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웅 (의대 55)
내가 코렐리를 처음 본 것이 1967년 4월 그가 메트(Metropolitan Opera)의 순회공연차 보스턴에 왔을 때였다. 그는 훤출한 키에 이목이 정연한 대단히 날씬한 미남형 중년신사였다. 그가 마스네의 ‘베르테르’에 출연하러 온 것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요란한 박수가 장내를 진동하였다. 그 날씬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몸에서 나오는 음성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음성을 드라마틱 스핀토로 통상 분류하는데 대단히 웅장하고 남성다운 매력적인 목소리이다. 그는 부단한 노력과 연마로 자기 스스로 새로운 발성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처절하게 이룩한 그의 창법을 판정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상충하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출중한 테너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많은 팬들이 그를 ‘테너의 왕자’(Prince of Tenors)라고 부른다.
물론 그는 그의 배우같은 미끈한 풍채의 덕분도 있지만 그의 남성적인 역강한 음성때문에 20세기 테너로서의 으뜸자리에 오르게 된다. 우선 그가 무대에 서면 6척 넘는 키에 그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장내를 완전히 제압해 버린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찬란히 진동하면서 ‘높임 C’까지 유연히 올라가며 언제든지 그는 벨벹같은 서정적인 부드러운 음성을 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창법을 일반적으로 벤야미노 질리(Beniamino Gigli)에 비유하지만 어떤 사람은 쟈코모 라우리-볼피(Giacomo Lauri-Volpi)의 전통적인 벨 칸토(bel canto) 창법에 비유하기도 한다.
출생과 성장
여기에서 그의 인생역정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는 동북부 이탈리아 항구도시 안코나(Ancona)에서 1921년 4월에 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그의 집안에 음악적인 재질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 아우구스토(Augusto Corelli)는 35세때 오페라 테너로 입신하였고, 그의 친형 알도(Aldo)는 학교를 중퇴하고 바리톤으로 전향하였고, 그의 삼촌 두사람이 안코나의 극장 코러스 대원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부친은 해군조선기술자였지만 그의 부모는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 프랑코는 바다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친의 생업을 이어 조선기사가 되려고 볼로냐대학 해양공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 친구와 어울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하루 그는 친구를 따라 피렌제로 가서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하였다. 그때 판정관의 한 사람이 었던 작곡가 피체티(Pizzetti)가 성악공부할 것을 그에게 권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장 페사로음악원에 입적하여 오페라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파보니(Rita Pavoni)에게 사사하였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코렐리는 고음정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후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의 스승 멜로키(Arturo Melocchi)의 제자 Scaravelli를 통하여 어깨 넘어로 배운 발성법을 자기에게 맞도록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델 모나코의 발성법을 열심히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독작적인 발성법을 개발
훗날 코렐리는 제롬 하인즈(Jerome Hines)에게 자기의 발성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였다. “멜로키는 이탈이아에 있어서는 제일가는 (발성법)기술자로 알려졌다. 나의 친구 Scaravelli가 그에게서 렛슨을 받고 와서 나에게 그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어서 나는 그의 발성법을 그대로 배웠다. 그리고 나 자신은 두번 멜로키의 렛슨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발성법은 한음정 한음정을 성대를 통하여 방사(放射)하는 형식인데 이는 대단히 간단한 방법으로 인두를 낮추어 인후를 최대한으로 넓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인두를 너무 낮추어서 음성의 정교함에 지장이 생기는 것에 착안하여 인두를 부동(浮動)시키는 변법을 고안하였다. 그러는 한편, 코렐리는 카루소, 라우리-볼피, 페르틸레(Aureliano Pertile) 및 질리의 음반을 들으면서 발성법을 연구하였다.
