서의 이야기 등, 에피소드들을 나누기도 했다.

김충현 (물리 72) 전임 회장이 2015, 16에 봉사를 하고, 2017, 18에는 박제환 (영문 75) 동문이 회장을 맡고 있다. 이어서 점심을 나눈 후, 2부 순서로 음대 김미자 (81) 동문이 준비한 해금 연주(사진 아래오른편) (김 아리랑과 영화 ‘왕의 남자’ OST; 이선희의 인연), 최명룡 (성악) 남가주 음대 회장의 독창이 이어졌다. 다음엔 남가주 문리대 신년 하례식의 전통에 따라 명강의를 듣는 순서로 Cal State Long Beach 경영학과 마케팅 담당인 송명국 (철학 90) 교수가 ‘Big Data와 Machine Learning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관악세대인 송교수의 강의(사진 위왼편)는 문리대 동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는 외교학과 출신의 이채진 교수가 한반도를 둘러 싼 각국의 외교전과 현안에 대해 강의를 해 주신바 있다. 문리대에는 특히 미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교수진이 많아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회원들에게 좋은 강좌를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전에 3년간 회장을 맡아 봉사한 박정모 (사회 66) 동문은 이번 모임이 특히 인상적이었으며 좋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남가주 문리대 동문의 신년하례식은 문리대 모임 중 가장 많이 모이며, 동문 간의 끈끈한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기사제공: 박제환 회장]

 


‘이준행 특지장학금’수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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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동창회 전 회장이며 현 모교 총동창회 이준행 (공대 48) 부회장의 '이준행 특지장학금' 수여식과 송년의 밤이 지난 12월 28일 뉴욕 근교 맨하셋 펄이스트 중국식당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7명의 학생에게 각각 2,500 달러의 장학금을 수여되었다.  5명의 대학 재학생과 2명의 석사과정 학생은 한ㆍ중ㆍ일ㆍ영ㆍ독어에 능통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했다.

장학생인 김현우, 조셉 패도, 시리샤 메스키, 로배카 패도, 장미나, 케서린 애린 김, 다니엘 정에게 각 $2,500씩 장학금이 수여됐다. ‘준이 장학재단’은 매년 연말에 7명의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기사제공: 송웅길]

프랑코 코렐리 (Franco Corelli) –역강하면서도 서정적인 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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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웅 (의대 55)

 

   내가 코렐리를 처음 본 것이 1967년 4월 그가 메트(Metropolitan Opera)의 순회공연차 보스턴에 왔을 때였다. 그는 훤출한 키에 이목이 정연한 대단히 날씬한 미남형 중년신사였다. 그가 마스네의 ‘베르테르’에 출연하러 온 것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요란한 박수가 장내를 진동하였다. 그 날씬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몸에서 나오는 음성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음성을 드라마틱 스핀토로 통상 분류하는데 대단히 웅장하고 남성다운 매력적인 목소리이다. 그는 부단한 노력과 연마로 자기 스스로 새로운 발성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처절하게 이룩한 그의 창법을 판정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상충하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출중한 테너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많은 팬들이 그를 ‘테너의 왕자’(Prince of Tenors)라고 부른다.

   물론 그는 그의 배우같은 미끈한 풍채의 덕분도 있지만 그의 남성적인 역강한 음성때문에 20세기 테너로서의 으뜸자리에 오르게 된다. 우선 그가 무대에 서면 6척 넘는 키에 그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장내를 완전히 제압해 버린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찬란히 진동하면서 ‘높임 C’까지 유연히 올라가며 언제든지 그는 벨벹같은 서정적인 부드러운 음성을 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창법을 일반적으로 벤야미노 질리(Beniamino Gigli)에 비유하지만 어떤 사람은 쟈코모 라우리-볼피(Giacomo Lauri-Volpi)의 전통적인 벨 칸토(bel canto) 창법에 비유하기도 한다.

