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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택 (의대, ’65)
인간은 호기심이 많다. 뭐든지 알고 싶어 한다.
공자는 논어 1장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 해서 배움의 기쁨을 피력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를 한탄했고 우리 속담에는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말이 있다.
반면에 진시황은 책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시켜버려 자기보다 많이 아는 짓을 원천봉쇄 했고 캄보디아의 공산주의자 폴 포트도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수십만의 지식인을 학살했으며 많은 문화에서 여성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르치기를 억제해 왔다.
세상에는 배워야 될 것도 있고 배우나 마나인 것도 있고 또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는데 배움이라는 것도 칼날의 양면 같아서 잘 쓰면 약이 되지만 못 쓰면 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예 안 배울 수도 없는 것이 배움이야말로 생존경쟁의 필수조건이고 배워야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때문이니 선한 마음으로 배움이란 무엇인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원칙적으로 배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게 모르게 은연중에 배우는 묵시적인(implicit) 학습이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근거에 따라 배우는 명시적(explicit) 학습이어서 전자는 무의식적, 무조건적이고, 후자는 의식적이며 조건적이다. 과학적으로 학습이론을 전개하려면 이상의 분류를 따라야 하겠으나, 우리는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므로 정신의학의 통념적인 분류에 따라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분류해 보기로 했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Pavlov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에서 개한테 종소리를 울리면서 먹이 주기를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음식을 가져오지 않고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질질 흘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우리나라 삼국시대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그 양반이 혈기 방장했던 젊은 시절에 매일같이 방과 후에는 단골 기생집을 찾아갔더니, 얼마 후에는 고삐를 잡아주지 않아도 말이 알아서 그 집으로 모셔 주더란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우리의 김유신 장군은 단칼로 자기 애마의 목을 치고 주색을 끊었다는데, 이때 그 양반이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왜 말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나를 생각했더라면, Pavlov보다 1300년이나 먼저 노벨상을 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또한, 그때 왜 자신이 자신을 채찍질 못 하고 애매한 말을 베었는가를 성찰해 보았다면, Freud보다 1300년이나 앞서 대표적인 방어기제 “전치(displacement)”를 발견해 냈을 텐데, 역시 김유신 장군은 글쟁이(문관)가 아니라 칼잽이(무관)였기 때문에 그 대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하긴 노벨상보다야 삼국통일이 백배 나을지니, “깅께, 칼잽이가 글쟁이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뵈-”
학습이란 한마디로 특정 상황에서 한 가지 일을 계속 반복할 때 뇌의 특정 부분의 회로 형성(net working)이 강화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뇌의 심층에 찍힌 프로그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움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감작작용(sensitization)’이다.
학습의 첫 단계인 연상작용은 어떤 일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고전적 조건화로, 이는 모든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초로서, 번개의 무서운 파괴력을 보고 베자민 프랭클린은 가느다란 전깃줄로 만든 연을 날려 번개의 정체가 전기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피뢰침을 고안해서 인류를 보호했으며, 토머스 에디슨은 번개가 칠 때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음극과 양극을 충돌시켜 세상을 밝혀주는 전등을 발명해 내지 않았는가?
간단하게 조건 반사(conditional response)라고도 불리는 이 고전적 조건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들이다. 사람도 개와 같이 공복 때 음식을 보거나 냄새만 맡아도 혈중의 insulin이 올라가므로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오후 6시 저녁 끼니때가 되면 음식이 안 들어가더라도 혈중의 insulin이 올라가서 혈당량을 내려주기 때문에, 시계가 없더라도 사람이 “허기”가 지는 것으로 몇 시쯤인지 알게 된다.
당뇨 기가 있는 한 친구는 저녁 6시가 되면 속이 헛헛해서 반드시 무엇을 먹어야지 기운을 차리고 알코올 중독 끼가 있는 저자는 그때가 되면 속이 출출해지기 시작한다. 여름철 오후에 할인 골프를 칠 때 그 친구는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끝까지 치고 저자는 9홀만 돌고 클럽하우스에 가서 맥주를 마시다 보니 골프 실력이 비교가 안 된다. 학습에서 두 번째 중요한 것은 “끈기”이다.