‘로마오페라극장’에 발탁
1951년 여름 로마오페라좌의 지휘자가 ‘스폴레토 극장의 경연대회’에 참가하기를 종용하였다. 코렐리는 오페라 ‘카르멘’의 돈호제역으로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그 결과로 1951년 11월에 그는 ‘트로바토레’의 만리코(Manrico)로 로마오페라좌에 데뷰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이탈리아 전국의 작은 오페라극장에 출연하고 또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다. 1953년 그는 로마오페라좌의 중견 테너로 입적되어 1958년까지 있으면서 벨리니의 ‘노르마’(Norma)에 칼라스(Maria Callas)의 상대역 폴리오네로 등단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상견이었다. 칼라스는 당장 그의 저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후 칼라스가 은퇴할 때까지 여러번 상대역으로 출연하였다. 1956년에 ‘페도라’(Fedora), 1958년에 ‘해적’(Il Pirata), 1960년에는 ‘폴루이토’(Poluito) 등에서 함께 출연하였다. 그러나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좌에서 이탈리아 대통령과 고관대작들이 참석한opening night에 유명한 ‘칼라스의 무단퇴장’ 으로 오페라가 첫막으로 끝난 운명의 밤에 가엽게 외톨이가된 폴리오네이기도 하였다. 사실 칼라스는 그전부터 몸이 불편하여 대역을 부탁했었는데 주최측이 끝내 거절하였었다고 주장하였고, 후에 법정에서 승소하였다.
로마 오페라좌에 몸담고 있는 동안 코렐리는 국내외의 여러 오페라 하우스에 여러번 출연하였다. 1954년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스폰티니의 ‘베스탈레’(La Vestale)의 리치니오(Licinio)역을 칼라스(쥴리아역)를 상대로 출연하였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훗날 칼라스는 코렐리가 아주 친절하였다고 칭찬하고는 그가 너무 잘 생겨서 질투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로레타 디레리아와 화촉
1957년 그는 소프라노 로레타(Loretta Di Lelia)와 교제한 끝에 결혼하였다. 결혼후 그녀는 전적으로 그를 뒷받침하였다. 결혼하기전 로마에서 공연을 마친 후 그녀가 한번 무대뒤에 서명받으러 온 것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1958년 그는 나폴리의 산 칼로 극장에서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의 돈 알봐로 (Don Alvaro)로 출연하여 레오노라로 출연한 테발디(Renata Tebaldi)의 상대가 되었고, 1959년에는 ‘아드리아나 르크브러’(Adriana Lecouvreur)에서 마그다 올리베로(Magda Olivero)를 상대하여 마우리지오(Maurizio)로 출연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그는 총체적으로 30개의 역을 연출하였는데 여기에는 남들이 전혀 출연하지 않은 오페라도 섞여있다. 예를 들면 스폰티니(Spontini)의 Agnese di Holenstauffen, 헨델(Handel)의Giulio Cesare와 Hercules, 프로코피프(Prokofiev)의전쟁과 평화 및 계리니(Guidi Guerrini)의 Enea 등이다.
연기실력도 대단해
코렐리는 음성뿐 아니라 연기실력도 영화배우들을 능가한다. 그의 연기를 영상으로 보는 것이 한층 더 실감나기도 하다. 여기에 오페라의 진미가 있는듯 하다. 지금 시중에 나온 DVD를 한번 점검해 본다.
1954년 9월26일에 제작한 I Pagliacci에 Mafalda Micheluzzi(Nedda), Tito Gobbi(Tonio) 등과 Canio로 나온 코렐리의 연기는 정말 걸작중의 걸작이다. 즉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진가를 보여준다.
1955년에9월 24일 밀라노에서 제작한 Tosca에 Renata Capnist(Tosca), Carlo Tagliabue(Scarpia), Antonio Sacchetti(Angelotti) 등과 함께 Mario Cavaradossi로 출연한 콜렐리의 연기는 가관이다. 특히 그의 ‘별은 빛나고’(E lucevan le stele)는 명창중의 명창이다.
1956년 6월 13일에 제작된 Carmen에서 Belen Amparán(Carmen), Anselmo Colzani(Escamilo), Elda Ribetti(Micaela) 등과 함께 돈호제로 등장한 코렐리의 열창과 열연은 모든 영화배우들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시 음악이 감정의 표출을 상승시킴을 볼 수 있다. 실로 오페라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장면들이다.
1958년 12월 23일에 방영된 Turandot에 Lucille Udovich(주제역), Renata Mattioli(Liu) 등과 함께 Calaf로 분장한 콜렐리의 열창과 열연은 대단히 특출하다. 특히 그의 아리아 ‘아무도 자지못해’(Nessun dorma)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특히 1973년에 제작된 Andrea Chenier에 Colestina Casapietra (Maddalena), Renato Cappuccilli (Gerard)와 함께 주제역으로 나온 코렐리의 비통한 열정의 발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인다운 기질을 부각시키고 있다.