   출생과 성장

   여기에서 그의 인생역정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는 동북부 이탈리아 항구도시 안코나(Ancona)에서 1921년 4월에 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그의 집안에 음악적인 재질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 아우구스토(Augusto Corelli)는 35세때 오페라 테너로 입신하였고, 그의 친형 알도(Aldo)는 학교를 중퇴하고 바리톤으로 전향하였고, 그의 삼촌 두사람이 안코나의 극장 코러스 대원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부친은 해군조선기술자였지만 그의 부모는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 프랑코는 바다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친의 생업을 이어 조선기사가 되려고 볼로냐대학 해양공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 친구와 어울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하루 그는 친구를 따라 피렌제로 가서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하였다. 그때 판정관의 한 사람이 었던 작곡가 피체티(Pizzetti)가 성악공부할 것을 그에게 권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장 페사로음악원에 입적하여 오페라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파보니(Rita Pavoni)에게 사사하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코렐리는 고음정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후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의 스승 멜로키(Arturo Melocchi)의 제자 Scaravelli를 통하여 어깨 넘어로 배운 발성법을 자기에게 맞도록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델 모나코의 발성법을 열심히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독작적인 발성법을 개발

   훗날 코렐리는 제롬 하인즈(Jerome Hines)에게 자기의 발성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였다. “멜로키는 이탈이아에 있어서는 제일가는 (발성법)기술자로 알려졌다. 나의 친구 Scaravelli가 그에게서 렛슨을 받고 와서 나에게 그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어서 나는 그의 발성법을 그대로 배웠다. 그리고 나 자신은 두번 멜로키의 렛슨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발성법은 한음정 한음정을 성대를 통하여 방사(放射)하는 형식인데 이는 대단히 간단한 방법으로 인두를 낮추어 인후를 최대한으로 넓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인두를 너무 낮추어서 음성의 정교함에 지장이 생기는 것에 착안하여 인두를 부동(浮動)시키는 변법을 고안하였다. 그러는 한편, 코렐리는 카루소, 라우리-볼피, 페르틸레(Aureliano Pertile) 및 질리의 음반을 들으면서 발성법을 연구하였다.

   ‘로마오페라극장’에 발탁

    1951년 여름 로마오페라좌의 지휘자가 ‘스폴레토 극장의 경연대회’에 참가하기를 종용하였다. 코렐리는 오페라 ‘카르멘’의 돈호제역으로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그 결과로 1951년 11월에 그는 ‘트로바토레’의 만리코(Manrico)로 로마오페라좌에 데뷰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이탈리아 전국의 작은 오페라극장에 출연하고 또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다. 1953년 그는 로마오페라좌의 중견 테너로 입적되어 1958년까지 있으면서 벨리니의 ‘노르마’(Norma)에 칼라스(Maria Callas)의 상대역 폴리오네로 등단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상견이었다. 칼라스는 당장 그의 저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후 칼라스가 은퇴할 때까지 여러번 상대역으로 출연하였다. 1956년에 ‘페도라’(Fedora), 1958년에 ‘해적’(Il Pirata), 1960년에는 ‘폴루이토’(Poluito) 등에서 함께 출연하였다.  그러나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좌에서 이탈리아 대통령과 고관대작들이 참석한opening night에 유명한 ‘칼라스의 무단퇴장’ 으로 오페라가 첫막으로 끝난 운명의 밤에 가엽게 외톨이가된 폴리오네이기도 하였다. 사실 칼라스는 그전부터 몸이 불편하여 대역을 부탁했었는데 주최측이 끝내 거절하였었다고 주장하였고, 후에 법정에서 승소하였다. 

   로마 오페라좌에 몸담고 있는 동안 코렐리는 국내외의 여러 오페라 하우스에 여러번 출연하였다. 1954년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스폰티니의 ‘베스탈레’(La Vestale)의 리치니오(Licinio)역을 칼라스(쥴리아역)를 상대로 출연하였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훗날 칼라스는 코렐리가 아주 친절하였다고 칭찬하고는 그가 너무 잘 생겨서 질투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로레타 디레리아와 화촉