이때 매일같이 반주를 계속하면 알코올중독자가 되나 반주 대신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 세월이 지날수록 술 대신에 기도가 “고파”진다. 이것은 알코올중독자를 치료하는 한 방편이지만 기도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시거나, 기도하기 전에 술을 마시는 사람, 또는 저자같이 술을 마시면서 막간을 이용해서 기도하는 사람들한테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오로지 기도만 드려야지 왔다리갔다리 하다간 삼천포로 빠져버린다. 학습에서 세 번째 중요한 것이 “집중력”으로 이는 잡생각을 싹 쓸어버리는 일이다.
Pavlov의 실험에서 나중에 음식도 주지 않으면서 종만 계속 울려대면, 얼마 후에는 개도 알아차리고 종이 울려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되는데 이를 소멸(또는 소거 extinction)이라고 한다.
이 이원택 박사가 마누라가 한국 나간 열흘 동안 저녁을 매일같이 밖에서 때우느라 반주로 소주 한 병씩을 까고 왔더니, 그 후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도 식탁에 앉으면 배는 고프지 않은데 속이 출출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애절한 눈빛으로 마나님한테 싸인을 보내는데, 이 무정한 어부인께서는 아랑곳없이 일일이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가족들의 건강, 친구나 동료들은 물론 하다못해 오바마,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까지 빌면서 장장 15분간이나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술이 고팠던 배가 서서히 밥이 고픈 배로 변해가곤 한다. 이만하면 목사들이 왜 기도를 오래 하는지 이해가 가는가?
그런데 6개월 후에 마나님이 다시 한국에 나갈 일이 있어서 다시 밥집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식탁에 앉자마자 그동안 소멸된 줄 알았던 그 몹쓸 술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밥보다도 술이 더 고파지는 것은 마누라가 없어서 허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젊고 발랄한 그 식당 종업원이 술맛을 돋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좌우간 6개월간이나 술을 끊었다가도 식당 아가씨의 다정한 눈빛 한 번에 그동안 공든 탑이 좌르르 무너지나니, 이는 한 번뇌에 깊숙이 각인된 추억은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심층부로 가라앉았다가 대뇌피질에 틈만 생기면 다시 뚫고 올라오므로, 결국은 많은 정신병이 완전히 회복이 안 되고 단지 부분적 회복(partial recovery)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들의 자체 재활 모임인 AA(alcoholic anonymous)에서는 한번 중독자는 평생 중독자라고 해서, 30년 전에 술을 끊었어도 아직도 회복하고 있다는 뜻의 recovering(not recovered) alcoholic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한눈을 팔지 못하게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AA 모임에 참석하라고 한다. 말로 해서 안 되는 사람은 몸으로 때우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이원택 박사가 예쁜 아가씨를 보면 한 잔 생각이 나는 버릇이 지속되어, 밥집보다는 예쁜 아가씨들이 더 많은 술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을 연속적인 자극이라고 하며, 이때 한 자극에서 다른 자극으로 옮겨진 경우에도 같은 조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자극의 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가 사물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고등학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험으로, 예를 들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있거나 건널목에 stop sign이 붙어 있거나 차선 위에 stop이라고 쓰여 있으면 우리는 일단 차를 멈추고 보아야 한다.
한 단계 더 올라간 학습활동으로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따지고 보면 다른 것을 발견하는 식별력(discrimination)이라는 것이 있는데,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 한, 차를 직진하지는 못하지만, 우회전할 때는 잠시 쉬고 진행할 수 있으며, 신호등이 없는 네거리의 모든 길에 stop sign이 있으면 일단정지 후 살펴보고 직진을 해도 무방하다.