항상 준비성이 대단해
그는 어느 출연을 위하여서도 부단한 노력으로 늘 준비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준비를 오래 시키는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와 같은 훌륭한 무대감독을 존경하였다. 같은 이유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매우 선호하고 존경하였다. 프랑코는 오페라 하나하나를 오래 예행연습할수록 명품이 나올 수 있다고 늘 강조하였다.
과연 코렐리는 그의 독특한 발성이 독자적인 구절법(Phrasing)과 맞물려 그의 웅장한 남성적인 음성이 찬란히 요동하면서 고음에 까지 여유있게 올라가는 묘기를 창출하여 많은 팬들을 현혹시켜 왔다. 동시에 그는 이 독창적 묘기가 언제 사라질까 매우 걱정하며 신경쓰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목소리가 아직 있는지부터 점검하곤 하였다. 사실, 우리 동문으로 세계적인 오페라가수로 일약 부상하여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누비고 다니는 이용훈 테너도 한때 목소리를 잃은 후부터 이런 집념에 사로잡히고 있다고 한다. 이용훈 동문의 발성법이 코렐리와 비슷하게 느껴지며, 그 역시 풍부한 성량의 드라마틱 테너로 지금 현재로 세계적인 정상에 올르고 있다고 필자는 보고있다.
1961년부터 ‘메트’에 등단
콜렐리의 뉴욕 메트로폴리탄좌의 데뷰는 1961년 1월에 베르디의 ‘트로바토레’의 만리코(Manrico)로 같이 데뷰로 등장한 프라이스(Leontyne Price)의 상대로 이루어 졌다. 그해 뉴욕에서의 정기공연이 끝나고 보스톤에서의 첫 순회공연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푸치니의 Turandot의 칼라프역으로 주제역 닐쓴(Birgit Nilsson)의 상대로 출연했을때 닐쓴이 높임 C를 좀 길게 뽑아 조금 빨리 끝낸 코렐리가 퍽 무안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제3막에 가서 콜렐리는 그녀의 뺨에 키스하는 척하고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화가 난 닐쓴은 다음 공연지인 클리브란드에 안가겠다고 루돌프 빙(Rudolf Bing)에게 우겨댔다.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는데도 코렐리는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다. 사실 메트 지배인이었던 빙이 투덜거리던 코렐리를 무마하기 위하여 시킨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또 한번은 나폴리에서 ‘트로바토레’ 를 공연할때 3층의 특실에서 관람하던 한 학생이 그에게 야유하고 있었다. 콜렐리는 만리코의 의상을 입은 채 무대뒤로 3층에 올라가서 잠긴 문을 어깨로 밀어제치고 차고간 칼로 그를 위협하였다. 이때 두 안내원이 그를 저지하였다.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20분동안 목소리를 잃었다. 다행이도 제시간에 무대로 돌아와서 복수를 부르짓는 “Di quella pira” (불타는 화형대를 보라)를 목청높이 불르면서 분푸리하였다.
그해 말 그는 이탈리아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베르디의 La Battaglia di Legnao를 스텔라(Antonietta Stella)의 상대로 불러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마스카니의 ‘시골기사’(Cavalleria Rusticana)의 주제역을 투치(Gabriella Tucci), 지아요티(Bonaldo Giaiotti)와 함께 연출하였다.
심한 무대공포증에 시달려
코렐리는 성미도 급하고 날카롭지만 심한 무대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공연전에 생마늘이 섞인 스테익을 먹는 습성이 있고 어떤때는 상대역이 노래하는 동안 무대옆에 살짝나와서 목을 추기곤 한다. 그는 음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담배도 안피고 술도 안 마신다. 그래서 취미로 승마, 정구, 수영 혹은 스키를 선호한다. 그리고 카메라 사진기술에 조예가 깊다. 이런 불안한 상태에서 그는 1973년 베르디의 Macbeth에 Sherrill Milnes 및 Grace Bumbry를 상대로 출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1974년까지 메트에서 Cavaradossi, Maurizio, Ernani, Rodolfo 및 Edgardo의 역에 모두 출연하고 새로 프랑스말로 제작된 ‘로미오와 쥴리에트’ 및 ‘베르테르’의 주제역을 거쳐, Rudolf Bing 의 은퇴 후 다시 돌아온 칼라스와 ‘토스카’에 출연한 후 1964년 12월 비요너(Ingrid Bjoner)의 상대로 Turandot의 Calaf로 다시 출연하고 1975년 메트의 순회공연에 참가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일본에 순회 공연하였다.