    1957년 그는 소프라노 로레타(Loretta Di Lelia)와 교제한 끝에 결혼하였다. 결혼후 그녀는 전적으로 그를 뒷받침하였다. 결혼하기전 로마에서 공연을 마친 후 그녀가 한번 무대뒤에 서명받으러 온 것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1958년 그는 나폴리의 산 칼로 극장에서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의 돈 알봐로 (Don Alvaro)로 출연하여 레오노라로 출연한 테발디(Renata Tebaldi)의 상대가 되었고, 1959년에는 ‘아드리아나 르크브러’(Adriana Lecouvreur)에서 마그다 올리베로(Magda Olivero)를 상대하여 마우리지오(Maurizio)로 출연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그는 총체적으로 30개의 역을 연출하였는데 여기에는 남들이 전혀 출연하지 않은 오페라도 섞여있다. 예를 들면 스폰티니(Spontini)의 Agnese di Holenstauffen, 헨델(Handel)의Giulio CesareHercules, 프로코피프(Prokofiev)의전쟁과 평화 및 계리니(Guidi Guerrini)의 Enea 등이다.

   연기실력도 대단해

   코렐리는 음성뿐 아니라 연기실력도 영화배우들을 능가한다. 그의 연기를 영상으로 보는 것이 한층 더 실감나기도 하다. 여기에 오페라의 진미가 있는듯 하다. 지금 시중에 나온 DVD를 한번 점검해 본다.

1954년 9월26일에 제작한 I Pagliacci에 Mafalda Micheluzzi(Nedda), Tito Gobbi(Tonio) 등과 Canio로 나온 코렐리의 연기는 정말 걸작중의 걸작이다. 즉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진가를 보여준다.

1955년에9월 24일 밀라노에서 제작한 Tosca에 Renata Capnist(Tosca), Carlo Tagliabue(Scarpia), Antonio Sacchetti(Angelotti) 등과 함께 Mario Cavaradossi로 출연한 콜렐리의 연기는 가관이다. 특히 그의 ‘별은 빛나고’(E lucevan le stele)는 명창중의 명창이다.

1956년 6월 13일에 제작된 Carmen에서 Belen Amparán(Carmen), Anselmo Colzani(Escamilo), Elda Ribetti(Micaela) 등과 함께 돈호제로 등장한 코렐리의 열창과 열연은 모든 영화배우들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시 음악이 감정의 표출을 상승시킴을 볼 수 있다. 실로 오페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장면들이다.

1958년 12월 23일에 방영된 Turandot에 Lucille Udovich(주제역), Renata Mattioli(Liu) 등과 함께 Calaf로 분장한 콜렐리의 열창과 열연은 대단히 특출하다. 특히 그의 아리아 ‘아무도 자지못해’(Nessun dorma)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특히 1973년에 제작된 Andrea Chenier에 Colestina Casapietra (Maddalena), Renato Cappuccilli (Gerard)와 함께 주제역으로 나온 코렐리의 비통한 열정의 발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인다운 기질을 부각시키고 있다.

   항상 준비성이 대단해

    그는 어느 출연을 위하여서도 부단한 노력으로 늘 준비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준비를 오래 시키는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와 같은 훌륭한 무대감독을 존경하였다. 같은 이유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매우 선호하고 존경하였다. 프랑코는 오페라 하나하나를 오래 예행연습할수록 명품이 나올 수 있다고 늘 강조하였다.

   과연 코렐리는 그의 독특한 발성이 독자적인 구절법(Phrasing)과 맞물려 그의 웅장한 남성적인 음성이 찬란히 요동하면서 고음에 까지 여유있게 올라가는 묘기를 창출하여 많은 팬들을 현혹시켜 왔다. 동시에 그는 이 독창적 묘기가 언제 사라질까 매우 걱정하며 신경쓰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목소리가 아직 있는지부터 점검하곤 하였다. 사실, 우리 동문으로 세계적인 오페라가수로 일약 부상하여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누비고 다니는 이용훈 테너도 한때 목소리를 잃은 후부터 이런 집념에 사로잡히고 있다고 한다. 이용훈 동문의 발성법이 코렐리와 비슷하게 느껴지며, 그 역시 풍부한 성량의 드라마틱 테너로 지금 현재로 세계적인 정상에 올르고 있다고 필자는 보고있다.