이와 같은 식별력(분별력이라고도 함)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질인데, I.Q.가 두 자리 숫자 밖에 안 되는 이 이원택 박사는 밥집, 술집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직도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또한,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밥을 보고 배가 고파지는 무조건 반응(unconditional response)과 예쁜 여자를 보면 술이 고파지는 조건 반응(conditional response: 왜냐하면 술을 많이 팔아주어야만 몸도 팔아주기 때문에)을 구별해야 되는데, 저자와 같이 정을 떼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장군(김유신)이 못되고 한낱 졸개로서 인생을 마감해야 되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Thorndike(1874-1949)는 고양이를 안에서 빗장을 걸어 닫아 놓은 상자에 놓아두고 관찰해 본 결과, 이놈이 이것저것 다 만져보고 흔들어 보다가(trial and error learning: 시도와 과오를 반복) 마침내는 빗장을 올리고 탈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쥐를 쇠창살로 만들어진 우리에 넣어놓고 전기충격을 가할 때 삐죽 나와 있는 지렛대를 누르면 전기가 단절되는 장치를 하면, 몇번 당하고 나서는 전기신호가 가기가 무섭게 지렛대를 눌러서 충격을 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도구적 학습(instrumental learning)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행동을 도구를 써서 조정할 수 있다는 모든 행동심리학의 모체가 되는 학설이다.
그 후 미국의 행동심리학자 Skinner(1904-1990)는 쥐 한 마리를 막대기가 붙어있는 상자에 가둬놓고 보았더니, 이놈이 그 안에서 배가 고파서 지랄발광을 하다가 우연히 그 막대기를 건드리니까 음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다음부터는 배가 고플 때마다 그 막대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도구를 강화재(reinforce)라고 하고 이때 받아먹는 음식을 보상(reword)이라고 한다.
강화(reinforcement)에는 쥐새끼가 지랄발광을 하면 음식이 안 나오고 얌전히 있어야 음식이 나오는 긍정적(+) 강화와, 전기충격을 피하려고 고양이가 빗장을 열고 도망을 치는 부정적(-) 강화가 있는데, 이와 같은 조건화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조작적 조건화의 이론이며, 현재에도 많이 쓰이는 행동수정(behavioral modification) 요법의 근간이 되는 학설이다. 혹자는 부정적 강화는 어떤 원하지 않는 반응을 약화시키기 위한 괴로운 자극이고 처벌(punishment)은 어떤 반응이 재발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다 그것이 그것이다. 다만 행동요법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벌을 하면서 돈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데서 온 양심의 가책 때문에 처벌이란 말 대신 ‘부정적 강화’란 고상한 말을 썼으리라 짐작한다.
세계 1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이 세계의 패자로 부상함에 따라 과학의 무대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는데, 심리학에서도 인간의 내면세계를 연구하는 자기심리학이나 분석심리학이 인간의 외부에 나타나는 행동을 중시하는 행동심리학(behavioral psychology)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문명이 경제력에 비례하는 것처럼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돈에 좌우되는바, 연구하는 데도 돈이 들지만 선전하는 데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즉 저자의 책이 빛을 못 보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흥청망청하던 경기를 타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미국사람 Watson(1878-1958)은, 1920년에 11개월짜리 어린애한테 처음에는 무서워하지 않았던 흰쥐를 보여주면서 계속 벼락 치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니, 그다음부터는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흰쥐만 보면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것(classical conditioning)을 보고, 나중에는 기고만장하게 자기에게 심신이 건강한 정상애를 주면, Skinner 성님이 고안해낸 operant conditioning(조작적 조건화)을 적용해서, 의사건 변호사건 예술가건 정치가건 마음대로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다녔다.
모든 것이 틀에 잡히고 고리타분한 봉건주의와 구교를 배척하고 자유의 땅에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마음껏 활개를 펼쳐보려는 개척정신이 투철한 신교도(protestant)들한테는 여간 솔깃한 말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행동심리학의 발달은 자본주의 토대 위에,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면적인 것에, 질보다는 양, 이론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시하는 양키 문화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이미 정신유전학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애는 자라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라고 세 살 때부터 피아노 독선생을 따라 붙였는데 자라보니 장사꾼이 되어있고, 또 어떤 애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라고 다섯 살 때부터 웅변대회에 끌고 다녀도 결국은 시인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바야흐로 궁지에 몰린 행동심리학의 왕초(god father: 알카포네 비슷하게 생겼음) Watson 두목께서는 골치 아픈 심리학을 때려치우고 유수한 광고회사를 차려 떼돈을 벌었는데, 그 당시의 동료들이나 후학들이 그가 변신을 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아마도 이 이원택 선생도 골치 아픈 정신과를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소설가가 되었다면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조작된 인간 또는 계획된 사회(planned society: 역시 또 하나의 극단주의자인 Skinner가 만들어 낸 말)라는 말은 쑥 들어가고, 유전학에 기초를 둔 복제인간(clone)이나 생태학에 기초를 둔 세계화(globalization)란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사회적인 학습이론의 시초로는 오스트리아의 생태학자 Lorenz의 각인(imprinting)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모양으로, 연못에 떠 있는 오리새끼들은 항상 제 어미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모든 동물이 갓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 이외에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상대방을 모방(modeling)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학설이다. 오리 새끼가 처음 깨어나서 최초로 본 커다란 움직이는 물체는 아마도 제 에미일 것이므로 에미가 움직이면 자기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어린 놈들이 과연 제 에미인지 알고 따라다니는 것인가 하고 의심한 Lorenz는 갓 부화된 오리 새끼들한테 어미를 제쳐놓고 자기 자신이 그들을 유도하였더니, 그다음부터는 어미를 갖다 놔도 어미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오리 새끼가 아주 어렸을 때는 통하지만 그놈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통하지 않으므로, Lorenz는 아주 어렸을 때 어떤 기억을 뇌에다 낙인찍는 것이 잊어먹지 않는 비결이라고 그랬다.
