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에서 네 강이 흘러나갔다고 하는데, 피숀과 기혼이라는 강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은 지난 몇천 년 동안 흐름이 조금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대체로 그 자리에 흐르고 있다. 에덴 동산은 이 두 강의 상류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메르인은 중국인과 인도인을 앞서,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일으킨 족속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5천 년경에, 유 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였다. 세상에서 첫 도시 에리두에서 우바이드 문화가 일 어났고, 수메르인은 키쉬, 라가쉬, 우륵, 우르 등지에서 도시 국가를 세웠다. 수메르인은 노아 홍수로 이름난 아라랏산 지역에서 살다가 농부가 되려고 두 강 사이의 지역으로 옮아갔다는 설이 있다.
1.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전통
우바이드(Ubaid) 문화의 도자기를 보면 돌림판을 쓴 흔적이 보이는데, 이미 기원전 5000년경에 수메르인이 바퀴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원 전 2100년경에 쐐기 문자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홍수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은 구약의 홍수 이야기보다 적어도 1천년을 앞선다. 또한 길가메시는 생명나무가 있는, 딜문의 바다에서 생명 식물을 얻는다. 이 식물을 먹으면 젊음 을 되찾는다고 하는데, 뱀이 이것을 훔쳐가서 길가메시는 불사의 희망을 잃고 슬피 운다. 이 이야기도 창세기에 아담이 생명 과일을 못 먹게 되어 죽는다는 이야기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인은 모세의 시대에도 글자가 없었고,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알파벳을 빌려 쓰고, 3세기에나 아람어 알파벳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후일에 아카드(Akkad) 제국의 사르곤 왕(Sargon the Great, 기원전 2334-2279 년)이 수메르를 점령하였고, 다시 기원 전 1894-1595년에 아모리 족속이 일어나 바빌론 제국을 세웠다. 수메르를 점령했어도, 바빌로니아인은 우수한 수메르인의 문화를 존중했고, 쐐기문자와 생명나무 전통을 이어받았다. 길가메시서 사시(Epic of Gilgamesh)는 셈족의 아카드 언어로 쓴 이야기이지만 쐐기 문자로 기록되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어, 바빌론에서 왕궁을 확대하고 이쉬타(Ishtar) 대문을 지었는데, 이것은 5층 건물의 높이다. 색칠한 타일로 지어진 이 대문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데, 대문에는 생명나무 네 그루가 그려져 있다. 생명나무는 큰키나무가 아니라, 일 종의 관목이고, 꽃이 많이 핀다. 생명나 무의 가운데 꽃술은 노란 색이고 꽃잎은 흰색이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던 히브리인은 기원전 1050년경에 나라를 세웠으나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가 분단되었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씨리아에 점령당하여 망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나라를 잃었다. 느부갓네살이 점령했을 때, 유다의 인구는 7만5천에 달했고, 약 2만 명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데려갔다.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의 키루스(Cyrus) 대제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나서 이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거의 50여년 동안 바빌로니아에서 포 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인에게서 생명나무 이야기를 얻어 들었고, 상당히 와전된 형태로 생명나무 이야기를 창세기에 올려놓았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은 이들로부터 풍문만 들었고, 실물도 그림도, 浮彫로도 생명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 직물이 발명되지 않아서, 당시에 수메르인은 아담과 이브처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걸쳤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생명나무 이야기는 뒤이은 셈 족속, 바빌로니아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인은 글자뿐 아니라, 수메르인의 문화와 교육제도를 통째로 삼켰고 이쉬타 대문에 타일로 생명나무를 크게 새겼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 문화를 존중하여, 진흙 서판에 수메르-아카드어 사전까지 만들었다. 님롯(Nimrod)에 있는 북서 궁전(기원전 865년경)의 벽은 설화석고 부조(浮彫)로, 수십 장면에 생명나무와 날개 달린 압칼 루(Apkallu, 생명나무를 지키는 보호 영) 가 새겨져 있다 (출처: 대영박물관). 이 부조들은 높이가 2미터나 된다.