   1961년부터메트’에 등단

   콜렐리의 뉴욕 메트로폴리탄좌의 데뷰는 1961년 1월에 베르디의 ‘트로바토레’의 만리코(Manrico)로 같이 데뷰로 등장한 프라이스(Leontyne Price)의 상대로 이루어 졌다. 그해 뉴욕에서의 정기공연이 끝나고 보스톤에서의 첫 순회공연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푸치니의 Turandot의 칼라프역으로 주제역 닐쓴(Birgit Nilsson)의 상대로 출연했을때 닐쓴이 높임 C를 좀 길게 뽑아 조금 빨리 끝낸 코렐리가 퍽 무안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제3막에 가서 콜렐리는 그녀의 뺨에 키스하는 척하고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화가 난 닐쓴은 다음 공연지인 클리브란드에 안가겠다고 루돌프 빙(Rudolf Bing)에게 우겨댔다.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는데도 코렐리는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다. 사실 메트 지배인이었던 빙이 투덜거리던 코렐리를 무마하기 위하여 시킨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또 한번은 나폴리에서 ‘트로바토레 를 공연할때 3층의 특실에서 관람하던 한 학생이 그에게 야유하고 있었다. 콜렐리는 만리코의 의상을 입은 채 무대뒤로 3층에 올라가서 잠긴 문을 어깨로 밀어제치고 차고간 칼로 그를 위협하였다. 이때 두 안내원이 그를 저지하였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20분동안 목소리를 잃었다. 다행이도 제시간에 무대로 돌아와서 복수를 부르짓는 “Di quella pira” (불타는 화형대를 보라)를 목청높이 불르면서 분푸리하였다.

   그해 말 그는 이탈리아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베르디의 La Battaglia di Legnao를 스텔라(Antonietta Stella)의 상대로 불러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마스카니의 ‘시골기사’(Cavalleria Rusticana)의 주제역을 투치(Gabriella Tucci), 지아요티(Bonaldo Giaiotti)와 함께 연출하였다.

   심한 무대공포증에 시달려

   코렐리는 성미도 급하고 날카롭지만 심한 무대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전에 생마늘이 섞인 스테익을 먹는 습성이 있고 어떤때는 상대역이 노래하는 동안 무대옆에 살짝나와서 목을 추기곤 한다. 그는 음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담배도 안피고 술도 안 마신다. 그래서  취미로 승마, 정구, 수영 혹은 스키를 선호한다. 그리고 카메라 사진기술에 조예가 깊다. 이런 불안한 상태에서 그는 1973년 베르디의 Macbeth에 Sherrill Milnes 및 Grace Bumbry를 상대로 출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1974년까지 메트에서 Cavaradossi, Maurizio, Ernani, Rodolfo 및 Edgardo의 역에 모두 출연하고 새로 프랑스말로 제작된 ‘로미오와 쥴리에트’ 및 ‘베르테르’의 주제역을 거쳐, Rudolf Bing 의 은퇴 후 다시 돌아온 칼라스와 ‘토스카’에 출연한 후 1964년 12월 비요너(Ingrid Bjoner)의 상대로 Turandot의 Calaf로 다시 출연하고 1975년 메트의 순회공연에 참가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일본에 순회 공연하였다.

   이처럼 Met에서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계속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그는 Deutsche Oper Berlin(1961), La Scala(1962)에서 Joan Sutherland상대로 Meyerbeer의 ‘Huguenots’, Salzburg Festival(1962)에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지휘하에 Leontyne Price상대로 ‘트로바토레’에 시미오나토(Giuletta Simionato) 및 바스티아니니(Ettore Bastianini)와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62년 필라델피아에 처음 와서 Tosca의 Mario Cavaradossi로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그후 10년 동안 매년 필라델피아 Lyric Opera Company에 와서 여러역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파리 오페라좌(L’Opera)에서  칼라스를 상대로 ‘Tosca’에 출연하였다.

   별명이 ‘Sputnik Tenor’ 혹은 ‘Pecorelli’

   코렐리의 인기가 우주시대의 개막에 걸맞게 급속히 상승하고 있는 것을 본 많은 가수들이 그를 ‘Sputnik Tenor’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또 Pecorelli라고 그의 이름을 염소(Pecora)에 비유하였다. 이는 그의 발성법이 염소의 울음소리 같다고 비하하는 의미도 된다. 같은 맥락에서 빨리 출세하였다는 이유로 이용훈 테너의 경력을  오느날 ‘로케트 커리어’라고도 칭한다. 코렐리가 20세기 후반의 오페라계를 빛낸 테너였다면, 이용훈은 21세기 전반을 장식할 테너로 부상하고 있다.