상대방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일은 인간에게서도 어릴 때 말을 배우거나 어떤 동작을 개발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으로 대체로 어린애는 부모를 통해서 이와 같은 학습을 시작하고 있다. 저자가 젊었을 때 딸내미가 얼마나 귀여운지 항상 “요놈의 새끼”라고 부르던 중 하루는 또래들이 몰려와서 같이 숨바꼭질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저자는 애들 애를 먹이느라고 차고에 있는 소금 통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마침 6살 난 딸애가 술래가 돼서 산지사방 찾다가 안보이니까, “요노무 새끼가 어드메 자빠졌나.” 하는 것이 아닌가(그려서 애들 앞에서는 숭늉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이어--)?
Lorenz는 나중에 물고기나 새 떼들이 자기 구역(territory)을 사수하는 것을 보고 인간세계에서도 가장 좋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해야 된다고 보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열악한 유전자를 가진 종족에 의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종족이 침범당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막아야 된다고 보았다. Lorenz 자신은 무력에 의한 구역의 확보나 종족의 선택에는 우려를 표시했으나, 일차대전 패전 후에 절망에 빠져있던 독일 민족을 단합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Hitler (그의 의부와 그를 미술학교 입시에서 떨어뜨린 사람이 유대인이었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에게 그의 사상은 정말로 가뭄에 단비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치 군국주의의 모토는 우수한 국민이 우수한 지도자를 따라가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Eugent(우수한 학생)라는 학도병을 만들어 마치 오리새끼가 떼거지로 Lorenz를 따라간 것처럼 Hitler를 따라 세계를 정복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Nazi 정권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또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Lorenz는 이차대전 패망 후 일급 전범으로 몰려서 감옥살이까지 했으나 정치와 학문을 구분한다는 방침에 따라 마침내 1973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이 사회적인 학습은 군대에서 신병훈련을 시킬 때도 유감없이 써먹는바 숙달된 조교가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하나, 둘, 셋을 세고 나서 목표물을 향해 던지는 것을 보고, 결국은 자기도 그 조교와 같은 군인으로서 그 조교가 하는 일을 못 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정신요법의 하나인 집단치료에서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본받아 행동함으로써 금연이나 체중조절, 공포증치료 등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난감한 경우 중의 하나가 바로 인지(cognition)와 인식(perception)인데 혼동을 피하기 위해 perception은 지각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지각은 여러 가지 인지작용 중의 일부로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매우 주관적인 개념인 것이다. 개념이다. 한 송이의 장미꽃을 보고도 어떤 이는 화려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우아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요염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여자를 고를 때도 “제 눈에 안경”(beauty is in the eyes of behold)이란 말도 있다. 즉 세상만사가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백 번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지각작용에는 과거의 경험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머니한테서 장미꽃을 자주 받아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모성애를 느끼고 주로 애인한테 장미꽃을 받아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색정을 느낄 것이며 저자같이 여자들한테서 흑장미만 받아 본 사람은 장미꽃에서 배신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했던 고전적 조건화도 인지적 개념 없이는 설명하기 곤란한데 1967년 Robert Rescorla 는 쥐들을 세 집단으로 나눠서 첫 번째는 Pavlov 실험 때와 같이 종이 울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었더니 쥐들은 종이 울리면 공포에 떨게 되고 두 번째는 종이 울리거나 말거나 무작위로 전기 충격을 주었더니 이놈들은 종이 울릴 때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언제 전기 충격이 올지 모르므로’ 고요한 상황에서 제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섞어서 종을 울리면서 어떤 때는 규칙적으로 어떤 때는 불규칙적으로 전기충격을 주었더니 쥐들이 ‘나도 모르겠다’라고 종소리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배움은 조건적 자극(종소리)이 무조건적 자극(전기 충격)에 대한 일관된 정보를 제공해야만 일어난다는 속발학설(Contingency theory)을 주장했다.
