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원(문리대61)
2001년 5월 8일, 나는 이 날 아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일찌감치 출근한 나는 괜히 커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갔다 왔다 하면서 마음을 진정한 다음 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을 열고는 뉴욕 변호사 시험 결과를 클릭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전날 밤 12시에 컴퓨터 상에 뜨게 되어 있었으나 괜히 태연을 가장 하느라고 일찍 자고 회사 출근 때까지 확인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알파벳 순으로 나오는 합격자 명단은 내 이름자가 나오는 Y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Y 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마냥 콩닥거렸다. 여태까지 참고 태연을 가장하고 마음을 진정했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Yeon Bong Won 이란 내 이름이 화면에 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나왔다. 눈을 들어 다시 봤지만 눈가에 서린 물기로 화면이 뿌옇기만 하였다. 눈을 씻고 내 이름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안 지난 2년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나는 1964년 1월에 브라질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4.19 그리고 5.16을 겪은 우리 세대에게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시골에서 논 팔고 소 팔아서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냈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들었던 때. 오죽하면 당시의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상아탑(象牙塔)이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 짓는데 꼭 필요한 소를 팔아서 그 뼈로 세운 우골탑(牛骨塔)이란 자조 섞인 말까지 나왔겠는가? 고등 실업자를 양산한 사회에서 오갈 데 없는 청년들은 하루 종일 다방에 모여 앉아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담배나 피워대며 빽 없는 타령만하고 정부와 사회에 대한 적개심만 키워 가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우리 역사를 상고해보면 고려 시대까지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던 사회가 조선(朝鮮)에 들어 와서는 나라를 꼭꼭 잠그고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 경우에는 극형을 처하는 쇄국(鎖國) 일변도로 500년을 다스려 왔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비 애국자 취급을 하면서 심지어 4-5년 걸리는 유학생에게도 가족은 본국에 떼어 놓고 당사자만 유학을 보내는 정책을 취했다. 대학생이던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서는 우리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하던지 여기서 탈출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날 외국여행이 자유화되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국교가 맺어져 있어 뜻만 있으면 어디든지 여행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1960년 대의 우리 나라 실정이었다. 당시에 만일 누군가가 우리 나라가 미국에 승용차를 수출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4.19 세대인 나는 4.19 혁명 후 사회 분위기가 일시에 변하고 의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느꼈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더니 마구 잡이로 학생들을 구속하고 어제까지도 존경의 대상이던 고명한 교수가 정부의 어용(御用) 교수로 돌변하는 세상에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다.
내가 결정적으로 외국 이민을 결심한 계기는 영화관의 조조(早朝) 할인제였다. 할 일 없는 청년으로 득시글거리는 데 착안한 극장이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반값으로 할인 한다고 선전하자 극장은 대학생으로 초 만원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계 어디에 아침 8시부터 영화관이 대학생으로 초 만원을 이루는 나라가 있겠는가?