   코렐리는 항상 열정적으로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초기엔 악보불변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성숙해 가면서 악보를 이탈하는 경우가 점차로 적어지긴 하였지만... 1966년 The New Herald Tribune의 Alan Rich는 “코렐리는 오페라에 고용된 것이 아니고 오페라를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평하였다. 또한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서트른 프랑스어투와 어감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한편, The New York Times의 Harold C. Schonberg같은 비평가는 코렐리의 독창적인 연기를 극구 감싸주었다.  숀버그는 1965년 메트에서 제작한 ‘토스카’에서 칼라스를 상대한 Cavaradossi의 열연을 평하면서 “테너의 음성이 장려하게 장내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가 표현의 자율권을 행사했다면 그의 연출이 자체의 논리를 보여준 것이겠지...’  과연 글룩크의 오페라혁신이전에 성행하던 가수들의 과시와 횡포와 남용이 오페라계를 얼룩지게 만들었던 시대로 복귀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계속 상승하고 그의 음반의 수요가 그가 타계한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1976년 그는 푸치니의 고향 ‘Tore del Lago’에서 그의 오페라 출연을 마감하였다. 그때 그는 55세였다. 그의 목소리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수록 그는 더 신경을 곤두 세우곤 하였다. 그의 성미로 보아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그는 이때 은퇴성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의 목소리가 쉽게 피곤해지고 혼탁해져서 예전의 찬란하던 서정적인 부드러움이 가시고 있다. 오랜 성악가로서의 생활이 (성대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나는 늘 태산같이 걱정하였고 또 여러사람에게 화를 많이 내었다. 나는 신경 덩어리였고 침식을 잃고 있었다.”

   은퇴후 그는 밀라노와 뉴욕에서 발성법을 젊은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1995년 그는 뉴욕에서 마스터 클라스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때였다. 그때 그는 조금 야위어 보였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반짝이었다. 그후 몇년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2003년 10월 그는 심장마비로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숨지었다. 그때 그는 겨우 82세였다. 그는 실로 20세기의 최후의 역강한 테너(tenore di forza)로서 힘차면서 찬란히 울리는 고음과 벨벹같은 서정적인 부드러움을 겸비한 유일한 테너였다.

   콜렐리는 타계하기 얼마전에 “미래의 오페라가수는 한국에서 다수 나올 것”이라고 한인 젊은 가수들을 두둔하였다. 그 동안 소프라노뿐 아니라 테너, 바리톤, 바스, 메조에 이르기 까지 한인가수들이 세계무대에 속속진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늘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오페라를 들으면서 오페라 인생을 즐기고 있다. 

한미 간(肝)협회장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2018 장학생 모집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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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장학생 모집공고

Announcement of Scholarship Application

by Seoul National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in the USA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SNUAA-USA) 가 미국내 대학에서 수학하는 서울대 동문들의 학구열과 지도자 자질을 증진, 격려하는 목적으로 아래와 같이 장학생을 선발합니다. 관심있는 동문들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응모자격: 모교에서 수여하는 학위를 이수한 후 미국내 대학 또는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 가고 있는 동문

제출 서류:

  1. 지원서: Application Form (snuaa.org에서 download 가능)
  2. 서울대학교 학위 이수 증명 Proof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Graduate
  3. 현 미국대학 재학 증명 및 성적 증명 Proof of Current Enrollment and Transcript
  4. 2명 이상의 추천서Letter of Recommendation (2 or more)
  5. 자기소개서 Essay (500 단어 이내로)

응모방법:

  1. 지원 서류를 작성한 후 구비 서류와 함께 4월 30일까지 SNUAA-USA로 우편 또는 이메일로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Attn: Scholarship application).

          동창회 주소: SNUAA-USA, 869 South St.,  Fitchburg, MA 01420

          Email: general@snuaa.org

  1. 이메일 제출시 모든 서류는 pdf 로 작성하여 제출하시기 바라며 화일명에 이름을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편 접수시, 모든 구비서류에 지원자의 이름을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장학생으로 선발된 동문은 2018년 5월 31일까지 개별 통보되며, 2018년 6월 16일에  보스톤에서 열리는 제 27차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평의원회의에서 시상합니다.