결국은 인지작용이란 자기가 지각한 정보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를 연결해주는 학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계모한테 매만 맞고 자라서 나중에 자기가 죽자 살자 쫓아다니던 계집애한테 딱지를 맞고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행히 살아나서도 여자를 보면 겁이 나고 좀 괜찮은 애가 접근을 해와도 결국은 파투가 날 것이라고 결혼을 못(안)하고 있다. 이 친구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세상만사를 검은색을 칠한 안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어머니도 나를 버리고 첫사랑도 나를 버렸는데 네가 지금은 암만 알랑방귀를 뀌어도 결국은 내 계모같이 되어 버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는 부정적인 자기관, 부정적인 해석, 부정적인 기대라고 해서 우울증으로 빠져버리는 3대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 정신과에서 인기가 있는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안경 색깔을 검은색에서 분홍색이나 푸른색으로 바꾸어 준다. 예를 들면 네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불과 두 살로서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계모는 콩쥐팥쥐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무식한 여자인데다가 너를 차버린 애는 보석을 돌멩이로 잘못 본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지금 너는 24세의 의과대학 학생인 데다가 너를 좋아하는 애도 알로까진 애가 아닌 것 같은데 불알 차고 나온 놈이 그렇게 용기가 없느냐고 부추겨 세우는 일이다. 우리 딸 아이가 Yale 대학에 지원했다가 미역국을 먹고 한 말이 “It’s their loss – 결국은 지들 손해” 였는데, 이 아이는 지 애비를 닮아서 어려서부터 자가 인지치료에 통달했다. 그 딸에 그 애비라고 저자도 여자들한테 딱지를 맞고는 “나를 몰라주는 너 같은 꼴통은 필요없다.” 고 자위를 하곤 하는데, 암만 봐도 딸 아이의 경우는 인지치료라고 할 수 있으나 저자의 경우에는 “신포도”에서 나오는 “자기 합리화”의 경향이 짙은 것을 보면 이것은 자신감 또는 나이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그동안 우리가 지주나 자본가의 착취에 얼마나 시달려 왔는가, 이제 공산 혁명이 왔으니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고 다 같이 못 먹고 잘 사는 공산주의를 향해 매진하자.”라는 공산당원의 세뇌교육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정신과 의사들은 안경의 색깔을 붉은색으로 바꿀 줄 모른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인지요법은 세뇌작용(brain wash)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보험회사에 치료비를 청구할 때, 내가 오늘 이 친구 뇌 세척(brain wash)을 했으니까 100불 내시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를 비롯한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cognitive psychotherapy라는 점잖은 말을 쓰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주로 인지요법의 긍정적인 면만을 생각해 왔는데 만약에 이 인지요법을 악용하는 경우 그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새파란 김정은이를 ‘어버이 수령’으로 모시는 북한의 동포들을 비롯해서 극단주의 이슬람교도들이 테러리스트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인지요법(즉 세뇌교육)의 한계가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세상이 지성과 이성으로 피땀 올려 쌓아 왔던 현대주의를 해체시키려는 후현대주의로 들어서면서 세계화(globalization)에 따른 다문화의 영향, 오관(五管)을 자극하는 다매체(multimedia) 내지는 전산기나 인터넷을 통한 기계적(mechanical) 학습에다가 인공 지능(A.I.)과 가상 현실(V.R.)을 추구하는 조타주의(Cyberism) 등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배움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학습 이론도 더욱더 복잡해질 모양이나 저자 같은 꼰대가 나설 처지가 아닌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