5.16후 박정희 대통령은 과밀 인구와 실업자 해결 그리고 현 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제거 하는 방책으로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했고, 마침 브라질에서 농업 이민을 받겠다고 해서 이민 문호가 열렸다. 난 남미고 아프리카고 간에 어디든지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어렵게 노력해서 1964년 1월 18일 브라질로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말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더군다나 동포도 거의 없는 브라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젊음과 의지 그리고 성실성 하나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공부를 계속할 마음이 생겼다. 나의 친구들은 브라질 말인 폴투갈어를 배울 용기가 없어서 대학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지만 나는 독하게 결심하고 한 1년 준비한 후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브라질 법과 대학은 5년 과정이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5년 후에 졸업을 하고 변호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변호사 자격증을 받아 쥐고 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더군다나 부모님과 가족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내 책임을 통감하였다. 변호사 라이선스를 받자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한인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업무가 폭주하였다. 이것도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어느덧 지천명(智天命 )의 나이인 50을 넘기고 나니 언제나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미국은 법과 대학이 아니라 법과 대학원 제도로서 그것도 3년이나 공부해야 한다. 내 나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3년간 공부만 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외국에서 법과 대학을 나온 사람은 1년에 마치는 코스가 있어서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결심했다. 여러 대학과 연락한 결과 보스턴 법과 대학원(Boston University Law School)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입학 허가를 받고도 난 근 일년을 망설였다. 35년간 살던 브라질 땅을 하루 아침에 정리하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생소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8년 8월, 50이 넘은 나이에 20-30대 학생들과 입학식을 치르고 나니 만감(萬感)이 교차하였다. 내가 학생 중에는 나이가 가장 많았고 대부분의 교수들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미국 법과 대학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까짓 남이 하는 것 나라고 못하겠나 하는 만용(蠻勇)에 가까운 심정으로 부닥쳐 보았으나 강의를 쫓아가는 것도 허덕거릴 지경이었다. 일생을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 살다가 갑자기 미국에 와서 이곳에서 성장하고 초, 중, 고등 학교에 대학 4년까지 마친 우수한 학생들과 영어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무모하게 생각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몇몇 교수는 심한 보스턴 사투리를 기관총처럼 내 뿜으며 강의 하는데 받아 쓰는 것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미국 법과 대학원 (Law School) 강의는 약 100 년 전 하버드 법과 대학장이 시작하였다는 일명 <소크라테스 식 강의법>을 사용한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2,500년전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문답식 강의다. 아무 학생이나 예고 없이 불러서 질문을 하면 학생은 즉시 답을 해야 한다.
그리스의 원형 극장처럼 생긴 강의실에 학생 좌석이 정해지므로 강의 하는 교수는 어느 자리에 앉은 학생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어 있다. 한국처럼 대리 출석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강의 도중에 교수는 쉴새 없이 이름을 불러서는 질문을 하고 그 학생의 대답이 시원치 않을 때는 다음 학생을 지적 하고 하는 식이다. 준비를 어설프게 하고 수업에 들어 갔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나오게 된다. 강의 시간에 한번 망신을 당한 것을 잊어 버리려면 적어도 3개월은 걸린다고 학생들이 이야기한다.
나이 들어 외국에 와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도와준 것은 우리 유학생들이었다. 나이 많아서 공부하겠다고 온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강의 내용이라던가 각 교수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 채 받아 쓰지 못한 과목의 요점을 정리한 노트를 빌려 주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고 또 한번 진한 동포애를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가다가 점심이나 저녁을 사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 법과 대학원생들의 열심히 공부하는 태도에 놀랬다. 밤 11시 30분까지 도서관은 학생들로 꽉 차 있다. 시험 때는 24시간 도서실을 개방하는데 새벽 2, 3시에도 만원인 것을 보고 미국 학생들은 놀기도 열심이지만 공부도 죽기 살기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녀본 한국, 브라질, 미국 대학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대학생이 제일 공부 안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만학(晩學)이기도 하지만 젊은 학생들을 따라 가려고 아침 6시부터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도 없이 지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강의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혹자는 나보고 변호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법학 공부 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브라질은 대륙법(大陸法 Civil Law) 계통이지만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미국을 위시하여 영미 법(英美法 Common Law) 계통이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차라리 브라질 법과 한국 법에 공통점이 더 많다. 미국 법과 대학원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셈이었다.
이렇게 보스턴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서는 다행히 졸업을 하게 되고 학위도 받았다. 졸업을 할 때쯤 뉴욕 변호사 응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내 운명을 걸어볼 욕심이 생겼다.
졸업 후 일단 뉴욕으로 주소를 옮겼다.
뉴욕 변호사 시험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처음에는 변호사 윤리 규정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 경우 학교 강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변호사 시험 준비 코스 같은 학원이 있다. 뉴욕에 와서 시험 준비를 하면서 무사히 일차 관문을 통과 하였다. 그 다음에는 본 시험이 있는데 매년 7월과 2월 일 년에 두 번 실시한다. 사람들이 뉴욕 시험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시험 과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 (州) 변호사 시험 과목이 8가지 이내인 것에 비해 뉴욕은 무려 23 가지나 된다.