2018년 2월 28일

서울대학교 미주 동창회 회장   윤상래

서울대학교 미주 동창회 장학위원장   김용구

남가주 동창회 신년하례 및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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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회장에 강신용 (사대 73) 동문 취임

지난 2월 3일 LA 한인타운에 위치한 Oxford Palace Hotel에서 2018년 서울대학교 남가주 총동창회 정기총회 및 신년회가 300여 명의 동문들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유병원(상대 76) 총무국장의 사회로 개회선언에 이어 애국가 제창(선창: 장진영, 음대 88)과 교가(선창: 방석훈, 농대 56) 제창이 있었다. 다음 내, 외빈 소개에 이어 오흥조(치 대 56) 전 총동창회장의 격려사가 다음과 같이 있었다. “신년총회에 참석하여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는 1999 년 24대 동창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대학 교 동창회의 산 증인으로 여러분과 만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참여와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발전을 거듭하여 미주동창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뿐만아니라 여러분들은 미주 동포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따뜻한 격려와 손길을 내밀어 더욱 자랑스런 동창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오늘처럼 내일도 열심히 살아 가는 서울대인이 됩시다.”

성낙인(법대 68) 서울대 총장이 축사를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보내 왔다. “ 서울대 미주 동문 여러분께서는 정직과 성실, 헌신으로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위상을 드높이고 계십니다. 특히 2,500 여명의 남가주 지역 동문들께서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끈끈한 동문 결속과 친교, 교류로 미주 동문사회를 선도해 왔습니다. 오늘 새로이 남가주 총동창회 회장으로 취임하시는 강신용 동문님은 총무국장 등으로 많은 일을 해 오셨으며, 공회계사로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이어 오셨습니다. 앞으로 신임 강신용 회장님의 이러한 경험, 지혜, 열정과 탁월한 리더쉽을 통해 다른 어떤 지역동창회 보다 동문들의 화합과 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동문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음 윤상래(수의대 62) 미주동창회장은 축사에서, “오늘 선후배 동문님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남가주 동창회는 지난 43년 간 끊임없는 발전을 하여 서울대 미주동창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반석 위에서 더 큰 발전을 할 것을 믿습니다. 미주동창회 도 금년에 27주년을 맞이합니다. 당면한 고령화의 문제는 장래의 심각한 도전을 부여합니다. 현재 미주동창회비나 후원금이 50, 60대 동문님들에게서 오는데 향후 10년, 20 년이면 미주동창회에 재정 곤란이 올 것입 니다. 미주동창회는 고정 경비가 있어서 재정 자립이 절대로 요구되고 있는 바, ‘SNUAAUSA FOUNDATION’은 이런 면에서 필수적으로 우리가 설립,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가주 동창회는 가장 큰 지부로서 여러분들의 참여가 있으면 미주동창회의 기금 육성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가주 동창회의 발전을 기원하며 강신용 신임 회장님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유병원 총무국장의 사업보고와 송두일(상대 82) 재무국장의 재무보고로 이어졌다. 이어 강신용(사대 73) 신임회장 및 한귀 희(미대68) 수석부회장 인준이 있었고, 성주경(상대 68) 총동창회장의 정기이사회 결의사항 보고가 있었다. 다음 성주경 총동창 회장이 이임회장단에게 감사장을 증정하였고, 정인환(법대 54) 법대회장, 한효동(공대 58) 공대회장, 한귀희(미대 68) 미대회장, 이호진(간호대 74) 간호대회장, 권희재(상대 80) 상대회장, 안혜정(가정대 77) 가족의 밤 위원장, 염인숙(가정대 78) 가족의 밤 위원 장 등에게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이어 박선우(음대 13) 동문에게 발전기금 미주재단 이만택(의대 52) 이사장이 장학금 $2,500을 수여하였는데, 박선우 동문은 서울예고와 서울음대 성악과를 전액 장학생으로 수석 졸업하고, 다수의 콩쿨에서 수상했으며, 현재 USC Thorntron School of Music에서 우수 장학생으로 석사과정 이수 중이다. 2018년 4월 Postcard from Morocco에서 Lady with Hand Mirror주역으로, 또한 2018년 아스펜 뮤직페스티벌 장학금 수료 및 공연 예정에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동문이다.