이처럼 Met에서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계속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그는 Deutsche Oper Berlin(1961), La Scala(1962)에서 Joan Sutherland상대로 Meyerbeer의 ‘Huguenots’, Salzburg Festival(1962)에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지휘하에 Leontyne Price상대로 ‘트로바토레’에 시미오나토(Giuletta Simionato) 및 바스티아니니(Ettore Bastianini)와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62년 필라델피아에 처음 와서 Tosca의 Mario Cavaradossi로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그후 10년 동안 매년 필라델피아 Lyric Opera Company에 와서 여러역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파리 오페라좌(L’Opera)에서 칼라스를 상대로 ‘Tosca’에 출연하였다.
별명이 ‘Sputnik Tenor’ 혹은 ‘Pecorelli’
코렐리의 인기가 우주시대의 개막에 걸맞게 급속히 상승하고 있는 것을 본 많은 가수들이 그를 ‘Sputnik Tenor’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또 Pecorelli라고 그의 이름을 염소(Pecora)에 비유하였다. 이는 그의 발성법이 염소의 울음소리 같다고 비하하는 의미도 된다. 같은 맥락에서 빨리 출세하였다는 이유로 이용훈 테너의 경력을 오느날 ‘로케트 커리어’라고도 칭한다. 코렐리가 20세기 후반의 오페라계를 빛낸 테너였다면, 이용훈은 21세기 전반을 장식할 테너로 부상하고 있다.
코렐리는 항상 열정적으로 활기차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초기엔 악보불변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성숙해 가면서 악보를 이탈하는 경우가 점차로 적어지긴 하였지만... 1966년 The New Herald Tribune의 Alan Rich는 “코렐리는 오페라에 고용된 것이 아니고 오페라를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평하였다. 또한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서트른 프랑스어투와 어감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한편, The New York Times의 Harold C. Schonberg같은 비평가는 코렐리의 독창적인 연기를 극구 감싸주었다. 숀버그는 1965년 메트에서 제작한 ‘토스카’에서 칼라스를 상대한 Cavaradossi의 열연을 평하면서 “테너의 음성이 장려하게 장내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가 표현의 자율권을 행사했다면 그의 연출이 자체의 논리를 보여준 것이겠지...’ 과연 글룩크의 오페라혁신이전에 성행하던 가수들의 과시와 횡포와 남용이 오페라계를 얼룩지게 만들었던 시대로 복귀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계속 상승하고 그의 음반의 수요가 그가 타계한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1976년 그는 푸치니의 고향 ‘Tore del Lago’에서 그의 오페라 출연을 마감하였다. 그때 그는 55세였다. 그의 목소리가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수록 그는 더 신경을 곤두 세우곤 하였다. 그의 성미로 보아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그는 이때 은퇴성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의 목소리가 쉽게 피곤해지고 혼탁해져서 예전의 찬란하던 서정적인 부드러움이 가시고 있다. 오랜 성악가로서의 생활이 (성대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나는 늘 태산같이 걱정하였고 또 여러사람에게 화를 많이 내었다. 나는 신경 덩어리였고 침식을 잃고 있었다.”
은퇴후 그는 밀라노와 뉴욕에서 발성법을 젊은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1995년 그는 뉴욕에서 마스터 클라스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때였다. 그때 그는 조금 야위어 보였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반짝이었다. 그후 몇년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2003년 10월 그는 심장마비로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숨지었다. 그때 그는 겨우 82세였다. 그는 실로 20세기의 최후의 역강한 테너(tenore di forza)로서 힘차면서 찬란히 울리는 고음과 벨벹같은 서정적인 부드러움을 겸비한 유일한 테너였다.
콜렐리는 타계하기 얼마전에 “미래의 오페라가수는 한국에서 다수 나올 것”이라고 한인 젊은 가수들을 두둔하였다. 그 동안 소프라노뿐 아니라 테너, 바리톤, 바스, 메조에 이르기 까지 한인가수들이 세계무대에 속속진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늘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오페라를 들으면서 오페라 인생을 즐기고 있다.
한미 간(肝)협회장