윗 사진에는 생명나무 양쪽에, 날개 달린 수호 영들이 이파리에 붙은 이슬을 가죽 주머니에 담고 있고 (물이 많이 담긴 자루는 아래가 불룩하다), 다른 벽에는 그렇게 모인 이슬을 淨化 의식 중에, 솔방울로 임금의 뒷머리를 적시는 장면이 새 겨져 있다. 생명나무는 일종의 떨기나무이다. 가지의 사방에서 잎파리가 생기고 꽃은 기본 줄기의 맨 밑에, 중간에, 그리고 꼭대기의 큰 잎파리 밑에 솟아난 것이 보인다. 또한 생명나무 꽃봉오리가 있는 가지와 만발한 가지들을 따다가 성전 예식에 쓰는 장면이 다른 벽에 새겨져 있다. 직접 보지는 못하고 수메르인에게서 말만 들었어도 이 아씨리아인들은 생명나무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상당히 애를 쓴 것이 눈에 보인다. 본 적이 없어 생명나무의 열매는 그리거나 새기지는 않았다. 떨기나무이니까 꽃에서 조그만 베리같은 열매가 많이 열렸을 터이고, 아담과 이브는 이 열매와 이파리를 먹었을 것이다. 왕궁의 벽에 이러한 부조를 새긴 의도는 수호영이 생명나무 이파리에 묻은 이슬로 하늘이 선택한 임금을 정화시키고 인정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예식을 묘사하려고 한 듯하다. 이처럼 수메르 지역에 굴러들어온 셈 족속은 생명나무 전통을 소중히 여겼다.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셈족 이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이들에게 밀려서 고향을 떠난 수메르인 의 일부는 유럽ㆍ크레테ㆍ에집트로, 일 부는 아라랏 산과 중앙 아시아로 흩어 졌고, 소수파는 한반도까지 왔을 가능성도 있다.
2. 왜 환웅의 아들을 단군이라 지었는가?
수메르인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농업을 시작하고 맥주와 쐐기문자를 발명하였다. 돌이 귀하여 돌로 지은 건물은 없고, 겨우 진흙으로 빚고 햇빛으로 말린 벽돌로 도시를 건설하고 지꾸랏을 지었다. 지꾸랏(ziggurat)은 3단계의 피라미드로 되어 있고 내부는 진흙 벽돌로, 겉은 구운 타일(평평한 기와)로 치장하였다. 기초는 가로 64미터, 세로 46미터가 되며, 높이는 30미터 정도였을 것이라 한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3층에 성전이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질 경우에 사제들이 맨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직각으로 만나는 두 계단을 거쳐 첫째 플랫폼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사제들은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통제하였다. 세월이 지나자 진흙 벽돌은 비에 씻겨 허물어졌고, 따라서 오래된 지꾸랏 꼭대기에 있던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단군이라는 말은 신단을 쌓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환웅 부족이 곰 부족을 동원하여 규모가 작은 지꾸랏을 이렇게 세웠다면, 그를 당연히 단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 상징으로 세워 놓은 신성한 생명나무를 신단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환웅이 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을 가져왔고, 이것들을 신물로 취급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곰 부족이 아직 신석기 시대의 부족이었고, 청동 기물을 신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왔으니, 환웅은 하늘에서 온 사람처럼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이다. 환웅이 수메르에서 왔다면, 단군은 아버지의 부탁대로 고향의 지꾸랏과 같은 신단을 쌓았고, 그 때문에 환웅은 아들의 이름을 단군이라고 지었을 듯 하다. 그러면 신단 또는 天檀은 무엇 때문에 쌓는가? 한국인이 하늘님을 믿었듯이, 중국인은 상제(上帝)를 믿었다. 공자가 쓴 서경(書 經)의 요전(堯典)에는 순(舜)임금(기원전 2230년 경)이 上帝에게 제사를 드렸다 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서민호 교수) 물론 우리는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 불렀고, 한자가 들어온 뒤에 그를 상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였다. 오소운 목사에 따르면 상제 개념은 중국인이 한국인에게서 배운 것이라 한다. 옛날의 고조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 서, 구경하는 중국인에게 삼신일체 이론을 자상하게 설명했을 리는 없다. 중국인은 한국인이 상제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보고 흉내내기만 했고, 하늘을 우러러 중얼중얼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늘님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배웠으나, 삼신일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중국인 사이에는 삼신일체 개념이 문서 에 기록되지 않았다. 중국인이 섬긴 상제는 그저 하늘에 계신 상제요, 고조선의 상제는 삼신일체 상제 였다. 오소운 목사의 말씀대로,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로부터 옛 중국인이 상제 사상을 배웠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 면 우리의 선조는 이 개념을 독자적으로 발명했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빌려왔는가?