뉴욕은 이틀간 시험을 본다. 첫날은 뉴욕 법, 주관식 필기 시험이다. 오전에 3 문제 오후에 3 문제 총 여섯 문제만으로 23 과목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문제에 여러 과목에 대한 문제가 겹쳐서 출제된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주관식 필기 시험을 보는 동안 뉴욕 법에 대해 오전 오후 25문제씩 총 50 문제를 객관식으로도 시험 본다. 필기 시험 문제는 어떤 주제를 설정해 놓고 논하라 하는 논술식인데 매 문제에 약 6-7개의 이슈(issue)를 뽑아서 논해야 한다. 한 문제를 읽고 약 7-10 페이지에 해당하는 답을 쓰는데 주어진 시간은 50분.
나는 본래 악필(惡筆) 이기 때문에 필기 시험에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잘 썼더라도 채점관이 못 알아보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모든 글을 필기체가 아니라 인쇄체로 썼다. 인쇄체로 쓰면 속도가 떨어져서 분, 초를 다투는 시험에는 불리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최대의 속도를 내서 인쇄체 쓰는 연습을 했다. 시험관이 보기 편리하게 한 칸씩 띄어쓰기 (double space) 를 하는 것도 연습해 뒀다.
필기 도구에도 신경을 써서 여러 개의 연필과 펜을 준비 했는데 볼펜처럼 생겼으나 쓸 때는 만년필처럼 잉크가 술술 나오는 일제 볼펜을 준비했다. 지우개도 제일 성능이 좋은 것으로 준비해 놓았다.
다음날은 미국 거의 모든 주가 같은 시간에 보는 객관식 시험.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 3시간 동안에 100 문제, 오후에도 3시간 동안 100 문제의 정답을 맞혀야 한다. 한 문제에 1분 45초 밖에 시간이 없다. 그래야 겨우 다시 한번 살펴 볼 시간이 된다. 헌법 같은 경우에는 문제의 지문이 반 페이지 이상 된다. 한 번 읽고 답을 알아 내야지 두 번 읽을 시간이 없다. 객관식으로 4개 항목 중에서 맞는 답을 고르는 것인데 그 답이 그 답 같고 그 중 두 개는 아주 비슷하고 정답도 그 말이 그 말 같은 알쏭달쏭 한 것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if….. only if…, unless.. 가 겹치기로 나오면 그것인지 아닌지 확실한 의미를 모를 경우도 있다.
한 수 더 떠서 4가지가 전부 정답이지만 그 중 가장 좋은 답을 고르라던가 4가지가 다 틀린 답인데 가장 틀린 답을 고르라고 할 경우 법률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영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미국에서 자라지 않은 외국인들이 알아 맞힌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일 수 밖에 없다.
하루에 10 시간 이상씩 매일 공부하고 2000년 7월에 시험을 치려고 뉴욕주 수도인 올바니(Albany)로 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데서나 잘 자는 편인데도 호텔 옆 방의 젊은 애들이 밤새도록 부스럭거리는데다가 긴장이 됐는지 밤을 하얗게 새웠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마셔대고 보니 그 날 밤 또 한잠도 못 잤다. 이렇게 사흘씩이나 밤을 새우고 시험장에 들어 가니 몽롱 한 것이 내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악 물고 시험을 다 보고는 어쩌면 합격 할는지도 모른다는 일루의 희망을 안고 뉴욕으로 돌아 왔다.
시험 발표는 11월 말 경, 발표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서 맨허턴 소재 은행에 취직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뉴요커들 틈에 끼어 출퇴근 하며 일하는 재미도 괜찮았다.