성주경 총동창회장의 이임사는 다음과 같다. “임원들과 단과대 회장님 들과 함께 행사준비를 의논하면서 진지하게 대화하는 모습들이 좋았습니다. 장학위원회 시행 세칙, 경조사 지급규정, 미주동창회 차기회장 출마 신청에 대한 사전조정(내규) 등을 만들어 정기이사회에 통과됨으로서 다음 동창회의 근간을 마련했습니다. 2018년 강신용 회장은 역대회장 중 가장 젊은 73학번이고 패기가 넘치니 우리 동창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 줄 것입니다.”

이어 동창회기 전달식이 있었다. 다음은 최용준(수의대 81) 신임 총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강신용 신임회장이 이임하는 성주경 회장에게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강신용 신임회장은 취임사에서, “동창회 제일 큰 잔치인 정기총회 및 회장 이취임식에 참석하신 동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동문 한 분 한 분이 소속감을 느끼고 재미있는 동창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특별한 부탁은, 예약문화(RSVP), 시간 엄수, 동문연회비 납부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단과대 회장단 소개가 있었고, 2018년 신임회장단 발표 및 인준으로 계속되었다. 다음 한귀희 수석부회장 인사가 있었다. ”올 한 해 강신용 회장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워서 내년에 역대 회장님들께서 해 오셨던 동창회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다음 최용준 총무국장의 2018년 사업계획 보고로 이어졌고 단체사진 촬영이 있은 후, 저녁식사를 하며 2017년도 행사사진 슬라이드쇼가 있었는데, 이는 홍선례(음대 70) 문화위원장이 1년 동안의 행사를 찍은 사진들이다.

다음 2부에서는 서울대 남가주 동문합창단이 “아리랑, 도라지” 등을 연주하였고, 해밀 국악팀이 민요, ‘사랑가, 정선 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을 장고 반주에 맞춰 연주하였으며, “옹해야”는 관객들과 함께 메기고 받는 유절형식으로, 3인의 창자가 앞소리를 부르면 관객이 후렴을 따라 부르며 모두는 즐거운 분위기였다. 박선우 동문이 답례로 Puccini의 오페라 La Boheme 에 나오는 아리아, ‘Quando me’n bo’를 불렀는데, 그 폭넓은 음량에 모두 감탄하였다. Dancing Queen경연에서는 이상실(간호대 88) 동문이 수상하였다. 이어 복면가왕 대전이 있었고, 대상은 지창열(문리대 83) 동문의 ‘지중해’였고, 2등은 박승현(음대 85) 동문이 ‘Right Hand(Drake)’에 맞춰 춤을 추어 상을 받았다. 이어 경품추첨에서는 특등상인 한국왕복권 비행기표(성주경 2017 총 동창회장, 강신용 신임회장, 한귀희 신임 수석부회장 제공)는 신정자(사대 63), 이명규( 미대 73), 백옥자(음대 71) 동문 등이 추첨의 행운을 안게 되었다. 그 외 상임이사와 단과 대회장들이 많은 상품을 기증하였다. 마지막으로 동문들은 서로 악수를 주고 받으면서 새해의 복을 빌어 주며 신년회는끝났다. [기사제공: 홍선례 편집위원]

정홍택 동문 문학미디어 동화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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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상대 61) 동문이 서울의 계간 문학지 <문학 미디어>가 주관하는 제 45회 문학미디어 문학상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정 동문은 <어른을 위한 동화 – 파치의 모험> 으로 동화 부문에 응모해 당선되었다.

신인상 선정 이유로 "삶의 가치를 모든 자연에 대한 애정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작가가 그리는 좋은 생각이 삶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주제를 끝맺음에서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다." 라고 말했다. 문학 미디어는 국제 Pen Club 회원이기도 한 한국에서 권위있는 문학지이다.

정동문은 지난 1999년 이라는 문학잡지사에서 '수필가'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신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있다.         링크:  당선작 <어른을 위한 동화 - 파치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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