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기원전 2700 년부터 수메르 사람들은 三神一體 또는 삼위일체를 믿었다. 아누(Anu)는 하늘의 첫째 신, 아버지요, 신들 중에 제일 높은 이다. 아누는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엔릴 (Enlil), 곧 공기와 땅의 신, 창조하는 신이고, 엔키(Enki, 또는 Ea)는 물의 신, 지혜의 신이다. 이것은 天神ㆍ地神ㆍ人神이 하나가 된다는, 고조선의 삼신일체 개념과 대체로 비슷하다. 중국인에게 삼신일체 사상이 없다는 것은 중국인과 수메르인 사이에 (종교적) 접촉이 없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한국인이 삼신일체 상제를 믿었다는 것은 고조선 이전의 한국인(곰 부족)이 수메르 인과 접촉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열리기 이전의 한국인은 수메르인으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배워서 상제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오소운 목사에 따르면 "태조 3년 (1394 년)에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과 기우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고 하여 임금이 그대로 천제를 지냈으나, 중국의 압력으로 결국은 1464년에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조선 땅에서 천단의 제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명나라 시대에 북경에 지은 천단의 크기는 자금성의 네 배나 된다.
3. 단군신화와 에덴 동산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생명나무 이야기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와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이것은 환웅 부족이 곰 부족과 관련을 가진 것은 사르곤 대제가 수메르를 통일했을 때나 그 직후가 아니라 훨씬 후였음을 암시한 다. 오히려 신단수와 신시(神市)의 이야기는 에덴 동산과 아담이 거기서 쫓겨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느님의 아들은 여럿이 있었고, 그 중에 서자 환웅은 처음에 신단수가 있는 신시로 갔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기도했다는 말은 신시가 수메르와 한반도 사이에 어딘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에덴 동산 이야기의 비슷한 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환웅은 하나님의 서자이다.
아담의 무대는 에덴 동산이었고, 환웅의 무대는 神市였다.
에덴 바깥에는 가인이 생명의 위협 을 느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 고, 환웅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니 사 람이 이미 많이 살고 있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뒤에,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제단을 쌓았으며, 환웅의 아들 단군도 신단을 쌓았고 거기에는 신단수가 있었다.
(창세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고, 하늘에서 온 환웅은 웅녀를 아내로 삼았다.
아담은 생명나무만 있으면 영생할 수 있었고,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항상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 단군신화는 신단수가 생명을 주는 나무인 것을 강조한다.
에덴 동산 바깥에는 생명나무가 없으므로 아담은 결국 죽어버린다. 신단수가 있는 곳으로 환웅이 내려가서 신시를 세웠다는 것은 신단수가 영생에 필요한 것을 암시한다. 환웅은 천부인 세 개를 가져왔지만, 불멸하지 않고 (기록에는 없지만) 결국 죽었다. 단군이 신단을 쌓았다면,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와 단군의 신단수 이야기를 독립된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쳤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수메르 문명이 최초의 문명이었으니까, 수메르인이 단군신화를 베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빌로니아의 생명나무와 에덴 동산 이야기가 한반도까지 전해졌지만 글자가 없었던 시절에 곡해된 형태로 우리에게 단군 신화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우수한 청동기 문물을 가지고 왔다면, 신단수는 생명나무였을지 모른다. 신단수라는 나무 앞에서 웅녀가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고, 단군은 자라서 신단을 세웠기 때문에 그 아들을 단군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는 곰을 숭상하던 부족들의 곰 토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랄 산 지역과 내몽고(홍산 문화)에는 곰을 숭상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곰 토템 부족이 살던 곳이 우랄 산이나 내몽고 지역일 가능 성이 높다. 이것은 환웅 부족이 아마도 옛 고향 아라랏 산을 지나서, 우랄 산 지역이나 내몽고의 홍산 지역에서 곰을 숭상하던 부족과 서로 결혼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중에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