드디어 운명의 11월, 그 날이 왔다. 밤 12시 1분에 인터넷으로 발표되는 합격자 명단에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내 이름은 고사하고 비슷한 이름도 없었다. 실망! 대 실망! 내 일생에 불합격이라는 최초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브라질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가족, 언제나 나를 위하여 기도의 생활을 하시는 노부모님, 그리고 장도를 축하 하면서 환송 해준 친구들 생각을 하니 도저히 맨 손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좌절 할 수는 없다. 칠전팔기(七轉八起) 라는 옛 말도 있지 않은가. 마음을 다시 고쳐 먹고 다음 2 월에 있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풀 타임(full time) 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을 조정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하루 24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에 승패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국 변호사 시험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교만 하지는 않았는지……. 여러 번 반성도 했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미국으로 떠나오던 초심(初心)으로 돌아갔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맨 처음 한 것은 티비 없애기. 그리고 골프 채도 가방과 함께 아는 사람에게 줘버렸다. 신문도 눈 앞에서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고 한국, 브라질에서 오는 각종 간행물을 봉투도 열지 않은 채 큰 여행 가방 속에다 자물쇠로 잠가 버리고 시험 끊난후 보기로했다. 두꺼운 시험 준비용 교재를 찢어서 항목 별로 여러 권의 얇은 책으로 만들어서는 손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앉으나 서나, 지하철, 버스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읽었다. 출장 중인 비행기 속에서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호텔 방에 파묻혀서 읽고 또 읽었다. 나에겐 토요일도 일요일도 휴일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없이 지나갔다. 시험 때가 가까워 오자 직장에 일주일간 휴가를 냈다.
드디어 2001년 2월 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뉴욕 시내에서 시험을 봤는데, 변호사 협회가 장소를 못 구했는지 88번 부둣가 세관 창고가 시험장이었다. 책상 밑으로 불어대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발을 저리게 하였다. 저번 시험 실패 이유가 시간(time management)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어려운 문제에 집착하다가 마침내는 시간에 쫓겨서 나머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어서 이번에는 문제 당 시간 배분을 정확히 하고 정해진 시간이 넘으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식으로 해서 모든 문제를 다 답할 수 있었다. 수 백 명의 수험생들을 둘러 보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보였고 가물에 콩나기 식으로 30, 40대도 가끔 있었다.
나는 시험 기간 중 건강에 이상 없이 끝까지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특히 우리 노 부모님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무리 일생을 건 시험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당장 달려가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3시간 시험 친 후에 한 시간 동안 점심 시간이 있다. 지난 7월 시험 때는 점심시간에 밥맛이 없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냥 늘어져 있던 것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점심으로 훈제(燻製) 연어를 은박지에 싸가지고 가서 먹었더니 기운이 났다. 또 먼저 번에는 밤을 꼬박 새워서 시험 치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었기에 아예 수면제를 먹고 일찌감치 푹 잤더니 다음 날 기분도 상쾌하고 컨디션이 만점이었다.
첫날 오후 시험이 시작되어 약 한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내 앞에서 시험 보던 25세 가량의 미국 아가씨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간질 비슷한 발작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급히 응급 요원들이 와서 싣고 나갔지만 분위기가 한동안 어수선해 졌다. 아마 시험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그리 된 것 같았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실려 나가는 것을 보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나한테도 심장 발작이 나면 어떡하지?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끝까지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기분이 차분한 것이 먼저 시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2월에 친 시험 결과는 5월에 발표된다. 그 5월이 영겁(永劫)의 세월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시험 발표 때까지는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코메디를 봐도 하나 우습지 않았다. 늘 목에 가시가 걸려 있는 기분으로 지냈다. 5월이 가까워질수록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드디어 5월 8일 0시 1분에 합격자 발표가 인터넷 상에 뜬다는 소식을 받았다. 5월 7 일 밤, 내 앞날을 갈라 놓을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고 느꼈다. 나는 마음을 크게 먹었다. 밤 12시까지 목을 빼고 기다릴 것이 아니다. 내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여 천천히 보리라 마음 먹고 일찍 자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했으나 컴퓨터를 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고 마음에도 없는 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이런저런 서류도 들췄지만 무엇을 봤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심 호흡을 한 다음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 합격자 명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 이름을 찾아 냈다. “주님, 감사 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오며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누구한테라는 생각도 없이 손 가는 대로 다이알을 눌렀더니 아내가 나왔다. 이 순간을 위해 수 많은 말을 준비 하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여보,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하는 한마디 말 밖에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